235화
윈즈 변경주
‘그나저나 이 양반은 어디로 간 거야?’
엘릭은 어느 정도 체력이 돌아오는 듯하자 주변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메피스토가 보이질 않았다.
분명히 의식을 차릴 때까지만 해도 있는 걸 봤었건만.
오거스틴과 원로들을 상대하다 보니 갑자기 사라져 보이질 않았다.
‘멀리 가지 않은 건 확실한데.’
아자젤의 마기를 흡수하고 난 뒤, 엘릭과 메피스토 간의 보이지 않는 연결이 더 강해졌다.
집중한다면 상대의 표면의식까지 얼추 읽어낼 수 있을 정도.
딱히 대마왕의 사고를 읽고 싶은 생각은 없어서 그렇게 집중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가 대강 어디에 있는지 정도는 금방 알 수 있었다.
‘근처에 있다가 알아서 나타나겠지, 뭐.’
어차피 마정석이 자신에게 완전히 귀속되어 있는 한, 메피스토는 멀리 떨어지지 못한다.
월등히 높은 자율성을 얻은 만큼, 사람들을 피해 어디 산책이라도 나간 게 아닌가 싶었다.
“이제 돌아갈 거지?”
그러다 션이 툭 질문을 던졌을 때, 엘릭은 현실로 되돌아왔다.
엘릭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저기요.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세요?”
“윈즈 변경주가 코앞이지.”
“그런데도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엘릭의 물음에 션은 팔짱을 끼면서 콧방귀를 꼈다.
“이제는 딱히 그런 거에 구애를 받지 않을 것 같은데?”
엘릭은 대답 없이 가볍게 웃었다.
사실 션의 말이 맞긴 맞았다.
그전에야 제국군 대본영과 멀어지면서 강 위를 떠도는 오리알 신세가 되고 말았지만.
이제 전력을 어느 정도 갖췄으니 귀환을 걱정하지는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에이.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넘어가면 섭섭하지.”
션은 엘릭의 대답에 그럼 그렇지 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따지고 보면 자신도 그럴 것 같았다.
별의 종군이 일으킨 위업은 현재 제국군에도 들어가 한창 큰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었다.
황도를 비롯해 주요 대도시에서도 별의 종군과 엘릭을 다룬 특집 기사들이 하루에도 몇 개씩 쏟아져 나오는 판국이었고.
그런 그들의 업적에 열광해서 입대를 자원하는 청년들도 날이 갈수록 불어나는 중이었다.
마도명문의 부활.
이만한 가십거리가 또 어디에 있을까?
그만큼 커다란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와중이건만.
갑자기 쏙 귀환해버린다?
당연한 말이지만, 엘릭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판을 한 번 키워놨으면 이것을 더 키우면 키웠지, 절대 놓지는 않을 것이다.
거기다.
‘원로원도 더해졌고.’
네레스타 가문의 전력 중 절반을 차지한다는 원로들이 합류한 이상, 별의 종군이 자랑하는 전력은 이미 배로 증가한 것이나 마찬가지인바.
지금쯤 엘릭은 이 기회를 어떻게 활용할지 머릿속을 팽팽 돌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메르빙거의 가주를 만나게 되거든, 그때부터는 원로원들을 더 이상 말리지 마라.
-그… 래도 됩니까?
-말린다고 해서 말려질 양반들이더냐?
-…그건 아니긴 합니다만.
-그러니 놔두란 것이다. 수십 년 동안 가문에만 틀어박혀서 세월아 네월아 하던 분들이니, 간만에 바깥 공기를 맡으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잔뜩 흥분할 게 분명하다. 그리고.
-…?
-또 직접 확인해보고 싶기도 하구나.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원로원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고 난 뒤, 세상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이미 모든 걸 짐작했던지 가주인 가이도 원로원에 대해서는 더 이상 관여하지 않아도 좋다는 명령을 내렸을 정도였다.
그렇기에 션은 내심 궁금하기도 했다.
가이의 말마따나, 세상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어차피 이곳으로 오는 내내 사고를 그렇게 많이 치고 다녔으니. 모르는 곳도 없을 테고.’
지금부터는 한 발 뒤로 떨어져서 구경이나 해야겠다.
션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럼 이제 슬슬.”
엘릭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낚시를 시작해볼까?”
“무슨 낚시?”
션은 이게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얼굴로 엘릭을 바라봤고.
엘릭은 아카데미에서도 줄곧 잘 보이던 짓궂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무슨 낚시긴. 적사자를 낚을 낚시지.”
“…!”
* * *
윈즈 변경주.
본성(本城) ‘붉은 성’.
바스타드 소드, 테단.
적사자가 자랑하는 발톱이자 이빨로서 절대적인 승리를 자랑한다는 존재.
그런 그가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적은?”
“이미 포위망을…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적(敵).
적사자가에서 흔히 말하는 적이란 보통 그들을 이렇게까지 궁지로 내몬 제국을 지칭하는 단어였지만.
윈즈 변경주의 본성을 지키고 있는 테단과 수하들에게는 지칭하는 대상이 조금 달랐다.
별의 종군.
현재 윈즈 변경주 일대를 제집 안방처럼 들쑤시고 다닌다는 놈들이었다.
‘클레이모어’ 사그나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변경주로 다급히 말머리를 돌린 지 한창의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테단은 병력들과 함께 본성에 틀어박힌 채, 밖에서 어떤 소란이 벌어져도 절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별의 종군이 갑자기 종적을 감췄을 때도.
녀석들이 반년 만에 나타나 아크란 요새를 독차지했을 때에도.
지난 한 달 동안 변경주를 마구잡이로 들쑤시고 다니면서 적사자군으로 향하던 보급망을 차단하려 할 때도.
그때마다 놈들을 내쫓기 위해 지원 병력을 파견하긴 했어도, 절대 그들을 소탕하기 위한 대규모 작전은 벌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군영 내에서는 장교들 사이에 불만도 적잖게 차오르는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테단은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리고, 동요하는 이들을 따로 처벌했다.
이것이 전부 별의 종군이 노리는 바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확실하다. 별의 종군에는 뛰어난 지략가가 있어. 정확히 누군지는 알 수 없어도, 거기에 휘말렸다가는 여기 있는 병력까지 모두 파탄나게 될 거야.’
적사자가 테단을 다급히 이곳으로 보낸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네 명의 가신 중에서 가장 뛰어난 머리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메르빙거의 마수로부터 본토를 지켜야만, 이번 제국군과의 전쟁에서도 어떻게든 승기를 붙잡을 수 있을 테니.
그렇기에 테단이 봤을 때, 휘하의 다른 장교들처럼 별의 종군을 단순히 유격군이라고 폄하할 수 없었다.
이미 별의 종군은 바일 가문과 블랙 스컬이라는 막강한 부대를 보유하고 있는 데다가, 뛰어난 기동 능력까지 갖추고 있었다. 여태껏 선보인 전략도 하나같이 뛰어난 것들 투성이었다.
그런 와중에 함부로 움직였다간 정말 놈들이 마련한 함정에 빠지고 말겠지.
범의 아가리 속에 직접 몸을 밀어 넣는 꼴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테단은 기다리고 있었다.
별의 종군이 빈틈을 보이기를.
자신들에게 유리한 전장으로 저들이 걸어들어오기를.
그리고.
기다리던 때가 왔다.
별의 종군이 윈즈 변경주를 완전히 함락시키기 위해 본성을 둘러쳤다고 하지 않는가.
“저들의 전력은?”
“이전에 포착한 그대로입니다. 엘릭 메르빙거가 이끄는 별의 종군 본단과, 청사자의 바일 가문, 회사자의 블랙 스컬이 주둔해 있습니다. 그리고… 특이 사항이 추가되었습니다.”
“네레스타 가의 원로원을 말하는 건가?”
“예. 그렇습니다.”
“흠…!”
테단은 침음성을 흘렸다.
공성전이 벌어진다면, 분명 그는 별의 종군을 꺾을 자신이 있었다.
저쪽에 엘릭을 비롯해 청사자 헤르만과 회사자 세일러 등, 쟁쟁한 인사들이 잔뜩 포진해 있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전쟁은 단순히 초인들의 무력 수위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게 그의 믿음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네레스타 가의 원로원은 이야기가 달랐다.
항간에는 네레스타 가의 전력 중 절반을 차지한다고도 알려진 곳.
물론, 그런 허황된 말을 진짜 믿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곳이 무시해도 될 만한 곳은 아니라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
실제로 제국 대본영에서 이곳 변경주까지, 원로원이 일직선으로 내달리면서 일으킨 소동은 테단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저들이 마법 폭격이라도 가한다면… 그때는 진짜 머리가 아플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버티자.’
테단은 흔들리는 마음을 억지로 다잡았다.
‘그것밖에는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
아무리 별의 종군이 날고 기는 재주를 지녔다고 해도, 군량미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붉은 성은 요새 중의 요새.
절대 쉽게 함락되지 않을 것이란 믿음이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 ‘유령’, 그분이 움직이시면 모든 게 끝난다.
적사자군 내에서는 단순히 유령이라고만 부르는 그가 나선다면. 주군의 친구이기도 한 그가 나선다면. 절대 위험할 것은 없으리라.
국경수비대를 한껏 휘저으면서 4황자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고, 나아가 전장에서 감사자인 반트와 파펜 가주의 머리까지 잘랐던 이.
그도 현재 이곳에 있었다.
제아무리 엘릭 메르빙거가 날고 기는 재주를 지녔다고 해도, 머리가 바닥에 굴러떨어질 수밖에 없겠지.
별의 종군이 순전히 엘릭 메르빙거라는 젊은 영웅만을 구심점으로 구성되었다는 한계를 지닌 것을 감안한다면, 충분히 승산은 있었다.
바로 그때.
철컥!
집무실의 문이 활짝 열렸다.
“사령관 님.”
“왜 그러지?”
“적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벌써?”
테단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른 움직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냐?”
“서문입니다.”
“…결계 장치가 설치되어 있는 곳이군. 역시 마법사가 많아서 그런가, 잘도 그걸 읽었어. 영지민들이 절대 동요하지 않게 당부시켜.”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테단은 집무실을 나서려다 말고, 보고를 올린 수하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문제?”
“예. 그것이… 다른 병사들은 일절 없이 네레스타 가의 원로들만 전면에 나섰습니다.”
“뭐?”
순간, 테단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직감적으로 뭔가 간담이 서늘해지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여태껏 파악한 별의 종군 중에서도 하필 미지의 대상으로만 남아있는 이들만 나섰다?
그걸 두고 대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걸까.
테단은 수하들과 함께 다급히 서문으로 달려갔다.
성곽 아래.
저 멀리, 정말 수십 명으로 이뤄진 노인들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정말 하나 같이 전장에 나온 사람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아니, 그건 여유를 넘어 차라리 권태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몇몇은 늘어져라 하품을 해대고, 또 몇몇은 귀찮아 죽겠다는 듯 약지로 귓구멍을 파기까지 했다.
그러다 수장으로 보이던 이가 성큼성큼 앞으로 나섰다.
‘저자가 오거스틴…!’
주군이신 안드레 윈즈는 이곳으로 자신을 보내시면서 분명히 말씀하셨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만약 엘릭 메르빙거의 스승인 오거스틴 네레스타가 나선다면 바짝 긴장해야만 한다고.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았어도, 그는 반드시 경계해야만 한다고.
그러면서 칭하길.
‘괴… 물.’
그런 오거스틴을 중심으로, 새하얀 수증기가 무럭무럭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곳과 상당한 거리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숨이 턱 하고 막혔다.
테단은 다급히 옆에 있던 수하를 돌아봤다.
“유령 님을 불러와라, 당장!”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