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윈즈 변경주
“원주님?”
“아니, 대체 어딜 갔다 온 거야?”
오거스틴이 실내로 들어서자, 원로들의 시선이 온통 그쪽으로 쏠렸다.
심상 세계에서 빠져나와 다시금 기절한 엘릭을 지키는 동안, 갑자기 근방에 볼일이 생겼다면서 자리를 비우더니 10분도 되지 않아서 돌아온 것이다.
‘이 거머리 같은 것들이 알아서 좋을 건 없겠지.’
오거스틴은 굳이 벨롯과의 만남을 다른 원로들에게 이야기해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워낙에 오지랖이 넓은 인간들이니, 조언이랍시고 또 옆에서 쓸데없는 말을 쫑알쫑알 떠들어댈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음…?”
의제, 길리티가 옆에 딱 달라붙어서는 묘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킁킁. 냄새까지 맡아보는 것이 뭐 이런 미친놈이 다 있나 싶을 정도였다.
오거스틴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아, 또 뭐?”
“아니. 형님이 실실 웃고 있지 않수? 그러니 분명 우리 몰래 뭘 하고 온 게 분명한데.”
“뭔 소리를…!”
“내 코를 속이겠다는 거유? 귀신을 속이면 속였지, 내 코는 못 속이지.”
이렇게 되니 다른 원로들이 온통 시끄러워졌다.
“뭐야, 정말 무슨 일 있었어?”
“원주! 정말 우리 사이에 이러기야?”
“또 엘릭 같은 제자감 찾아낸 건 아니지?”
“우리도 가르쳐줘!”
“가르쳐줘!”
오거스틴의 얼굴이 더 크게 일그러지고 말았다.
‘젠장! 이것들이 또!’
그가 원로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꺼리는 이유.
바로 이런 어린애 같은 고집들 때문이었다.
나이를 뒤로 처먹기라도 한 건지, 평균 연령이 일흔이 넘어간다는 이 인간들은 좀처럼 심심한 걸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재미난 게 있어 보이면 우르르 단체로 몰려가서 직접 해봐야 직성이 풀리고, 자기네들 욕구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면 행패를 놓기 일쑤였다.
엘릭 건도 마찬가지.
오거스틴이 끝까지 엘릭을 숨기려고 했던 이유도 비슷했다.
자신들이 평생을 다해 연구한 업적을 물려줄 전인을 찾고자 하는 건 그들 모두의 공통된 욕망. 하지만 눈이 너무 높은 나머지 이렇다 할 제대로 된 제자를 두지 못한 경우가 태반이었다.
네레스타 가와의 계약이 있으니, 자신들이 죽어도 낸 결과물만큼은 절대 사장되지 않을 거란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직접 후계자를 기르는 건 그와 전혀 별개의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와중에 천재인 엘릭이 나타난다?
서로 독차지하기 위해 난리가 날 게 분명했기 때문에 어떻게든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다.
오거스틴도 원로원에 속하는 괴짜 원로인 만큼, 엘릭을 혼자서 독차지하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았다.
하지만 결과는 어땠나.
결국 저 능구렁이 같은 영감들에게 엘릭을 홀라당 뺏기지(?) 않았던가.
하물며 벨롯처럼 간만에야 기껏 찾은 재미난 물건을, 이번에도 또 가져가게 내버려 둔다고?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조용히 살고 싶다…. 세상을 알고 싶고… 내가 왜 살아가는지도 알고 싶다….
세상에. 자신의 존재 이유를 철학적으로 고찰하는 마왕이라니…!
그동안 휼을 비롯해서 자기 본능과 욕구에만 충실한, 그야말로 짐승이나 다를 바가 없던 마왕들만 보아왔던 오거스틴으로서는 흥미가 당길 수밖에 없는 놈이었으니.
그래서 오거스틴은 벨롯을 그냥 풀어주었다.
아니, 인간들을 마주치더라도 마기가 들키지 않도록 직접 손을 써주기까지 했다.
-이건…?
-흘흘흘. 마력의 기질을 가려주는 문신이니라. 그것이면 직접 도시로 간다고 해도, 마왕인 걸 들킬 염려는 없을 게다.
-그러니까, 이걸 왜…?
-재미있을 것 같아서.
-재미…?
-너 같은 마왕이 하나쯤은 있어도 괜찮을 것 같아서 풀어주는 것이니라. 물론, 여기에 조건이 없는 건 아니다.
오거스틴이 벨롯에게 내건 조건은 둘.
-하나는 인간을 해치지 말 것. 다른 하나는 인장을 쓰지 말 것. 마기를 조금이라도 끌어올린다면, 네게 새긴 이 문신도 같이 사라지게 될 게다.
-그건…!
-물론, 힘이며 체력은 그대로니 생활하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을 것이지만. 만약 네가 내게 한 언약을 깨고 힘을 드러낸다면… 약속하마. 이 늙은이가 직접 너를 찾아가 그 머리통을 뽑아버릴 것이니라.
-….
-나는 마족이라고 해서 다 같은 마족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결국 마족은 마족일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네가 그걸 넘어 보이겠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은 게 아니겠느냐?
벨롯은 한참 동안 우두커니 서서 오거스틴의 말뜻을 곱씹어 보다가,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훌쩍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오거스틴은 별 개의치 않았다.
그것이 녀석 나름대로 가진 고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흘흘흘. 부디 이 늙은이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어야 할 텐데 말이지.’
오거스틴이 몸담은 녹야는 오랫동안 휼의 뒤를 쫓아다니면서 마족에 대한 증오를 키워왔다.
반면에 그 때문에 마족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 더 깊은 지식을 갖추기도 했으니.
오거스틴은 그 과정에서 마족과 수많은 인연을 겪기도 했다.
그의 한쪽 팔이 다크 엘프의 것인 것도 전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욱씬!
‘그놈, 겉보기에는 둔해 보여도 풍기는 냄새는 너와 비슷한 것 같았는데 말이다. 그 결과는 좀 달랐으면 좋겠구나.’
오거스틴은 한쪽 팔을 손으로 쓰다듬으면서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옛 벗에게 작게 중얼거렸다.
여하튼.
벨롯에 대한 이야기만큼은 이것들에게 절대 말할 수가 없었다.
절대로!
“이 형님 보소. 또 눈주름에 힘이 바짝 들어가시네. 형님들, 우리 원주님 어떻게 하는 게 좋겠소?”
길리티가 그런 오거스틴의 기색을 읽고, 혀를 차면서 원로들을 돌아봤고.
원로들은 두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면서 천천히 오거스틴에게 다가갔다.
“좋은 건.”
“같이 나눠야지.”
“그렇고말고.”
“그러니까.”
“내놔!”
좀비 떼처럼 어슬렁어슬렁 다가오는 노인네들을 보면서. 오거스틴은 이것들을 대체 어떻게 요리하면 좋을까 고민해야만 했다.
‘이 영감탱이들을 확 날려버릴 수도 없고!’
확 그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네레스타 가의 내규상 가신들 간의 분쟁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어 그러지 못하는 게 천추의 한일 뿐이었다.
물론, 저 많은 원로를 한꺼번에 상대하려면 오거스틴으로서도 절대 쉽지는 않겠지만.
“깼습니다!”
션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소리쳤다.
어딘지 모르게 안도에 찬 얼굴.
오거스틴과 원로들의 시선이 모두 그쪽으로 돌아갔다.
“엘릭이, 깼다구요!”
원로들의 머릿속에는 더 이상 오거스틴에 대한 것이 남아있지 않았다.
우르르르. 전부 한마음 한뜻이 되어 엘릭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 * *
“머리는? 가장 중요한 머리는 어때?”
“일단 가벼운 현기증 말고 이상이 없는 것 같은데?”
“그래도 좀 더 상세하게 살펴봐! 마기 잔여물이라도 남아있으면 어떡하려고 그래?”
“이미 하고 있으니까, 재촉 그만해!”
“재촉? 재초오오옥? 우리 귀한 제자님이 누워 계신 데 재초오오오옥?”
“….”
“반사신경, 운동신경 정상! 교감 신경도 괜찮은 것 같고, 또….”
“마나 로드는? 거긴 어때?”
“이, 이건!”
“왜? 왜? 무슨 일이라도 있어?”
“아, 아니…. 마력회로가…! 용종 이래로 단 한 번도 발견되지 않았다던 마력회로가…! 오오오오오!”
“용혈! 용혈도 있어!”
“역시! 우리 제자님이 참 대단하시구만. 그런 뜻에서 혈청 하나만 좀….”
“….”
“눈깔은? 눈깔은 왜 이래? 좀 흐리멍덩한 것 같은데. 초점이 안 잡혀.”
“원래 이렇지 않았나?”
“응? 그랬나?”
“원래 우리 제자님이 좀 게슴츠레 했잖아.”
“….”
정신없다.
아니, 이건 그런 수준을 넘어서 정신이 사나운 수준이었다.
원로원의 원로들이 엘릭을 살펴보겠다면서 달라붙은 이후로, 조용해야 할 병실은 시끄러워도 너무 시끄러워졌다.
엘릭의 손발을 이리저리 주물러보질 않나, 마력회로를 살펴보고 감탄하질 않나, 또 한쪽에서 직접 피를 뽑아보려 하질 않나….
이건 치료라기보다는, 숫제 신기한 실험체를 만나게 되었을 때나 보이는 열의와 아주 비슷했다.
그도 그럴 것이, 원로들의 눈에 엘릭의 몸뚱이는 노다지(?)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수십 년을 살아오면서 남들은 평생 겪어보기 힘들 경험들도 숱하게 겪어본 베테랑들이라지만.
그런 그들의 눈에도 용혈을 각성하고, 마정석을 갖춘 엘릭의 신체는 아주 신기했던 것이다.
멸종한 지 벌써 천 년도 넘게 지난 용의 힘을 얻었다고 하니, 눈이 돌아가지 않는 게 이상할 지경이었지만.
하지만 문제는 엘릭이 아직 절대적 안정을 취해야 하는 환자라는 점이었고.
더 큰 문제는.
‘그게 ‘엘릭’이라는 거지.’
엘릭은 여태 의식에서 깨어나고 난 뒤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
원로들이 자신의 손발을 이리저리 만져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무미건조하게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겉보기에는 그냥 스승들의 호들갑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것으로 보일지도 몰랐지만.
션의 눈에는 전혀 다르게 보였다.
마치 폭발하기 일보 직전의 활화산처럼.
션이 언제든지 탈출할 수 있도록 몰래 문가 쪽으로 슬금슬금 걸음을 옮긴 이유였다.
“스승님?”
처음으로 엘릭이 입을 떼자, 원로들의 시선이 똑같이 그쪽으로 돌아갔다.
“날 불렀느냐?”
“그래! 네 스승, 여기에 있다.”
“말하려무나, 내 새끼. 뭐 필요한 거라도 있느냐? 내 전부 다 가져다주마!”
“추우냐? 더 두꺼운 이불을 갖다 주랴? 아니면 배고파? 도시락을 싸 왔는데 좀 줄까?”
엘릭의 눈에 들어오려는 원로들의 두 눈에는 광기마저 어려 있었다.
하지만.
“….”
엘릭은 그 많은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노인들은 자연스레 엘릭의 시선이 다른 곳에 고정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쪽으로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오거스틴이 있었다.
“흠흠! 험험! 그래. 이 스.승.님.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라도 있느냐?”
오거스틴은 내심 헤벌레 입꼬리가 벌어질 뻔한 것을 가까스로 억눌러야만 했다. 그리고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으면서 뒷짐을 쥔 채로 물었다.
엘릭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귀찮은 분들, 좀 떼어내 주시면 안 될까요?”
그 말에 오거스틴이 음흉하게 웃었다.
반면에 다른 원로들의 안색은 딱딱하게 굳었다.
네레스타 가의 내규가 가신들 간의 분쟁을 철저하게 막고 있다지만, 제자의 부탁이라는 명분(?)이 있다면 눈엣가시나 다름없던 이들에게 손을 써도 내규 위반은 아니었으니까.
“흐흐흐! 우리 제자의 부탁이 부탁이니만큼, 이 스.승.님.이 도와주마.”
오거스틴이 소매를 말아 올리면서 성큼성큼 앞으로 나섰다.
원로들도 똑같이 이를 악물면서 마법을 발동하기 시작했다.
“에잇! 원주! 네가 우리 귀여운 엘릭에게 무슨 손을 쓴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독점은 절대 안 되지!”
“이참에 원주를 확 떼어놓고, 엘릭에 대한 지분(?)을 우리도 되찾고 말 테다!”
우당탕탕!
쿠르르, 쿠르릉-
그렇게 창밖으로 튀어 나가면서 오거스틴과 원로들의 싸움이 시작되자, 바깥세상이 소란스러워졌다.
반면에 실내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주 조용해졌으니.
션은 아주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엘릭을 보면서 물었다.
“노린 거지?”
“당연하지.”
“에휴!”
이제는 엘릭이 원로들의 머리 위에서 논다는 생각에, 션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