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아자젤
엘릭이 외쳤다.
“【깃들어라】.”
간단한 진언과 함께, 주인을 잃고 떠돌아다니던 마기 구름이 메피스토를 중심으로 돌기 시작했다.
츠츠츠-
마기 구름은 맹렬한 속도로 메피스토에게 흡수되기 시작했다.
온통 시커멓게 색칠된 세계에서.
메피스토. 그 혼자만이 유일하게 색을 잃지 않고 서 있는 것만 같았다.
“하하하! 하하하!”
숙적의 마기를 흡수하는 그의 웃음 속에서는 희미하게나마 광기마저 느껴졌으니.
더 높이 도약하려는 그의 의지가 얼마나 강렬한지를 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찰칵!
찰칵!
메피스토가 아자젤의 마기를 흡수하는 속도가 빨라지면 빨라질수록.
엘릭의 손등에 그려진 원죄의 인장도 점차 환한 빛을 발했다.
거기서부터… 아주 조금씩이지만 마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나 로드의 마력이 고스란히 마기와 뒤섞였다. 덕분에 원죄의 인장도 엘릭의 감각 속에서 점차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마치 한참 동떨어진 섬에다 다리를 놓아 통행을 가능케 한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엘릭은 이처럼 원죄의 인장을 확연하게 느껴본 적이 없었기에 더더욱 감탄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이건…!’
처음 용혈을 얻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모든 것을 얻은 것처럼 고양감이 장난이 아니었건만.
이건 그 이상을 넘어서고 있었다.
세계의 법칙이, 세계의 흐름이 온통 손끝에 닿는 느낌.
마치 신이 되어 세계를 관조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동조!’
노루스 재상에게서 작은 악마를 흡수했을 때와 흡사했다.
그와 메피스토가 서로 감각을 공유하던 때.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때는 마치 존재가 뒤섞이는 듯한 동화에 가까웠다면, 지금은 한 발자국 떨어져서 그의 기쁜 심정만 읽는 게 전부였다.
그것이 단순히 원죄의 인장 계통을 흡수하지 않아서 생긴 차이점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이 흡수가 모두 끝나고 난다면, 메피스토는 완전히 달라질 거라는 것.
이전처럼 단순히 부유령 상태에 그치지 않을 게 분명했다.
‘덕분에 내 마정석도 많이 흘러나왔고.’
어느새 마정석의 융해율은 50%에 육박하고 있었으니.
모든 흡수가 끝나면 이것을 넘을 게 분명했다.
사실상 보석룡이나 대마왕 하나 급의 마력을 오롯이 통째로 쓸 수 있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엘릭으로서는 그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도무지 짐작이 가질 않았다.
콰콰콰콰!
그렇게 흡수 속도도 더 가팔라지던 그때.
「이대로는. 안 될.」
어렴풋하게나마 아자젤의 목소리가 들렸다.
잔존사념이라도 남아있던 걸까?
녀석이 마지막 힘을 쥐어짜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그리고.
“이놈이, 끝까지 주제도 모르고!”
메피스토가 인상을 팍 구기면서 마기 쪽으로 손을 뻗으려 했지만.
파아앗!
마기 중 일부가 메피스토의 손길을 거부하듯 도중에 방향을 꺾었다.
마치 화살이 날아드는 것처럼 뾰족한 가시가 엘릭에게로 쏘아졌다.
「너만은. 내가 죽일.」
아자젤의 잔존사념은 마법을 유지하는데 정신이 팔린 지금 상태의 엘릭이라면 어떻게든 해치울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 같았다.
엘릭도 똑같이 그쪽으로 손을 뻗으려 했다.
이것을 눌러야만 흡수가 빨리 끝날 것 같았으니까.
파앗!
마기 화살이 곧 사방으로 뻗치면서 거대한 마수(魔獸)의 형상을 갖추었다.
갈까마귀가 날개를 퍼덕이며 엘릭을 집어삼키기 위해 부리를 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누가 감히 내 제자를 해하려 드는가!”
하늘에서부터 어느 노인의 괴팍한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리는가 싶더니.
콰르르릉!
강렬한 섬광이 엘릭 앞으로 떨어졌다.
화아악!
섬광이 사라진 자리.
진노에 쌓인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스, 스승님?”
엘릭은 노인을 보고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마주치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할 수 없었던 얼굴이 바로 거기에 있었으니까!
오거스틴 네레스타.
네레스타 가의 원로원주이자 녹야의 주인이기도 한 존재가 일갈을 내질렀다.
“삿된 옛 마왕아. 원래 네가 있어야 할 곳으로 되돌아갈지어다.”
오거스틴이 거칠게 손길을 흔들자, 그의 손끝에서부터 피어난 새하얀 빛줄기가 세계에 녹아들었다.
스스스스!
촤촤촤촤-
다섯 손가락이 스친 허공에는 어김없이 단층이 생겨났고.
거기서부터 발출된 하얀 칼날이 갈까마귀를 마구잡이로 난도질했다.
얼마나 하얗던지, 세계가 온통 하얀 장막으로 뒤덮인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크악. 으아아.」
아자젤의 비명은 바로 거기서 끝나고 말았다.
조각난 마기 조각은 일제히 메피스토에게 흡수되었고.
동시에 엘릭의 손등에 박힌 원죄의 인장도 다른 어느 때보다 화려하게 빛났다.
“아자젤을, 찢어…?”
“대체 무슨?”
미아를 비롯한 나하트람 등은 그 광경을 보고 큰 충격에 빠지고 말았다.
아무리 극히 일부만 남은 잔존사념이라고 해도, 아자젤은 아자젤.
저렇게 인간의 손길 한 번에 쉽게 당할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엘릭이 ‘스승’이라 부른 존재는 그것을 너무 쉽게 해냈으니.
사실 엘릭의 허락도 없이 이렇게 무의식 세계에 자유롭게 들어온 것부터가 이미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다들 놀라거나 말거나.
오거스틴은 이 불쾌하기 짝이 없는 장소에서 빨리 벗어나려는 듯, 엄한 얼굴로 엘릭에게 손을 뻗고 있었다.
“다들 기다리고 있는데, 여기서 대체 뭘 하는 거냐. 나가자. 얼른.”
엘릭은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오거스틴의 손을 붙잡았고.
파아앗!
다시 새하얀 빛무리가 엘릭의 시야를 가렸다.
그러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엘릭, 엘릭! 정신이 드냐? 어?”
역시나 여기서 볼 수 없을 것 같았던 션이 다급한 얼굴로 그를 흔들고 있었다.
그의 뒤로 헤르만과 세일러, 길리티 같은 익숙한 얼굴들이 숱하게 보였다.
‘원로원 사람들까지…?’
대체 이 많은 사람이 언제 합류하게 된 건지. 그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엘릭의 눈에 가장 크게 들어오는 것은 이렇게 많은 인파 너머에서 메피스토가 이쪽을 보며 뚱한 얼굴로 코웃음을 치는 모습이었다.
아아, 이제야 끝났구나.
그런 안도감과 함께.
스르륵!
“어어어? 야, 얌마! 갑자기 거기서 자면 어떡해!”
엘릭은 몰려오는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수마에 몸을 맡기고 말았다.
긴장이 풀리면서 생긴 결과.
그래도 그의 입가에는 만족에 찬 웃음이 걸려 있었다.
* * *
무너진 그리고리의 총단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
“전부… 끝났다….”
거대한 나무 틈 사이로 엄청난 거구가 몸집을 일으켰다.
그러자 아무렇지 않게 주변을 서성이던 사슴이 화들짝 놀라 다른 곳으로 뛰고, 새들이 다급히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거구의 주인, 벨롯의 눈동자는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끝났다.
그가 중얼거린 한마디는 그의 속내를 전부 표현하고 있었다.
별의 종군이 그리고리 총단을 급습할 당시.
그는 사실 이미 그전부터 공기의 흐름이 미묘하게 달라진 사실을 눈치채고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그리고리와 대제사장을 도와줄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그럴 의무를 느끼지 못했으니까.
“대제사장… 항상 나를 무시했다…. 나를 없는 사람처럼 취급했어….”
남들은 벨롯의 느린 행동과 말투를 보고 우둔하다고만 평가했었지만.
사실 벨롯은 사고 과정이 남들보다 느려서 그렇지, 절대 멍청한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어떤 면에 있어서는 사고의 범주가 더 깊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매사에 있어서 자신의 일이 아닌 것처럼, 한 발 떨어져서 냉철하게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으니까.
그래서 그는 항상 그리고리의 일을 자신의 일처럼 여기는 다른 마왕들과 다르게, 자신이 하는 일에 항상 의문을 품고 있었다.
내가 이걸 왜 해야 하는 거지?
내가 왜 저 말에 순순히 따라야 하는 거지?
나는 말 잘 듣는 개가 아닐 텐데?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동안 그리고리에 충실했던 것은, 그들이 자신을 낳아준 부모였기 때문이었다.
자식이 부모의 말에 충실히 따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어느 날 자신을 보는 그리고리와 대제세장의 시선이 ‘자식’이 아닌, ‘충견’이나 ‘도구’를 향한 것에 가깝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로 그의 내적 갈등은 이미 더욱 격해진 상태였다.
그런 와중에 대제사장이 죽으라는 말이나 다를 바가 없는 명령까지 내리니,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고 그리고리를 떠나온 것이다.
“대제사장… 나빠….”
만약 거기서 대제사장이 조금이라도 따뜻한 말을 해주었더라면.
미안하게 되었다면서 진정 어린 사과가 섞인 부탁을 했더라면.
그랬더라면. 자신도 그 말에 순순히 따랐을지도 모르는데.
“이제… 어디로 가지…?”
그래도 마지막 남은 미련이 있었기에 여기서 계속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조금 전. 모든 게 끝났다.
대제사장도, 아자젤의 구속도 모두 사라진 지금.
그는 자유였다.
하지만 오갈 곳 없는 자유가 정말 자유라고 할 수 있을까?
존재 목적이 사라진 지금. 벨롯은 이제 자신이 대체 뭘 해야 하는지를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뭐라도 해야….”
하지만 벨롯은 다른 마왕들처럼 여기서 죽을 생각은 없었다.
이왕에 주어진 삶. 이 끝에 뭐가 있는지는 확인해보고 싶었으니까.
존재에 대한 갈망은 일반 인간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그런데.
멈칫!
벨롯이 걸음을 옮기려다 말고 도중에 정지했다.
“나와…!”
벨롯의 시선이 강렬하게 닿은 자리. 아무것도 없는 허공으로 오거스틴이 나타났다.
“흘흘! 이거 마왕답지 않게 감각이 제법 예리하구나. 우둔해 보이는 가면을 쓰고, 속으로는 능구렁이를 품고 있는 건가?”
오거스틴의 시선이 예리하게 빛났다.
그는 아주 잠깐 고민하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이 녀석을 제거할 건지 말 건지.
그리고리 총단에 들어섰을 때부터 그를 감지하긴 했지만, 별다른 살기를 품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엘릭을 치료하는 게 우선이라 그냥 놔두고 있었는데.
이대로 그냥 되돌아갈 기미를 보이니 어떤 녀석인지 궁금해졌던 것이다.
하지만 오거스틴이 이렇게 모습을 드러냈는데도 불구하고.
벨롯은 마기를 끌어 올린다거나, 전투태세를 한다거나 하는 경계 어린 모습을 일절 보이지 않았다.
그저.
‘호오. 도망을 치려 한다?’
뒤로 언제든 내뺄 생각만 하고 있을 뿐.
오거스틴은 그런 벨롯이 너무 신기하기만 했다.
휼을 포함해서 여태 그가 만났던 마왕들은 하나같이 본능에 가까운 투쟁심과 호전성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벨롯은 품고 있는 마기나 괴력은 대단할지 몰라도, 성정은 일반 마왕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것 같았다.
“난… 싸우기 싫다….”
벨롯은 짤막하게 잘라서 말하면서 양손을 높이 들었다.
“당신… 너무 강해….”
이쯤 되니 오거스틴도 손길을 거둬들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여차하면 바로 목을 칠 수 있게 마력을 끌어올리는 것은 절대 잊지 않았다.
“너 같은 괴짜 마왕이라면 재미있게 나눌 수 있을 이야기가 아주 많을 것 같은데.”
오거스틴의 두 눈이 묘하게 반짝거렸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