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화
아자젤
‘해보자.’
엘릭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마자 곧장 작업에 들어갔다.
지금 그의 손에 잡힌 것은 결의 뭉치. 이것에다 마력을 투영하면 마력장이 된다.
‘하지만 미아는 그 전에 여기에다 의지를 한 번 더 불어 넣으라고 했지.’
무의식 세계를 이루는 법칙에다 자신의 의지를 맹목적으로 계속 불어넣어야만 이것을 비틀 힘이 되어 줄 테니까.
엘릭은 이 결 뭉치에다가 의지를 어떤 방식으로 불어넣을까 하다가, 아귀감을 투영시켰다.
이제 그의 모든 감각을 합친 공감각(共感覺)이라 할 수 있는 만큼, 의지를 불어넣는 것도 손쉬우리란 판단 때문이었다.
지이이잉!
그러자 손에 잡힌 결 뭉치가 거칠게 떨렸다.
그러면서 서서히 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흑색 혹은 백색이던 결의 뭉치가 황금색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엘릭의 머리카락과 같은 색.
그의 의지를 머금고 새로운 성질을 띠기 시작했다는 증거였다.
‘이것을 앞으로 ‘념(念)’이라고 부르자.’
결과 의지가 합쳐지면서 유형화된 형태이니 새로운 이름이 필요했다.
‘이 다음에는.’
파직! 파지지직!
‘마법을 부여한다.’
뇌화의 인장 위로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샛노란 뇌기는 금세 범위를 확장하면서 팔뚝을 타고 념의 뭉치로 스며들었다.
그 과정에서 중압의 인장이 발동되어 뇌기를 단단히 뭉쳐놓는 것을 절대 잊지 않았다.
압축된 뇌기는 더 큰 뇌기를 부르고, 회전까지 시작하면서 념을 더욱더 강화했으니.
휘휘휘휘…!
파지지직-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맹렬하게 타오르는 뇌정구(雷霆球).
마치 엘릭의 손바닥 위에 태양이라도 떠오른 것 같은 광경이었다.
“너, 그거…!”
미아는 옆에서 그 광경을 보면서 기함을 터뜨리고 말았다.
사실 그녀는 여태 엘릭에게 시조 마법을 가르쳐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장은 무의식 세계의 법칙을 다루는 것만 해도 엘릭에게 어려운 요구라고 생각했으니까.
여태껏 미아가 엘릭에게 가르쳐주려 했던 것은 의념을 다루는 방법이었으니.
시조 마법은 의념을 자유자재로 다루고, 그것을 세계에다 완전히 각인시키는 과정을 획득하고 난 뒤에야 겨우 입문할 수 있는 학문이었다.
즉, 이제야 겨우 엘릭이 의념이 무엇인지 개념을 깨달은 만큼, 무의식 세계를 장악하고 난 뒤에 천천히 가르쳐줄 예정이었는데….
‘그 과정을 이렇게 뛰어넘었다고?’
엘릭이 심안으로 결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활용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기에 헛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내가 너무 내 방식을 강요했던 건지도….’
미아는 뼈저리게 반성해야만 했다.
살아생전 가문의 마법사들을 가르치던 습관이 남아있어 엘릭도 똑같은 방식으로 가르치려 했던 것이건만.
이럴 게 아니라, 처음부터 엘릭에게는 그에게 맞는 방식을 찾아서 가르쳐줘야만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돌아가지 않아도 되었을 테지.
여하튼.
엘릭은 미아가 가르쳐준 방식과 스스로가 터득한 방법을 조합하여 시조 마법에 다다를 수 있었으니.
그는 손바닥 위에 떠오르는 뇌정구를 본 순간 직감할 수 있었다.
이것이 자신이 발현하려던 ‘진짜’ 시조 마법이라는 것을.
대제사장에게 사용했던 것은 그저 흉내 내기에 불과할 뿐이었다.
‘인장이 따끔거리는데. 등급을 올려놓을 필요가 있겠어.’
엘릭은 이미 한계 수준을 훨씬 초과했다면서 격렬하게 비명을 질러대는 뇌화와 중압의 인장을 느끼면서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저 먼 곳에 있는 아자젤을 응시했다.
아자젤은 여전히 메피스토 등과 엎치락뒤치락하는 싸움에 매달려 있었다.
녀석은 여전히 엘릭이 뭘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아니, 관심도 없는 것일 테지.
메피스토와 겨울 6장을 앞에 두고 있으니, 언제든 치워버릴 수 있는 햇병아리 따위는 굳이 신경 쓸 필요도 없다고 여긴 것이리라.
그것이 자신에게 독이 될지도 모르고.
피식!
엘릭의 입술 끝이 비틀렸다.
“어, 저 웃음?”
미아는 엘릭의 미소를 손으로 가리키면서 눈을 끔뻑거렸다.
“오토 한과 똑같은…?”
그녀에게는 어쩐지 그 웃음이 낯설지가 않았다.
그들에게 설명도 제대로 하지 않고 뭔가 일을 꾸몄을 때의 오토 한이 항상 꼭 저런 모습이었으니까.
“【내려라】.”
그 순간, 엘릭이 손에 붙잡고 있던 념을 있는 힘껏 내리면서 마법을 발동시켰고.
뇌정구가 사라지는 념 속에 묻히는가 싶더니, 곧 새카만 하늘 위로 샛노란 벼락이 나타났다.
콰르르릉!
아무런 징조도 없이 나타난 벼락은 단박에 갈까마귀의 한쪽 날개를 길게 쭉 찢어 놓았다.
“크악! 이게 무슨…!”
아자젤의 비명이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하지만 엘릭의 공세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내리고】, 또 【내려라】.”
뇌정구가 생성될 때마다 계속 뇌벽의 세가 발현되었다.
마력 소진은 걱정하지 않았다.
아무리 아자젤이 장악했다고 하지만, 이곳은 엘릭의 무의식 세계. 그 법칙에 조금이라도 끈을 닿았다면, 얼마든지 뇌벽의 세를 연거푸 전개할 수 있었다.
콰릉, 콰르릉, 콰르르-
콰콰콰콰!
우르르릉-
샛노란 섬광이 하늘을 뒤덮던 갈까마귀의 날개를 마구잡이로 난도질했다.
워낙에 덩치를 크게 불려놓은 덕분에 뇌벽의 세를 굳이 특정 위치에 고정할 필요도 없었다.
그냥 보이는 곳은 어디든 뇌벽의 세를 연거푸 쏟아내기만 하면 되었다.
그럼 날개에 상처가 나고, 마기가 피처럼 마구잡이로 쏟아졌다.
“크아아악!”
아자젤의 비명도 저절로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여태껏 일행들을 괴롭혔던 깃털 세례도 뚝 그칠 수밖에 없었고.
“이거…?”
“어이없지만, 우리 후손님이 한 방 먹이신 모양이군.”
체페슈와 다미르는 서로 눈치를 주고받더니, 곧 자신들이 가진 기술 중에서 가장 파괴력이 강한 기술들을 연거푸 터뜨렸다.
해골 거인이 일으킨 거센 풍압에 신성력이 가미되면서 갈까마귀의 본체를 후려쳤다.
“이 보기 싫은 걸 또 봐야 하는 게 짜증나지만.”
메피스토도 이때가 기회라고 여겼는지 마기를 더 크게 끌어 올렸다.
고오오오!
“그래도 이놈이 비명을 지르는 꼴을 보니 그나마 괜찮군.”
구우우우!
구슬픈 하울링(Howling)이 어디선가 음산하게 퍼져 나온다 싶더니, 등 뒤에 자리매김하고 있던 뿔 달린 늑대의 환영이 불쑥 나타나 갈까마귀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콰드드득, 콰득!
뼈마디가 근육과 함께 잔뜩 으스러지는 끔찍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감히, 감히…!”
아자젤은 어떻게든 끈질기게 달라붙는 메피스토의 늑대를 떨어뜨리려 했지만, 그럴수록 고통만 더 커진다는 사실에 괴성을 질렀다.
눈가에 핏대가 잔뜩 섰다. 그리고 여전히 자신의 날개를 걸레짝처럼 만들다시피 하는 엘릭이 있는 쪽을 노려봤다.
그로서는 잔뜩 열이 받을 수밖에 없는 상태.
벌레 취급하던 엘릭에게 이렇게 농락당하고 있다는 사실도 화가 났지만.
자신을 이렇게 괴롭히는 마법이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을, 철천지원수인 메르빙거의 시조를 떠올리게 했으니…!
때마침 엘릭이 이쪽을 보면서 히죽 웃고 있었다.
“이야, 이거 재미있는데?”
거리는 아주 멀어도, 아자젤의 귓가에는 너무 선명하게 들렸다.
“이런 미친 새끼가…!”
“미친놈한테 그런 소리 들으니까 좀 짜증나네. 남의 육체 강탈하려고 해놓고 뭘 잘했다고 지랄이야.”
엘릭은 인상을 딱 굳히면서 다시 뇌벽의 세를 터뜨렸다.
쿠르르릉!
“크으으윽…! 이래서는, 안 된다! 이래서는…!”
아자젤은 이대로 있다간 정말 큰일 나겠다는 생각에 우선 지금 사용하고 있는 육체를 버리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엘릭 근방에서 육체를 재생성하자. 그런다면 이 빌어먹을 시조 마법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엘릭을 먼저 처치해서 수고를 더는 편이 차라리 나을 것 같았다.
“원래대로라면 여기 있는 놈들을 전부 소화하고 난 뒤 마지막에 너를 먹으려 했지만… 어쩔 수 없구나!”
아자젤로서는 엘릭을 먼저 먹어 치울 경우, 무의식 세계가 붕괴하여 메피스토나 겨울 6장을 놓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최후로 미뤄둔 거였지만.
메르빙거는 역시 메르빙거였던지, 이제야 먼저 치워버렸어야만 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무, 뭐지…?”
아자젤은 순간 움찔거리고 말았다.
해체가… 이뤄지질 않았다.
분명히 육체에 감각은 있는데, 무의식 세계와의 연결고리가 느껴지질 않았던 것이다.
[아 참, 이제 리셋은 좀 힘들 거야.]
그런 아자젤의 생각을 읽은 듯, 엘릭의 웃음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이제 여기 내 거거든.]
“…!”
어느새 엘릭이 무의식 세계의 남은 통제권까지 손에 넣었던 것이다!
모두 아자젤이 뇌벽의 세에 정신없이 유린당하느라, 미처 감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그러니까.]
엘릭의 냉소가 여기까지 느껴졌다.
[한 번 더 가즈아아아!]
“아, 안…!”
콰르르릉!
촤촤촤촤-
여태껏 펼쳐진 뇌벽의 세 중에서 가장 강한 일격이 몸뚱이를 거칠게 가로질렀다.
그의 거대한 몸뚱이가 반쯤 갈라지다시피 하고.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더 이상 패를 숨겨두고 말고 할 것도 없겠군.”
메피스토가 차갑게 웃으면서 손을 앞으로 내뻗었다. 그러자 마기가 그의 손에 걸리면서 길쭉한 무언가가 생성되었다.
아자젤은 그게 뭔가 싶다가 두 눈을 크게 뜨고 말았으니.
“그, 그건…!”
“드래곤 킬러(Dragon Killer). 이걸 여기서 꺼내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지.”
그것은 창이었다.
메피스토의 몸체보다도 훨씬 길쭉하고 거대한 창.
언젠가 엘릭이 보석룡의 둥지에서 환영으로 봤던 것이기도 했다. 보석룡의 생명을 빼앗았던 것이 바로 저 창이었으니까.
하지만 오랫동안 메피스토를 지켜봤던 아자젤은 알고 있었다.
저 창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힘을 지니고 있는지.
원래는 마족의 오랜 앙숙이었던 용을 사냥하기 위해 메피스토가 직접 고안했지만, 언제부턴가 그를 상징하는 이빨이 되어버렸던 것.
저것에 노출된다면, 그로서도 위험할 수밖에 없을…!
“이게 드러나는 게 손해긴 하지만, 너를 잡아먹는다면 그래도 얼추 남는 장사가 되지 않겠나?”
메피스토의 두 눈이 흉흉하게 빛났다.
“그러니 이만 본왕의 일부가 되어라, 아자젤.”
파아아앗!
쐐애애액-
메피스토가 드래곤 킬러를 있는 힘껏 던졌다.
그러자 한 줄기 섬광이 궤적을 그리면서 갈까마귀의 정중앙을 그대로 꿰뚫었다.
퍼어어억!
그 위력이 얼마나 대단하던지 수십 명의 사람이 들어가도 남을 정도의 엄청나게 큰 바람구멍이 났고, 그마저도 소용돌이가 일어나면서 범위를 빠른 속도로 확장했다.
그리고.
쩌저저적!
마치 유리창에 금이 가는 것처럼, 갈까마귀 전체에 균열이 잔뜩 퍼졌으니.
존재 자체를 부순다는 드래곤 킬러의 악명답게, 아자젤의 본체도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위태롭게 흔들렸다.
“안…!”
그런 아자젤의 힘겨운 한 마디와 함께.
퍼걱, 촤촤촤촤!
조각 난 아자젤의 파편들이 지상으로 우수수 쏟아졌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