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아자젤
아크란 요새에 메르빙거의 깃발이 걸렸다는 소식이 들린 이후.
션을 비롯한 오거스틴과 원로원은 엘릭을 찾기 위해 독단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적사자가와 야만족 측 진영에서도 어떻게든 그들을 막아서려 했다.
마탑의 종주라 할 수 있는 네레스타 가가 숨겨둔 힘을 꺼냈다는 것.
그것만 해도 그들로서는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는 사안이었으니까.
하지만 원로원이 가진 전력은 그들이 상정한 것보다 훨씬 대단한 것이었으니.
대적불가.
오거스틴은 자신의 이름 앞에 어째서 그런 수식어가 붙게 되었는지를 몸소 보여주었다.
하얀 밤을 일으킬 때마다 수많은 적이 깡그리 지워졌던 것이다.
세상에는 모습을 그리 많이 드러내지 않았지만, 녹야의 역대 전승자 중에서도 가장 높은 성취를 이룬 그는 가히 ‘재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또한, 어디 그뿐이랴?
오거스틴을 따르는 원로원도 대단하긴 마찬가지였다.
원로원이라는 단체로 싸잡아 묶여 있어서 잘 드러나지 않았을 뿐.
그들 개개인 중에는 이미 한때 대륙을 공포로 떨게 했던 유명인들도 아주 많았으니.
자유혁명군의 간부 출신이기도 했던 길리티 렌즈가 항상 선두에 있었고, 그 외에 다른 원로들도 그동안 골방에 틀어박혀서 했던 연구의 결과물들을 아무렇지 않게 선보였다.
파죽지세.
거침없이 전진하는 그들의 앞을 가로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성벽을 통째로 무너뜨리고. 죽은 자를 일으키고. 독이 잔뜩 섞인 안개를 뿌리고….
그 어떤 적도 그들의 근처에 다다르지도 못했다.
‘아버님의 생각이… 옳았어.’
그런 그들을 항상 옆에서 지켜보면서. 션은 생각했다.
‘이분들은 함부로 풀어놔서는 안 되었던 거야.’
가이는 상황이 가장 극단적으로 화려할 때 원로원을 풀어야 한다고 했다.
그것은 단순히 그들의 전력이 대단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한 번 풀어놓으면, 그 다음부터는 절대 제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만약 엘릭을 구해야 한다는 목표가 없었다면, 다들 그냥 날뛰기만 하셨겠지. 그랬다면…!’
션은 더 이상 생각을 길게 이었다간, 가문의 어른들께 불경 어린 짓밖에 되지 않을 것 같다는 판단에 그만 생각을 그쳐야만 했다.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알 수 있었다.
앞으로 더 이상 그들을 평상시처럼 대할 수는 없을 것 같다는 것을.
괴물.
션의 눈에 원로들은 이제 그렇게 보였다.
그리고 원로원은 그런 괴물들을 잔뜩 응집시켜둔 마굴(魔窟)이었다.
‘그럼 이런 마굴의 공동 전인이 되어버린 엘릭은 대체…!’
션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리고 몇 번씩이나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자 했다.
자신은 이런 괴물들을 목적지까지 잘 인도해야만 한다. 거기에 한 치의 실수란 있어서도 안 되었다.
그래야 적진 한가운데에 갇힌 엘릭도 ‘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야만족의 보급로가 차단되었다고 합니다!
-케트라인 요새 재탈환! 윈즈 변경주의 4대 요새에 전부 메르빙거의 깃발이 걸렸습니다!
-별의 종군을 막기 위해 적사자가 급히 투입했다는 별동대도 전멸했다고 합니다…!
-적사자군과 야만족 진영 사이에 적잖은 동요가 발생했습니다! 서진(西進) 정지!
제국 국경 지대로 깊숙하게 들어가면서도, 전황은 파악할 수 있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가이로부터 받아왔던 통신구에서는 매번 승전 보고가 이어졌다.
별의 종군, 바일 가문, 블랙 스컬의 잇따른 승전보.
단순히 아크란 요새를 장악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적사자군과 야만족의 후방을 빠른 속도로 정리해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통신구에서는 적들이 적잖은 혼란에 잠겨 있으며, 보급선도 거의 끊기다시피 하면서 비축한 군량미가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다는 내용이 계속해서 전해졌다.
‘씨발.’
그때, 션이 느낀 감상평은 아주 간단했다.
‘구하러 오긴 개뿔. 그냥 내버려 뒀어도 알아서 잘 올 거였잖아.’
너무 걱정되던 나머지, 엘릭이 어떤 인간인지 아주 잠깐 잊어먹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사막에 떨어뜨려도 살아남을 인간이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울컥했다.
‘해냈구나, 정말.’
그가 감개무량한 것도 당연했다.
아카데미에서 같이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공부하던 때가 엊그제만 같은데.
마도명문의 수치라며 손가락질받기만 하던 엘릭이, 이제 대륙을 떨쳐 울리고 있었으니까.
그것이 전부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엘릭의 소식은 그 뒤로도 계속 이어졌다.
-별의 종군은 임무를 모두 완수하고 나면, 나타났을 때처럼 사라질 때도 바람처럼 사라진다.
-그 때문에 그들이 본거지를 어디로 두고 있는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적사자도 그 때문에 적잖게 골머리를 쥐어 싸맨다고 한다.
-감찰국에서 뭔가를 파악한 낌새가 있긴 하지만, 정보는 공유해 주지 않았다.
-자체적인 판단 결과, 별의 종군은 처음 함락시켰던 아크란 요새 혹은 그 주변 일대를 중심으로 근거지를 마련한 것 같다는 추측이 있었다.
네레스타 가 정보부의 정보력은 감찰국의 정보력과 비교해도 크게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는바.
그곳에 있는 수많은 전문가가 머리를 맞대어 추측해본 결과, 엘릭과 별의 종군은 활약상과 다르게 정작 본단은 그리 많이 움직이지 않은 것 같다는 의견이 주를 이뤘다.
그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정보부의 주된 의견으로는, 별의 종군의 진짜 목적이 윈즈 변경주 함락이 아니냐는 의견을 내비쳤으나.
-다른 한편으로, 소수의 의견으로는 혹시 뭔가를 숨기기 위해 그러는 게 아니냐는….
여태껏 별의 종군이 벌인 활약상들로 미루어 봤을 때, 그들의 목적은 마치 제국 본토 깊숙한 곳으로 들어간 적사자군과 윈즈 변경주 간의 연결고리를 끊어 각각을 고립시킨 뒤.
홀로 외딴 섬처럼 떨어지게 된 윈즈 변경주를 통째로 집어삼키려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이 모든 것들이 무언가를 숨기려는 연막 작전이 아닐까 하는 의견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정작 엘릭 메르빙거의 모습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런 보고를 받았을 때, 션은 가슴이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아크란 요새에 한시라도 바삐 도착하기 위해 속도를 더한 것도 전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크란 요새에 들어섰을 때부터 강렬한 마기 파동을 느낄 수 있었으니.
그때부터 션과 원로들은 바짝 긴장한 채 아무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이 주변에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니까.
그러다 길리티 렌즈가 소리친 것이다.
엘릭을 발견했다고!
“어디냐, 거기가!”
오거스틴이 두 눈을 부릅뜨면서 다급하게 물었고.
“이곳이오!”
“그리로 가자.”
자리에 있던 오거스틴과 몇몇 원로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부양 마법이 발동되면서 그들의 몸이 허공에 둥실 떠올랐다.
“원주님!”
션이 다급하게 오거스틴을 불렀지만.
“위험할 수 있으니 너는 이곳에서 다른 노인네들까지 다 합류시키고 나서 오너라.”
오거스틴은 션을 만류하고 난 뒤, 길리티를 따라 어디론가 사라졌다. 아크란 요새에서 한참 떨어진 어느 산자락이었다.
“….”
션은 이를 악물었다.
마차의 고삐를 잡는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자신의 실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을, 왜 모를까.
정작 필요할 때는 엘릭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 마음 속에 가시처럼 박혀들 뿐이었다.
‘나도…!’
그렇기에 션은 엘릭에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어주기 위해서 어떻게든 힘을 길러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녀석에게 아무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랐다.
* * *
“오셨어요, 아버지?”
헤르만은 이사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벗은 투구를 탁상에 내려놓았다.
“그래.”
“별일은 없으셨구요?”
“요즘 들어 저들의 저항이 훨씬 더 거세지고 있단 느낌이 들더구나.”
“궁지로 내몰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서 그런 걸 거예요. 마지막 저항에 불과하니, 틈만 내어주지 않는다면 알아서 무너져 내릴 거예요.”
헤르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딸이 짚은 대로 일을 처리해서 실패한 적이 없으니 이번에도 그녀의 추측이 옳을 거라 여겼다.
“그보다. 엘릭의 상태는?”
순간, 이사벨의 낯빛이 살짝 어두워졌다.
“여전히… 그대로예요.”
“죽을 맛이로군.”
엘릭이 아자젤의 마기에 젖은지 벌써 한 달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별의 종군은 엘릭이 남긴 지시에 따라, 그리고 이사벨의 지휘에 따라, 윈즈 변경주 곳곳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덕분에 그들의 명성은 이제 제국을 넘어 대륙 전역으로 퍼져가고 있었지만.
정작 수뇌부로서는 속이 바짝 타들어 가고 있었다.
엘릭이 도무지 깨어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으니까.
차라리 마기에 완전히 감염되었다면 포기라도 했을 테지만.
마기를 줄줄 내뿜으면서도, 안색은 여전히 그대로였으니.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주지 못하는 현실.
아니, 돕지는 못하더라도, 엘릭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정확한 내막이라도 알 수 있다면 이렇게까지 답답하지는 않을 텐데.
별의 종군 내에 엘릭 만큼 뛰어난 마법사가 없다는 사실이 못내 마음에 계속 걸릴 뿐이었다.
다행이라면 그리고리 놈들이 남겨놓은 안가가 있어 적사자군으로부터 병력을 숨기기가 용이하다는 것?
마족이 유일하게 쓸모가 생긴 셈이었다.
‘여하튼 빨리 끝나야 할 텐데.’
갑갑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려던 그때.
쿵!
헤르만은 갑자기 공기를 짓누르는 엄청난 위압감에 허리를 쭈뼛 세웠다.
‘이건 대체…!’
혹시 그동안 뒤쫓던 마왕 벨롯이라도 나타난 걸까?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한 것이 나타났을지 모른다.
그렇지 않아도, 그동안 총단이 사라진 것치고 그리고리의 반응이 너무 없는 게 아니냐는 의견도 나왔었던바.
어쩌면 새로운 마왕이 나타났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절대 자신보다 하수가 아닐 터였다.
그래서 재빨리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가려는데.
[그게 대체 무슨 소리지? 내 제자 놈이 어디 다치기라도 했다는 뜻이냐?]
익숙한 목소리였다.
“오거…!”
[대답해라. 내 제자에게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거지?
오거스틴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하지만 헤르만은 그것이 더욱더 소름 끼치게 느껴졌다.
‘이게 유일하게 황금사자에 대항할 수 있다는 작자의 힘인가…?’
그동안 오거스틴과 농도 나누어가며 제법 친분을 쌓았다 여겼건만. 어쩐지 지금에야 비로소 일부나마 그의 진면목을 엿본 느낌이었다.
새로운 경지를 내다보기 시작했다고 자부한 그도 쉽게 가늠할 수 없는 힘.
“…우선 밖으로 나오시오. 이쪽도 할 말이 많으니.”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츠츠츠!
맞은편 공간이 갈라지면서 오거스틴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뚜벅, 뚜벅.
조용한 발걸음이었지만, 한 발씩 옮겨질 때마다 거대한 무언가가 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늙은이에게 한 점의 오해도 생기지 않게, 제대로 설명하는 게 좋을 것이다.”
오거스틴의 두 눈이 스산하게 빛났다.
그럴수록 세상이 온통 새하얀 빛깔로 물드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까만 밤을 먹어치우는 ‘하얀 밤’.
대적불가의 괴물이 눈을 뜬 순간이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