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아자젤
“이딴 곳에서 마주치다니. 참으로 기분이 더러워.”
메피스토는 여전히 팔짱을 낀 채로 흉흉하게 눈을 빛냈다.
목소리도 더 이상 엘릭의 머릿속에서 울리는 텔레파시가 아닌, 육성으로 내고 있었다.
“아주.”
분명히 그가 갖추는 자세는 평상시와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엘릭이 뭔가를 할 때마다 옆에서 팔짱을 낀 채 못마땅하다는 듯 눈치를 주는 건, 메피스토의 트레이드마크나 다름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분명히 같은 동작인데도 불구하고.
절대 항거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하게 사위를 압도하는 힘을 뿜어내고 있었다.
세상이… 떨리고 있었다.
와르르-
쿠쿠쿠!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그리고.
엘릭은 메피스토의 등 뒤쪽으로 자리 잡은 또 하나의 환영을 볼 수 있었으니.
그것은 산양의 뿔을 가진 늑대로, 머리는 하늘 끄트머리에 닿고 몸집은 대지에 닿아 세상을 전부 뒤덮고 있는 형태였다.
엘릭은 그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저것이야말로 ‘메피스토펠레스’라는 대마왕이 지니고 있던 진짜 모습이었을지니!
그것은 이 심상 세계에서는 현실 세계에서와는 달리 모든 제약이 사라졌기 때문에 비칠 수 있는 광경이었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아자젤도 그에 못지않은 위세를 자랑하고 있었다.
메피스토가 늑대라면, 아자젤은 까마귀였다.
새카만 날개를 높이 활짝 펼치고서 붉은 눈동자를 흉흉하게 빛내는 까마귀.
그렇게 늑대와 까마귀 간에 이루어진 아주 잠깐의 대치 후.
휙!
두 대마왕의 신형이 제자리에서 사라졌다.
콰아아앙!
그러다 중간 지점에서 서로 맞부딪치게 되었다.
메피스토는 손을 내뻗고 있었고, 아자젤은 마기를 칼날처럼 예리하게 세워서 휘두르고 있었다.
콰르르릉, 콰르릉-
콰콰콰콰!
그냥 단순히 충돌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사방으로 흩어지는 후폭풍은 대지를 마구잡이로 할퀴고 산자락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뭔 놈의 마력 파장이…!’
지상에서 둘을 지켜보고 있던 엘릭으로서는 두 눈이 커질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흔히 대마법사나 현자들을 가리켜서 ‘하늘을 가르고, 대지를 쪼개는’ 실력을 지녔다며 묘사를 하곤 하지만.
실제로도 그렇게 해낼 수 있는 건 절대 아니었다.
그런 것은 일반 마법사가 아니라, 그냥 ‘신’이라고 할 만한 존재들일 테니까.
하지만 두 대마왕은 진짜 ‘하늘을 가르고, 대지를 쪼개고’ 있었다.
손을 크게 휘저을 때마다 높다랗게 서 있던 협곡이 무너져내리고, 발을 구를 때마다 산자락이 치솟으면서 마법을 막아냈다.
공간을 찢는 불벼락을 내리는 등, 그야말로 자연재해라고 할 만한 광경이었으니.
거기서 엘릭은 자신의 몸 하나 챙기기에도 급급했다.
‘대체, 얼마나 차이가 나는 거야…!’
엘릭은 내심 그동안 가지고 있던 자신감이 흔들리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그래도 동계의 인장을 사용하고, 용혈을 얻으며, 겨울 6장으로부터 차례로 인정받던 중이지 않았던가.
레다라는 마왕을 잡는 데에도 성공했기에 이제 내심 어느 정도 스스로의 실력에 대해 자부심이 차오르고 있었건만.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이 절로 떠오를 정도로 강한 충돌을 벌이는 두 대마왕을 보고 있노라니, 그런 자부심이 안으로 쏙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한편으로는 저런 대마왕들을 상대로 승기를 잡았다는 오토 한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감도 오지 않을 정도였으니…!
‘대체 어떻게 공격해야지? 틈이 보이질 않아.’
엘릭은 지금 여기서 누구를 도와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틈틈이 아자젤을 포착할 기회만을 노리고 있건만.
그게 그리 말처럼 쉽지 않았다.
심안을 열고, 아귀감으로 포착하려 해도. 아자젤의 움직임은 이미 그가 ‘읽어낼 수’ 있는 범위를 한참 넘어선 상태였다.
섣불리 잘못 공격했다간 자칫 메피스토에게 불리한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는 상황.
어찌어찌 틈을 찾는다고 해도, 이 엄청난 마력 폭풍 속에서는 제 한 몸 챙기기에도 급급했던 것이다.
‘시간을 너무 길게 끌어서는 안 될 텐데.’
심상 세계와 현실 세계 간에 시차가 얼마나 있는지 정확하게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절대 둘의 싸움을 오래 놔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
아무리 용혈로 버틴다고 해도, 그사이에 육체가 붕괴할 우려가 있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그렇게 엘릭이 조바심으로 전전긍긍하고 있을 무렵.
콰르르르-
파바바밧!
“…흡!”
엘릭은 다시 일어난 두 대마왕 간 충돌의 여파로 이쪽을 향해 날아드는 마기의 파편을 보고 재빨리 마력을 끌어올렸다.
손에 얼음창을 붙잡은 채로 그것을 튕겨내려는데, 좀처럼 쉬워 보이질 않았다.
너무 빨라서 피하는 건 불가능했다.
‘어떻게든, ‘부리’를…!’
엘릭은 모든 의념을 창끝에 쏟아부으면서 마기 파편을 튕겨내려 했다.
하지만 심안으로는 도저히 어디를 찔러야 하는지 결이 보이질 않았다.
완전무결(完全無缺).
이미 그 자체로도 허점이 없는 파편이기 때문에 약점을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무작정 부딪쳐보자는 생각에서 이를 악물며 얼음창을 내지르려는데.
“후…! 이거, 이거, 사리 분별을 못 하는 건 오토 한과 똑같군.”
뒤에서 불쑥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낯익은 목소리.
엘릭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덩치 큰 사내가 어느새 그를 마기 파편으로부터 가리고 있었다.
“나하트람?”
“저런 걸 네가 어떻게 막겠다는 거냐.”
나하트람은 그렇게 한 마디를 툭 던지면서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러자 어느새 그의 손에는 3미터 남짓한 길쭉한 봉이 자라났으니.
츠츠츠-
그 끄트머리에서부터 푸른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천천히 피어나더니 곧 면적을 넓혀가면서 바람에 크게 나부꼈다.
그 모습이 마치, 거대한 깃발을 보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나타난 깃발의 면 부분에는 이제 엘릭에게도 익숙한 옛 메르빙거의 인장이 그려져 아름답게 반짝였다.
파라라락!
실제 깃발이 흩날릴 때나 들을 수 있는 소리가 나는 것만 같았다.
나하트람은 그런 깃발을 요란하게 흔들면서 마기 파편을 맞받아쳤다.
엘릭이 시도했던 것처럼 튕겨내는 것이 아니라, 깃대를 움직여서 마치 천으로 마기 파편을 감싸는 듯하다가 다른 곳으로 휙 하고 내던지는 식이었다.
결국 마기 파편은 나하트람과 엘릭에게 아무 피해도 입히지 못한 채로, 저 멀리 애꿎은 바닥만 두들겨야 했다.
콰아아앙!
거친 폭음과 함께 모래 기둥이 높이 치솟았다.
쉬쉬쉬쉭-
퍼러러러럭!
그러고 나서도 나하트람은 같은 방식으로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마기 파편을 옆으로 빠르게 쳐냈다.
그사이, 엘릭 옆으로 미아가 공간을 열고 나타났다.
“일단. 딴 데로 가자.”
미아가 이쪽으로 손을 뻗었다.
잡으라는 뜻.
엘릭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 손을 맞잡은 순간, 그를 둘러싼 세계가 흔들렸다.
파아앗!
엘릭과 미아가 다시 나타난 곳은 두 대마왕에게서 한참이나 떨어진 장소였다.
심상 세계의 끝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주 먼 곳.
문제는 그렇게 충분히 거리를 벌렸음에도 불구하고, 메피스토와 아자젤의 기세가 여기까지 전해진다는 점이었다.
여전히 피부가 따끔따끔할 정도였다.
“장난 아니지?”
미아는 두 대마왕에게서 좀처럼 시선을 뗄 줄 모르는 엘릭을 보면서 말했다.
이전에 만났을 때도 느꼈지만.
그녀에게서는 여전히 인형처럼 아무런 감정 표현도 느껴지질 않았다.
목소리마저 무뚝뚝했다.
얼음 조각이 떨어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당신들은… 이런 곳에서 살았던 겁니까?”
미아는 담담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럼…?”
“저것들과 오토 한이 이상했던 거야. 우리가 정상이었고.”
“….”
“아, 너도 이상해. 저것들이 뭐가 좋다고 계속 봐? 도무지 이해가 안 가.”
엘릭은 어쩐지 자기도 모르게 쓴웃음이 나왔다.
왠지 이해가 갔으니까.
그러다 미아 쪽으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아, 그보다 감사합니다.”
“뭘?”
미아가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을 짓자, 이번에는 엘릭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절 구해주셨지 않습니까?”
그러자 미아의 무표정한 얼굴이 묘하게 변했다.
“나는 네가 나에게 화낼 줄 알았는데.”
“제가요? 왜요?”
“내가 가르쳐준 봉인식 때문에 이렇게 된 거니까.”
“아.”
엘릭은 무슨 말인가 했다가, 미아의 말뜻을 알아채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와달라고 했던 건 어디까지나 저였고, 미아가 한 건 도와준 것밖에 없잖습니까? 따지고 보면 제 부주의 탓입니다. 사도가 다 죽어가는데도 아자젤이 개입하지 않은 걸 의심했어야 했는데… 안일했던 건지, 오만했던 건지, 제 실수였습니다.”
순간, 미아의 눈가에 이채가 어리는 것을, 엘릭은 미처 보지 못했다.
“실수, 아니야.”
“예…?”
“말했잖아. 아자젤이 이상한 거라고. 용의주도했던 거야. 이번에 막았어도, 언젠가는 이렇게 됐을 일.”
엘릭은 미아가 자신의 자책을 어루만져주는 모습에 묘한 느낌을 받고 말았다.
이전에 이쪽에서 되게 쌀쌀맞게 대했건만. 정작 미아는 당시의 일을 별다르게 마음에 두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얼음꽃’이라는 별명만 듣고 어렵게 생각했는데.
감정 표현이 서툰 것일 뿐, 어쩌면 속은 따뜻한 사람일지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빠져나갈 만한 마법은 없습니까?”
미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없어. 퇴치 밖에는.”
“…저걸요?”
엘릭은 설마 하는 심정으로 여전히 맹렬하게 부딪치는 두 대마왕을 가리켰고.
미아는 손가락을 따라서 그쪽을 슬쩍 봤다가 아주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저걸.”
“장난이시죠?”
“장난으로 보여?”
“….”
저런 말도 안 되는 걸, 당장 퇴치해야 한다고?
엘릭은 한순간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피식.
그 순간, 미아의 입술 사이로 아주 작게 실웃음이 삐져나왔다.
“퇴치가 무작정 대마왕을 쓰러뜨리라는 뜻이 아니야. 말 그대로 여기서 멀리 내쫓아버리면 되는 거지.”
“그럼…?”
“어렵긴 해도, 마역화(魔域化)가 진행되어버린 심상 세계를 다시 네 손에 넣게 되면 내쫓을 수 있을 거야. 지금부터 그걸 도와줄게.”
마역은 마족과 마왕의 영토를 의미한다. 즉, 마기로 인해 엘릭의 심상 세계가 현재 엘릭이 아닌 두 대마왕에게 소유권이 넘어갔다는 뜻. 그것을 되찾으라는 의미였다.
“주문을 외우려면 시간이 한참 걸릴 텐데… 가능하겠습니까?”
마역의 탈환이 이뤄지려면 ‘정화’도 같이 이뤄져야 한다.
엘릭은 그것이 얼마나 오래 걸리는 작업인지를 잘 알기 때문에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사이에 아자젤이 이쪽으로 어떤 꼼수를 부리려 할 수도 있었으니까.
지금도 메피스토가 계속 붙잡아둬서 그렇지, 녀석은 호시탐탐 엘릭이 있는 곳을 노리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우린 녀석을 이기지는 못해도, 최소한 녀석을 막아줄 수는 있으니까.”
‘우리…?’
엘릭이 그 대답에 고개를 번쩍 들던 그때.
“시건방진 후손이 잘도 사람을 귀찮게 만드는군.”
“그러게. 시건방지기 짝이 없던 지난번을 생각하면 도와주고 싶지는 않은데.”
툴툴대는 말투를 쓰는 두 사람이 홀연히 나타나 엘릭의 좌우로 각각 서 있었다.
나하트람에 비해 훨씬 작아 엘릭과도 체구 면에서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이들.
반면에 풍기는 기세만큼은 그보다 훨씬 날카롭고 위압적이어서 오히려 마족에 가까운 것 같다는 인상이 강했다.
겨울 6장.
새로운 인물인 ‘피의 군주’ 체페슈와 ‘철의 군장’ 다미르의 등장이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