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아자젤
“모두 물러나!”
엘릭의 다급한 외침에 주변에 있던 병사들은 자기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뒤로 널찍이 떨어지고 말았다.
‘내 실수다.’
엘릭은 이를 악물었다.
사도가 죽고 봉인되는 마지막 순간까지 아자젤이 아무 반응도 없었던 것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의심을 해봤어야 했는데…!
그런데 일말의 망설임 없이 보석을 삼키고 말았다.
그저 아자젤의 마기를 흡수하겠다는 안일한 생각만으로.
마력기관에서부터 마기가 스멀스멀 피어 올라왔다.
신체가 검은 마기로 잠식되기 시작했다.
마치 혼탁한 물에 잠긴 것처럼.
콰콰콰콰!
그렇게.
몸을 빼앗으려는 아자젤과.
빼앗기지 않으려는 엘릭의 사투가 시작되었다.
* * *
엘릭에게 도와줄 게 없을까 하고 찾아왔던 브라이언과 아테는 두 눈을 크게 떠야만 했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기운이 엘릭의 주변을 감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휘휘휘…!
“저, 저건…!”
“마기!”
브라이언이 비명을 질렀고, 아테는 이를 악물면서 허리춤에 걸어뒀던 자신의 검으로 재빨리 손을 가져갔다.
이제는 그들도 엘릭이 마기를 흡수할 수 있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엘릭을 감싸고 있는 마기는 그런 것과는 달랐다.
포악했다.
그리고 거칠었다.
마치 엘릭을 당장이라도 꿰뚫어 죽이려는 듯.
물어뜯을 기회만을 호시탐탐 노리며 그를 가늠하고 있는 듯했다.
엘릭도 고통으로 얼룩진 얼굴을 하고서 마기를 억눌렀으니.
여태 엘릭이 다루던 마기가 고분고분한 느낌을 보이다가 점차 소멸했던 것과 다르게.
지금 저 마기는 화마처럼 맹렬하게 타오르면서 당장이라도 엘릭을 집어삼킬 것처럼 굴었다.
쿠쿠쿠쿠…!
마기가 거칠게 요동칠수록, 사방으로 뻗쳐 나가는 마력 파동도 엄청났다.
산자락 전체가 뒤흔들리는 것만 같았다.
브라이언과 아테 모두, ‘숨이 막힌다’는 느낌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그들의 귓가에 속삭이는 것 같았다.
굴복하라!
숭배하라!
너희들의 심장을 갈라, 나에게 바쳐라!
그런다면 이 갑갑함이 사라질 것이라고, 너희들은 자유를 맞을 것이라며 유혹하는 것만 같았다.
아테는 이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마기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아자젤!”
이제는 마족 외에 대륙에서도 기억하는 이들이 극히 드물다는 옛 대마왕.
광기의 아자젤이 눈을 뜬 것이다.
「처음 너를 봤을 때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지. 그토록 찢어 죽이고 싶었던 메르빙거가… 설마 이 시대에도 활개를 치고 있었을 줄이야.」
아자젤의 목소리는 끈적끈적했다.
여태껏 남들과 제대로 나누지 못한 대화를 지금 와서 전부 나누려는 듯, 목소리에는 웃음기마저 섞여 있었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마기가 너무나 강렬해서, 엘릭은 대꾸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이를 악무는 것으로 대체해야만 했다.
고작 대답 한 번 하자고 집중에 허점이 생긴 순간, 자칫 정신이 잠식당할 수도 있으리란 생각이 들 정도로 위태로운 상황이었으니까.
지잉, 지이이잉!
우우우웅-
그럴 때마다 용혈이 맹렬하게 회전하여 육체에 억지로 힘을 불어넣고, 마정석이 마력을 쥐어짜면서 마기의 마수(魔手)를 억지로 밀어냈다.
하지만.
아자젤은 그런 엘릭의 저항이 아주 재미있어 죽겠다는 눈치였다.
이조차 그에게는 놀이나 다름없단 뜻일 테지.
「내가 알고 있는 메르빙거는 제 잘난 맛에 사는 족속들이니, 항상 질투에 눈이 멀기 마련인 인간들에게 결국 치어 죽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하지만 너무 쉽게 봤나 보더군. 메르빙거. 참 독종이긴 했지.」
마음에 안 드는 마기로군.
그때, 엘릭의 그림자가 일렁이면서 위로 불쑥 올라와 휼의 사념이 형상을 갖췄다.
크르르-
그림자 짐승은 아자젤에게 짙은 분노를 표시했다.
여태 상대하던 머저리들의 주인인가 보군. 마기는 제법 먹을 만하던데. 본체는 어떤 맛일까?
크아앙!
그림자 짐승은 아가리를 쩍 벌린 채 엘릭에게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파아앙!
수십 수백 개의 촉수로 분리되어 엘릭을 휘감고 있던 마기의 장벽에 부딪히자마자 한참이나 튕겨 나가고 말았다.
마기는 휼의 사념을 노리지도 않았다.
마치 너 따위는 상대도 아니라는 듯.
귀찮다는 투였다.
감히!
휼의 사념이 그런 아자젤의 의도를 모를 리가 없었다.
서대륙에 네 명의 대마왕이 있어 세상을 공포에 떨게 했다면, 동대륙에는 휼이 있어 세상을 비탄에 잠기게 만들었나니.
지금은 비록 영락할 대로 영락한 모습이 되었다고 한들, 휼이 가진 자긍심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휼의 사념은 몸집을 배로 크게 부풀리면서 아자젤의 마기를 물어뜯고자 했다.
콰콰쾅!
쿠르르-
상황이 이렇게 되자, 브라이언과 아테도 다급하게 움직였다.
이렇게 잠자코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퍼지는 찬란의 휘광】!”
“타아앗!”
브라이언은 마기를 정화하는 백마법을 광역기 형태로 전개했고, 아테는 불과 뇌전으로 이뤄진 가문의 기술을 다시 끄집어내면서 마기의 촉수를 어떻게든 잘라내고자 했다.
별의 종군들도 다급하게 움직이는 사이.
츠츠츠-
아자젤의 마기는 마치 손길처럼 엘릭의 턱을 쓰다듬고 있었다.
“안… 돼!”
엘릭은 두 눈이 시뻘겋게 충혈된 채로, 억지로 목소리를 쥐어 짜냈지만, 도무지 수하들에게 닿지를 않았다.
이대로는 너희들도 위험하다.
최대한 멀리 달아나라.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저들에게는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여하튼. 이 바퀴벌레처럼 남은 마지막 메르빙거를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던 중에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더군. 이걸, 가지는 건 어떨까?」
아자젤은 외부의 방해 따윈 전혀 신경 쓰지도 않았다.
발밑에서 개미 따위가 아무리 꿈틀거린다고 한들, 누가 신경이나 쓴단 말인가?
아자젤에게 있어 브라이언과 아테 등은 그런 개미만도 못한 족속들이었다.
심심하면 언제든 밟아 죽일 수 있을 개미.
「내 신도들이 여태 ‘그릇’이라며 갖다 바친 것들이 몇 개 있긴 했지만. 내 눈에는 죄다 하자 있는 쓰레기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넌 다르더군.」
“….”
「아주 마음에 들었어. 아주! 어떻게 날 위해 이렇게 정성스럽게 만들어진 그릇이 있을까 싶을 정도였으니…!」
“…!”
「사실.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을 일이기도 했어. 메르빙거. 너희들은 원래 우리와 별 다를 바 없는 족속들이긴 하니까.」
두근!
두근!
아자젤이 던진 말에. 어쩐지 엘릭은 미친 듯이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언젠가 마족의 인장을 강탈하는 메르빙거의 기원을 두고 가지기도 했던 고민이 그곳에 있었다.
「지금이야 인간의 탈을 쓰고 있다지만. 흐, 흐흐흐! 우리와 같은 기원을 둔 너희들을 어떻게 ‘인간’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
「그러니 갈아타는 것도 쉬울 것 같았지. 그런데… 음, 이를 어쩌나? 내가 가려는 곳에 이미 선객이 있었네?」
웃음기로 가득하던 아자젤의 목소리에 서서히 광기가 섞이기 시작했다. 비웃음을 가득 머금으면서 아자젤의 마기가 마치 엘릭의 옆에 있던 누군가에게 반갑다는 듯 살랑살랑 손을 흔들었다.
「안 그런가, 메피스토펠레스?」
『….』
메피스토는 아자젤이 의식을 드러낸 이후로 단 한 번도 입 한 번 벙긋하지 않고 있었다.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아자젤의 마기를 노려보고만 있을 뿐.
「멍청하게 메르빙거에 목줄이 붙잡힌 개가 되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기분은 어떻지?」
아자젤이 그동안 레다가 죽고, 벨롯은 도망치며, 대제사장은 봉인되던 일련의 모든 과정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이유.
거기에는 분명 엘릭이 조금 더 자신을 위해 육체를 완벽하게 갖출 시기만을 기다리던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 먼저 엘릭을 노리려다가 당하고 만 메피스토의 존재를 눈치챘기 때문이 훨씬 더 컸다.
섣불리 덤벼서는 그와 같은 꼴이 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기회를 노렸고, 이렇게 지금 기회를 붙잡게 되었다.
아자젤과 메피스토.
두 마왕은 흔히 ‘대마왕’이나 ‘마신의 신하’라는 카테고리로 같이 묶여서 설명되기 일쑤였지만.
사실 정작 그들 둘은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다.
마신의 총애를 더 많이 탐내야 한다는 정치적 입장도 있었지만, 추구하는 이상이나 성격도 너무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메피스토는 항상 고고했다.
항시 남들과 섞이는 것을 싫어했고, 수많은 수하를 앞세우면서 다니는 다른 마왕들을 병정놀이에 심취했다며 비웃기 일쑤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서열 놀이를 좋아하고 감정적이기 일쑤였던 아자젤을, 기품 따윈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다며 대놓고 무시했다.
반면에 아자젤은 그런 메피스토를 멍청하고 나약하다며 미워했다.
마신도 그런 두 마왕이 대립하고 반목하는 것을 수수방관하는 편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아자젤은 천년 만에 눈을 뜨자마자 맞닥뜨린 메피스토의 멍청한 꼴을 한껏 비웃었다.
여기에 대해서 녀석이 뭐라고 변명할지.
가장 미워하고 증오하던 대상에게 이런 추한 몰골을 보이게 되었을 때 과연 어떤 변명을 던질지가 궁금했다.
그런데.
『…떨어져라.』
「뭐?」
『떨어져라. 거기서.』
「푸하하핫! 뭐? 떨어지라고? 천하의 메피스토펠레스가, 설마, 원죄의 대마왕이, 인간을 걱정하는 거냐? 그것도 메르빙거를?」
『그것은 본디 본 왕이 가지려던 것이었느니라. 한데, 네놈 따위가 손을 대?』
아자젤의 비웃음이 한껏 더 커졌다. 아마 실제로 눈앞에 있었다면, 한쪽 입술이라도 비틀지 않았을까.
「못 떼겠다면?」
『그렇다면.』
그 순간, 메피스토가 팔짱을 풀었다.
두 눈 위로 귀광(鬼光)이 번뜩였다.
『그렇게 만들어줘야지.』
한순간, 엘릭의 마정석이 요란하게 울리더니, 마력 중 일부가 엘릭의 제어를 벗어나 움직였다.
그것은 서서히 마력기관의 제어권을 앗아가려던 아자젤의 마기와 직접 충돌하면서 거세게 밀어내기 시작했다.
콰콰콰콰…!
엘릭이 육체를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게 되자, 메피스토의 제어권이 일부 되돌아온 것이다.
아자젤의 마기와 메피스토의 마기가 엘릭의 육체라는 무대 위에서 맞부딪치면서 사방으로 뻗쳐 나가는 마력 파동이 더 거세졌다.
그 순간, 브라이언과 아테를 비롯한 이들은 엘릭에게서 더 멀리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아니, 원래 그리고리의 총단 성채가 있던 산자락에서 거의 완전히 벗어나다시피 해야만 했다.
저 멀리.
산의 중턱에서부터 하늘까지 거대한 칠흑색 기둥이 치솟는 것이 보였다.
구름을 뚫고, 어디까지 닿는 건지 알 수 없을 만큼 쭉쭉 뻗어나갔다.
‘이 빌어먹을 마왕들이!’
엘릭은 두 대마왕이 자신의 육체를 두고 다투는 상황에 몹시 짜증이 났다.
「해봐. 할 수 있다면.」
『그러지.』
메피스토의 말과 함께.
파아앗!
엘릭을 둘러싼 세계가 갑자기 칠흑색의 장막으로 가려졌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엘릭은 여태 자신이 있던 장소가 아닌, 전혀 다른 장소에 와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수많은 성곽과 건물들이 무너진 도시. 세계에 종말이라도 찾아온 것 같은 폐허였다.
‘심상 세계인가?’
엘릭은 자신이 무의식 세계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눈치챘다가, 별안간 하늘에서 울리는 엄청난 마력 파동에 고개를 위로 번쩍 들어 올렸다.
새카만 매연으로 가득 찬 저 높은 상공에서.
두 남자가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을 지니고 있었지만, 한쪽이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는 데에 반해 다른 한쪽은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실실 웃어대고 있었다.
메피스토와 아자젤.
두 대마왕이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