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깃발을 들다
“메르빙거…! 네놈만큼은…! 내가 반드시 찢어 죽일…!”
대제사장이 악에 받친 얼굴로 엘릭을 노려봤다.
“지껄이는 걸 보니까 아직 멀쩡한가 보네.”
엘릭이 차갑게 웃으면서 다시 얼음창을 뽑아 올렸다.
“좋아. 우리 아자젤의 사도 아저씨, 얼마나 강심장인지 확인해볼 겸 어디까지 버틸 수 있나 보자고.”
* * *
대제사장은 몇 번씩이나 죽었다가 되살아나야만 했다.
그럴 때마다 엘릭은 지치지도 않는지 계속 창을 휘둘러댔다.
“이야. 이래도 사네.”
스걱-
“와우. 또 머리가 붙어?”
퍼엉!
“표정 보니까 고통은 느끼는 것 같은데. 부활할 때는 별다른 느낌이 없나?”
퍼퍼펑!
“분명히 이렇게 부활하는 것 자체가 어떤 매커니즘이 있다는 걸 텐데. 원료가 무한 제공되는 것도 아닐 텐데도 계속 살아나네.”
쩌저적-
“이제 좀 질리는데. 아저씨. 그만 좀 하면 안 될까? 응?”
엘릭이 깐족대는 말이 귓가에 꽂힐 때마다. 대제사장은 속으로 분노를 토해내야만 했다.
‘어째서! 어째서어어어!’
그라고 해서 무작정 당하고 있기만 한 건 절대 아니었다.
비록 마왕과 비교했을 때는 힘이 달린다지만, 그 역시 오랜 삶을 살아왔던 고위 마족.
당연히 보유한 인장도 수준이 높았고, 마기를 다루는 데에도 무척 능숙했다.
하지만 하나같이 엘릭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
저주를 퍼부어도 그에게 닿기도 전에 허공에서 씻겨 나가고, 온갖 물리 마법을 퍼부어대도 ‘흩어져라’라는 한 마디에 그냥 사라졌다.
진언(眞言)이라니!
설마 인간이 되어 언령 마법을 넘어선 윗 단계 마법을 발현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에 대제사장은 더 충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
‘용의 힘을 깨우치지 않으면 불가능할 힘이…! 왜 메르빙거에게? 메르빙거는 이미 오래전에 용의 인자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었나?’
진언 이상의 언령 마법 체계는 원래 필멸자에게는 절대 허락되지 않은 영역.
세계의 이치에 직접 간섭할 수 있는 ‘깨달음’을 얻은 인간이거나, 특정 종족들에게만 허락된 힘이었다.
그런데 엘릭이 그것을 사용한다?
그 말인즉, 그가 용혈을 받고 용의 인자를 각성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리가 노리던 마지막 남은 용의 둥지를 엘릭이 차지했다는 말은 들었지만, 설마 각성까지 이뤄낼지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에 충격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특히 성채를 무너뜨렸던 마법은 그도 익히 잘 알고 있던 것이기도 했으니까.
“뇌벽의 세… 진언… 너는… 너는…!”
그때부터 어렴풋이 짐작하긴 했지만.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사실.
어쩌면.
그것은 이제 재기(再起)를 꿈꾸는 마족들에게 있어 앞으로 끔찍한 시련이 되어 돌아올지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의 진전을 이었구나…!”
■■.
마족에게 있어서는 두 번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재앙.
천년도 넘는 시간 동안 마족들의 발목을 붙잡았던 메르빙거의 뿌리가 그곳에 있었다!
“이제 알았냐? 늦네.”
엘릭은 대제사장의 경악에 그렇게 아주 쉽게 대꾸하면서 다시 그의 미간에다 얼음창을 꽂아 넣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대제사장으로서는 미칠 노릇이었다.
‘아자젤이시여!’
메르빙거의 시조가 다시 눈을 떴다.
하필이면 천년 만에 겨우 다시 활동을 시작하려는 그리고리와 같은 시대에 맞춰서.
대제사장은 절대 그것을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자젤이시여…! 어째서 제게 응답해주지 않으시나이까!’
그래서 대제사장은 절절하게 아자젤을 찾았다.
자신이 모시는 존재라면 뭔가를 알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아자젤이시여!’
그리 자주 의식을 내비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자신이 간절하게 소망한다면 이따금 한 번씩 신탁을 내려주셨던 분이 바로 아자젤이었다.
그러나 대체 신변에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 건지, 지난 몇 달 동안 아무 말씀도 없으셨던 아자젤은 이번에도 말씀이 없으셨다.
마치 사도의 죽음을 방관하기라도 하려는 듯.
강신(降神)만.
강신만 이뤄질 수 있다면 이깟 메르빙거 따위는 어렵지 않게 해치울 수 있을 텐데….
“왜 제 소망에 대답을 안 하시는…!”
쩌저저적, 퍼어엉-
대제사장의 몸뚱이가 얼음으로 완전히 꽁꽁 얼어붙었다가 폭발했다. 수십 조각으로 분해되었다가, 그 자리 그대로 다시 복구되었다.
부활한다고 해서 죽음의 고통까지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고통이 겹겹이 쌓여, 이미 대제사장의 정신력은 빠른 속도로 피폐해지고 있었다.
그래도 그가 미치지 않고 버틸 수 있는 건, 아자젤에 대한 굳은 신앙 때문이었다.
“와. 더럽게 안 죽네. 이거 어떻게 처리하지?”
엘릭은 그런 녀석을 보면서 난감하다는 듯이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처음에는 누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는 생각으로 집요하게 계속 공격을 해댔지만, 그때마다 아메바처럼 되살아나니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래서 차라리 얼음으로 바짝 얼려둘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영원히 얼음 속에 가둬두기만 하려고? 그게 될까? 실수로 얼음이 부서지기라도 하면 저놈은 되살아날 텐데.』
메피스토의 말마따나, 얼음은 그리 효용성이 좋은 선택이 되지 못할 것 같았다.
평생 얼음을 자신이 가지고 다닐 게 아니어서야.
[그럼 어쩌죠?]
『봉인술(封印術)을 사용해야지.』
[어떻게 사용하는데요?]
『본왕이 알겠느냐?』
[젠장.]
봉인술. 흔히 봉인 마법이라 불리는 기술은 엘릭도 이론만 어렴풋이 알고 있을 뿐, 그 운용 기법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결국.
아무런 선택도 내리지 못한 채 시간을 한참 동안 허비해야만 했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헤르만과 세일러도 모두 질린다는 표정이었다.
이미 그동안 마족들에 대한 처리는 다 끝난 뒤였다.
[소탕은 모두 끝났네.]
[고생하셨습니다.]
헤르만이 불쑥 엘릭이 가르쳐줬던 전음술을 사용해서 경과보고를 했다.
그런데 적도 다 퇴치했다면서 왜 굳이 전음술을 사용하는 걸까? 엘릭은 의아한 마음이 들었지만, 곧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자신도 똑같이 전음술로 대답했다.
[총단 격쯤 돼서 그런가, 투항하는 놈 한 마리 없이 죄다 마지막까지 저항하더군.]
[사실상 대부분의 전력은 대륙으로 나가서 빈집털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요.]
[그리고 인근을 수색하면서 놈들이 만든 것으로 보이는 ‘우리’를 몇 개 발견할 수 있었다네.]
[…우리?]
엘릭은 직감적으로 그것이 전음술을 사용한 이유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뭔가가 있는 모양이었다.
헤르만의 목소리도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너무 분노했기 때문에 오히려 가라앉은 목소리.
[인간을… 사육하고 있더구나.]
“이런 미친 새끼가!”
콰아앙!
순간, 엘릭의 눈에서 불꽃이 튀면서 대제사장의 머리통이 다시 한번 박살이 났다.
츠츠츠-
재복원된 대제사장이 떨리는 입술로 한쪽 입꼬리를 억지로 올렸다.
“흐, 흐흐흐…! 이제야… 찾았… 나 보구나…!”
대제사장은 음침하게 웃어댔다.
이런 식으로라도 엘릭의 속을 뒤집게 만든 것이 기뻐 죽겠다는 듯.
그럴수록 엘릭의 속에서는 천불이 났다.
예전에 흑의 설원으로 가던 길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화전민 마을들에 퍼졌던 역병.
그것이 알고 보니 그리고리에서 인신 공양을 위해 설치해뒀던 토템의 저주 때문이 아니던가.
그런데 총단에서는 아예 인간들을 집단으로 납치하고, 사육해서 필요한 힘을 끌어모으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인간이 발생하는 부정적인 사념은 마족들에게 있어 아주 큰 자양분이 되니까.
엘릭은 분노를 계속 표출해봤자, 대제사장을 즐겁게 할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숨을 크게 들이키면서 헤르만에게 따로 말했다.
[주변 일대 샅샅이 수색해주세요. 필요하다면 아크란 요새에서 잡았던 포로들을 심문… 아니, 고문해서라도. 적사자군도 아마… 이놈들과 결탁했을 가능성이 높아요.]
[내가 아는 윈즈 변경백이 그럴 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그럼세.]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헤르만과 세일러는 다시 휘하의 병력들을 데리고 움직였다.
『기억났다, 이놈.』
그때, 대제사장을 가만히 보고만 있던 메피스토가 히죽 웃었다.
[뭘요?]
『이놈이 누군지 기억났다고.』
엘릭의 시선이 메피스토 쪽으로 황급히 돌아갔다.
메피스토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본왕이 한창 대륙의 공포로 군림하던 시절에….』
[잡설은 뺍시다.]
『…아자젤의 옆을 따라다니던 시종이 하나 있었다. 아자젤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옆에서 보좌하던 놈이었지. 당시에는 아주 어린 놈 이었는데. 이렇게 아직까지 남아있었군. 아자젤이 부활할 때만을 노린 건가?』
엘릭은 기가 질린 얼굴이 되고 말았다.
천 년도 넘게 살아온 작자라니.
그 집요함에 학이 떼일 정도였다.
『그만큼 오래 살았다면, 힘은 약할지언정 인장의 마기는 아주 뛰어나겠지. 해치우는 게 그리 쉽게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 계속 이대로 둬요? 아님 얼음에다 가둔 채로 영영 인터레시아에 짱박아놔야 하나?]
『그것도 좋은 방법이긴 하지만, 그래도 사도쯤 되는 놈의 마기를 흡수하지 않고 내버려 두는 것도 자원 낭비지.』
[하지만 방법이 없잖아요, 방법이.]
『그래서 말인데. 아까 말했던 봉인술 말이다.』
[그건 갑자기 왜요?]
『마녀에게 부탁해봐라』
엘릭은 무슨 말인가 싶어 하다가, 곧 말뜻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겨울6장 중 한 명. 대마법사였던 얼음꽃, 미아에게 부탁해보라는 의미였다.
『본왕으로썬 딱히 마음에 안 들긴 하다만. 그래도 마법적 지식으로는 당대에 그녀만 한 사람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음.]
엘릭은 여전히 고개가 뻣뻣한 미아에게 이 일을 부탁해도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하트람?’
머릿속으로 나하트람의 목소리가 울렸다.
여전히 빙의를 유지하고 있어서 그런지, 그들의 대화를 줄곧 들었던 모양이었다.
「네가 뭘 우려하는지 안다. 옛 가신들이 여전히 너에게 뻗대고 있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그들도 선조로서의 자존심이 있어서 그런 것일 뿐, 실상 속마음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아줬으면 한다.」
나하트람의 목소리는 적들과 마주했을 때와 달리, 아주 차분하면서도 따스했다.
「그들 역시 속으로 너를 인정한 지는 오래다. 특히 미아는 더더욱.」
‘음… 네. 뭐, 알겠습니다.’
나하트람이 이렇게까지 나서는데 계속 고집을 피우고 있는 것도 그의 면을 깎아내리는 짓이었으니.
엘릭은 대자대비한(?) 메르빙거의 가주로서 옛 가신들의 무례함을 아주 잠깐 눈감아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잠시 후. 엘릭의 몸에서 나하트람의 영혼이 빠져나가고, 새로운 영혼이 내려앉았다.
「봉인술, 필요해?」
미아는 괜한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았다. 이미 나하트람을 통해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에 즉각 본론으로 들어갔다.
‘예. 어딘가에다 가뒀으면 합니다.’
「그 뒤에는 삼킬 거고?」
‘가능하다면요.’
「인터레시아 찾았지? 거기에 손바닥만 한 크기의 다이아몬드가 있을 거야.」
엘릭은 미아가 시키는 대로 즉각 마도지환에 마력을 불어넣고, 아공간의 문을 열어 그 속에서 손바닥만 한 크기의 하얀 보석을 꺼냈다.
새하얀 눈을 잔뜩 뭉쳐놓은 것처럼 잡티 하나 없이 맑게 빛나고 있었다.
「다이아몬드는 ‘겨울’을 상징하는 보석. 그 속에다 녀석을 담는다고 생각하고 마법을 발동해. 구성 방식은….」
엘릭은 미아가 가르쳐주는 방식을 속으로 되뇌면서 오른손에는 다이아몬드를 들고, 왼손을 뻗어 대제사장의 머리통에다 손을 얹었다.
녀석은 이미 냉혹의 사슬로 꽁꽁 묶여 있어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상태라, 그리 어렵지 않았다.
“서, 설마…?”
대제사장은 엘릭이 뭘 하려는지를 깨달았는지 갑자기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철그럭, 철그럭-
그럴 때마다 녀석을 구속하고 있는 냉혹의 사슬이 요란하게 부딪쳤다.
“오토 한의 봉인술까지…? 아, 안 돼! 이렇게 죽을 수는 없…!”
대제사장이 뭐라고 소리쳤지만.
“【담겨라】.”
엘릭은 이미 미아가 가르쳐준 방식대로 봉인술을 펼치고 있었다.
대제사장과 마찬가지로, 쉽게 파마(破魔)가 이뤄지지 않는 고위 마족을 처치하기 위해 고안된 미아의 봉인술.
“아, 안 돼애애애앳!”
대제사장은 비명을 내질렀지만, 이미 녀석은 팔다리부터 마기로 분해되어 다이아몬드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저항 따위는 무용지물이었다.
“아자젤이시여… 왜 제 부름에 대답을 하지 않으시나이까…!”
그것이 천 년을 넘게 살았던 아자젤의 충신이자, 가장 오래된 사도가 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이었다.
휘휘휘!
파아아-
모든 봉인이 끝난 뒤. 새하얗던 다이아몬드는 흑요석처럼 까맣게 변했다.
마치 새벽 밤하늘을 옮겨 담은 것처럼 칠흑색으로 반짝였다.
그만큼 대제사장이 품고 있던 마기의 성질이 뛰어났었다는 증거일 테지.
『자, 그럼 어서!』
메피스토는 그것을 보고 환희에 젖은 눈으로 소리쳤고.
엘릭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지체하지 않고 봉인이 완료된 보석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아자젤과 관련된 마기는 모두 그에게 넘겨주는 것이 계약의 조건이지 않던가.
아깝긴 해도, 굳이 그것을 깰 생각은 없었다.
스르르-
단단하던 보석이 마치 봄 눈처럼 사르르 녹아 입안을 적셨다.
쿵!
쿵!
심장이 거칠게 맥동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메피스토는 여태껏 엘릭으로부터 받았던 마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순수한 마기에 환희에 젖고 말았다.
바로 그 순간.
「이런. 식이군.」
엘릭의 머릿속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울렸다.
엘릭도 익숙한 목소리.
아자젤이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