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깃발을 들다
“이놈!”
“제사장님에게서 떨어져라!”
그때, 친위대원이 다급하게 엘릭을 향해 달려들었다.
“원한다면.”
엘릭은 피식 웃으면서 대제사장의 가슴팍에 박힌 얼음창을 손에서 놓고 멀찍이 뒤로 떨어졌다.
그가 있던 자리로 아슬아슬하게 친위대원들의 공격이 스쳐 지나가고.
엘릭은 손을 뻗어 자신이 놓고 온 선물을 더 화려하게 빛내주었다.
“【터져라】.”
콰콰쾅!
“크아악!”
“제사장님…!”
“크악!”
“컥!”
얼음창이 폭발하는 순간, 수십수백 개나 되는 얼음 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직격타를 얻어맞은 대제사장은 상반신이 통째로 날아가 버리고 말았고.
주변에 있던 친위대 역시 절반 이상이 얼음 파편에 고스란히 얻어맞아야만 했다.
운이 나쁜 놈들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머리가 박살이 났다. 그나마 운이 좋아봤자 몸통 중 일부는 부서진 경우가 허다했고, 간신히 목숨은 건졌어도 빙독이 빠른 속도로 전신을 뒤덮어 고통에 울부짖는 마인들도 속출하기 시작했다.
“휼.”
그런 놈들을 보면서 엘릭은 빠르게 휼의 사념을 불렀다.
츠츠츠-
엘릭의 그림자가 살짝 일렁였다.
흐흐. 왜 그러지?
“뇌기와 관련된 인장이 있는지 찾아봐. 하나쯤은 있을 거야.”
이젠 심부름도 시키나? 그래도 나도 명색이 마왕이라는 사실은 잊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싫으면 그냥 돌아오던가.”
후후. 메르빙거답지 않게 진지해서는. 농담도 못 하게 하는군. 어떤 뇌기면 되지? 계급은 상관없나?
“되도록 높은 걸로. 정 여의치 않으면 낮은 것도 상관은 없어. 아, 이왕이면 중력 관련의 인장도.”
시키는 게 많군. 좋아. 찾아보지.
뇌기를 품은 인장. 그리고 중력을 다루는 인장까지.
뇌벽의 세. 시조의 마법 중 하나의 완성을 위해 필요한 조합이었다.
츠츠츠-
엘릭은 어느새 바닥에 두껍게 깔린 빙판에서 새로운 얼음창을 길쭉하게 뽑아 올리면서 손에 쥐었다.
저 앞에서.
사방에 흩어진 얼음 조각 사이로, 마기가 끈적끈적한 형태를 띠며 다시 모여들고 있었다. 부서진 상반신이 복구되면서 대제사장의 모습이 다시 나타났다.
“메르빙거…!”
상당히 지친 기색이 역력한 그의 얼굴은 고통과 분노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재생도 하네?”
『아자젤의 사도라서 그런지 재생도 하는군. 아니, 저 정도면 거의 복원 수준인가?』
메피스토는 엘릭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면서 재미있다는 듯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아자젤 놈들은 다 거기서 거기처럼 생겨서 그런가. 어딘지 낯이 익은 거 같기도 하고…?』
[현시대에 사는 놈을, 메피가 어떻게 알아요? 아무리 마족이라도 웬만하면 다 죽고 없겠구만.]
『흠. 그런가?』
메피스토가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저놈 왜 이렇게 약해요?]
『뭘?』
[아니. 명색이 그리고리의 수장이고, 아자젤의 사도라면서요? 그럼 못해도 레다 같은 놈들보다는 더 강해야 하는 거 아닌가?]
메피스토는 어이없다는 투로 헛웃음을 흘렸다.
『네놈이 그동안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성장을 해 보인 것이다만. 여태 봤을 때, 저놈도 인간들 기준으로는 약한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부족한 건 사실이잖아요.]
『사도는 모시는 존재의 힘을 대변하는 자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저놈도 약할 수밖에 없지.』
[음…? 아자젤의 사도면 당연히 그만큼 강해야…! 아. 그게 아니구나.]
엘릭은 뒤늦게 메피스토의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자젤이 현재 부활을 원하고 있다지만, 정말 이 땅에 완전히 부활한 건 아니다.
이건 아주 큰 의미 차이가 있었다.
아자젤을 모시는 사도가 통용할 수 있는 힘에도 한계가 있다는 뜻.
아자젤이 있다면 그의 마기를 무한대에 가깝게 끌어다 쓸 수 있을 테지만, 지금은 ‘없는’ 존재라면?
『미약할 수밖에 없지. 보아하니 ‘이름’만 남은 것 같은데. 그걸로 대체 뭘 하려고?』
메피스토가 콧방귀를 뀌는 것도 당연했다.
다만, 대제사장이 사도로서 얻는 이점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럼 그 말은 반대로 돌렸을 때, 아자젤의 ‘이름’이 남아있는 한 저놈은 절대 안 죽는다는 거네요?]
『그런 셈이지.』
[캬! 그건 좀 부럽네.]
『너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만.』
[응? 저도 저렇게 죽어도 복원이 가능해요?]
『얼마든지.』
[어떻게요?]
『본 왕의 사도가 되면 되느니라.』
[미쳤습니까?]
뚜벅, 뚜벅-
엘릭은 걸음을 옮기면서 평소와 다르지 않게 메피스토와 잡담을 주고받기 바빴다.
하지만 심안을 활짝 연 그의 두 눈은 그렇지 않았으니.
“【몰아치고】, 또 【몰아쳐라】.”
엘릭은 연거푸 눈보라를 일으켜 의도적으로 친위대의 접근을 막는 한편, 그것마저 기어코 뚫고 들어오는 놈들만 골라서 빠르게 처치했다.
엘릭의 움직임은 지난 어느 때보다 훨씬 재빨랐다.
용혈을 완전히 수급받고 난 이후. 그는 이미 타고난 전사였다.
동체 시력과 반사 신경, 그리고 창을 쥐는 힘까지.
헤르만조차 몇 번씩이나 감탄할 정도였고, 지금 이 순간에도 용혈은 빠른 속도로 엘릭의 몸을 재구성하는 중이었다.
바투만 하더라도 소량의 용혈로 그만큼 강해졌다.
용의 심장을 통째로 삼킨 엘릭이라면?
두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흘리고, 쳐내고.
그러다 빈틈이 발견되면 그대로 찌르길 여러 차례.
그러면서 엘릭은 대제사장과의 간격을 빠르게 좁혀나가면서 기다렸다.
다른 누군가가 개입하기를.
하지만 정작 기다리던 녀석은 나타나지 않았다.
“확실히 버려진 거 맞네.”
분명히 사도를 지키기 위해 나서야 할 벨롯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심안이 그려내는 정경은 물론, 아귀감이 포착해내는 인지 영역 안에서도 도저히 감지되질 않았다.
제아무리 은신술을 펼친다고 해도, 그만한 덩치가 몸을 숨기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을 테니 진즉에 먼 곳으로 달아났다는 뜻이었다.
‘이따가 따로 그림자를 찾아봐야겠는데.’
하지만 녀석이 어디로 달아난다고 한들, 그림자 속에 휼의 사념 일부가 남아 있는 한 결국 독 안에 든 쥐나 마찬가지였다.
촤아아악!
데구르르-
얼음창의 창날에 마지막 남은 친위대의 목이 떨어졌다.
대제사장은 여전히 격노로 몸을 떨고 있었다.
하지만 눈빛만 매서울 뿐.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한 녀석은 초라하기 짝이 없는 단칸방에 사는 노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
“메르빙거…! 네놈을 진즉에 해치우지 못했던 게 나의 가장 큰 실수다…!”
“아, 눼이눼이. 다들 그렇게 말씀하시더라구요. 그러게 진즉에 그렇게 하시지, 왜 안 하셨대요?”
쿠란시빌 자작이나 캘리거 백작에게도 들었던 말이다 보니 이제는 듣는 것도 귀찮을 지경이었다.
엘릭은 약지로 귓구멍을 가볍게 후벼 파고는 차갑게 웃었다.
“계속 되살아난다며? 그게 얼마나 이어질 것 같아?”
“아자젤 님은 위대한 마신의 그림자이시다. 그분이 계시는 한 너의 야욕은 절대 길게 이어지지 못할…!”
“궁금한데. 한 번 실험해봐도 되나?”
엘릭이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흘리는데.
찾았다. 아주 작은 것들이지만.
이걸로도 괜찮나?
[그거면 충분해. 어차피 실험이 목적이니까.]
때마침 휼 사념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스며들어라】.”
진언과 함께 휼의 사념이 찾았다는 인장을 고스란히 흡수했다.
그러자 바닥을 따라 마기가 스며들어와 왼쪽 어깨와 뒤쪽 등을 따라 작은 문신이 새겨졌다.
새로운 개념이 머릿속으로 물밀듯이 들어왔다.
하나는 하늘에서부터 내리치는 벼락의 성질을 품고 있었고.
“【튀어 올라 타올라라】.”
다른 하나는 한없이 아래로 깊게 침잠하는 성질을 담고 있었다.
“【둔하게 내려앉아라】.”
뇌화(雷火). 그리고 중압(重壓).
엘릭이 현재 가지고 있는 동계나 흉살의 인장에 비하면 한없이 약한 수준이라지만, 엘릭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파직, 파지지직!
손끝에서부터 뇌기가 화려하게 피어올라 불꽃으로 변하다가, 소용돌이를 그리면서 한 지점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휘휘휘휘!
뇌화의 인장으로 피워올린 뇌기를, 중압의 인장을 활용해 고밀도로 단단히 압축시키는 것이다.
특이한 점은.
‘오. 이것 봐라?’
마법을 완성시키는 과정에서 에너지 구체가 막대한 양의 마력을 빨아들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미 엘릭이 품고 있는 마력량 자체도 엄청나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말도 안 되는 수치.
그리고 많은 마력이 투입되면 될수록 서서히 구체 모양을 갖춰가는 마법의 회전 속도도 덩달아 더 빨라진다는 점이었다.
뇌기를 있는 대로 흡수하면서 서서히 뇌정구(雷霆球)의 형상을 갖춰 나갔다.
뇌화와 중압, 두 개의 인장이 가진 계급도와 숙련도로는 도저히 버틸 수 없을 만큼 인장이 과열되고 나서야 마력 흡수도 겨우 끝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한계점까지 압축된 뇌정구는 마치 태양이라도 되는 것처럼 대단한 열기와 뇌기를 뿌려댔으니.
파직, 파지직!
파지지직-
뇌정구의 표면 위로 뇌기가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거칠게 튀어 올랐다.
엘릭이 동계의 인장을 갖고 있지 않았더라면 다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맹렬했다.
『불쾌하군. 형태가.』
메피스토는 그것을 보고 뭔가를 떠올렸는지 인상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얼추 모양은 이게 맞나 보네.’
그의 표정을 보니 아무래도 시조의 마법을 흉내 내는 데에는 성공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건…!”
정작 반응을 보이리라 예상치 못했던 대제사장도 도저히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두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네, 네가 어떻게 그 마법을…?”
“응? 이걸 알아?”
『호오. 우리 세대가 아니면 알 수가 없을 텐데?』
메피스토는 눈을 반짝였다. 역시. 대제사장의 얼굴을 보고 ‘낯이 익다’는 느낌을 받은 건 절대 그의 착각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일단 실험부터 해보죠.”
엘릭은 손바닥을 활짝 펼치며 맹렬하게 회전하는 뇌정구의 압박을 풀어주었다.
뇌벽의 세.
시조께서 남기셨다던 마법이, 처음으로 엘릭의 손끝에서 펼쳐진 순간이었다.
콰콰콰쾅!
콰르르르-
* * *
“와, 씨. 이거 엿될 뻔했네.”
무너진 성채에서 엘릭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뇌정구는 그가 사전에 계산한 것보다 훨씬 강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뇌기라는 성질 자체만 해도 충분히 강렬하고 포악한 데, 더군다나 그것을 압축할 대로 압축시켰다가 터뜨리니 도저히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힘을 자랑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성채가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으니.
만약 도중에 얼음 방벽은 물론, 휼의 사념으로 그림자를 몽땅 끌어올리지 않았더라면 엘릭마저 크게 다칠 뻔했다.
‘저급의 인장으로도 이 정도인데, 그럼 그 이상의 인장으로 발현하면 대체 어떻게 되는 거야?’
엘릭이 혀를 내두르는 사이, 헤르만 등이 다급하게 이쪽으로 달려오는 게 느껴졌다.
“엘릭!”
“자네, 다친 곳 없나?”
아무래도 갑자기 그리고리의 총단이 무너졌으니 그들로서는 놀랄 수밖에.
엘릭은 계면쩍은 마음에 어떻게 자신의 실수라고 설명할까 싶다가, 갑자기 발아래에서 느껴지는 미약한 파동에 시선을 다시 돌렸다.
츠츠츠-
마기가 다시 모여들면서 대제사장이 다시 나타나고 있었다.
엘릭이 히죽 웃었다.
“이야. 이래도 살아나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