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깃발을 들다
“이런. 아쉽군!”
세일러는 활을 내려놓으면서 가볍게 혀를 찼다.
제법 직급이 높아 보이는 인사를 단박에 잡을 수 있나 싶었는데.
하필이면 그걸 도중에 눈치채고 가로막을 줄이야.
“그래도 별반 달라질 건 없잖소?”
그걸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헤르만이 피식 웃었다.
세일러도 따라서 웃었다.
“그도 그렇지만.”
퓨퓨퓨퓻-!
세일러에 이은 화살 세례가 산자락을 뒤덮은 것은 바로 그 뒤였다.
화살을 시위에다 걸어둔 채로 대기하고 있던 바일 가문의 기사들과 블랙 스컬, 그리고 별의 종군이 일제히 헤르만의 손짓에 따라 시위를 놓은 것이다.
수천 개나 되는 화살이 산자락을 뒤덮는 것은 일대 장관이었으니.
하지만 그것을 지켜보던 마족들로서는 공포 그 자체였다.
마치 거대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으니까.
콰콰콰쾅!
우르르르-
콰르릉, 콰르르!
그리고리의 총단을 보호하던 결계가 발동되었다.
외부의 급습으로부터 마족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지만, 총단의 위치를 파악했을 때부터 엘릭은 이미 결계의 존재를 짐작했던 바.
병사들이 날린 화살은 절대 일반적인 화살이 아니었다.
파마(破魔)의 시(矢).
예전에 그들이 사용했던 스크롤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엘릭이 특별히 손수 룬 문자를 새겨 넣은 화살이었다.
마기를 박멸하고 정화하는데 특효가 있는 화살.
그렇다 보니 화살은 결계에 작렬하자마자 수십 개로 분리되어 사방으로 흩어졌고.
그 조각들은 다시 연쇄 반응을 일으키면서 파마의 효능을 선보였다.
결계가 갈가리 찢겼다.
구멍이 숭숭 뚫리면서 수십 겹이나 되던 결계가 단박에 와해 되었다가 수복되기를 반복하였고.
그 아래. 거대한 성처럼 서 있는 그리고리의 총단이 잠깐 모습을 드러냈다가 사라졌다.
하지만 그걸로도 충분했다.
일반 병사들이 정확한 위치를 잡기엔.
“나 먼저 가겠소.”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헤르만이었다.
휘하에 대동하고 있던 청양 기사단을 데리고 산비탈을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먼저 선수치는 게 어디 있나!”
“하하하! 원래 이런 건 원래 먼저 먹는 사람이 임자 아니오?”
“이 사람이! 같이 가자니까! 에이씨!”
세일러는 약속했던 것과 달리 헤르만이 먼저 움직이자, 살짝 짜증을 내면서 헤르만 등의 뒤를 쫓았다.
가뜩이나 나이를 먹어서 뛰는 것이 관절에도 좋지 않은데 참 너무하다 싶었다.
하지만 세일러도 머릿속에 헤르만과 마찬가지로 마왕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그래도 이참에 마족 사냥에 나섰으면 마왕의 모가지를 이 손에 걸어보기는 해야 하지 않겠는가!
쐐애애액-
파바바밧!
“멈추래도!”
“싫습니다!”
“혼자 먹으려 들면 배탈 나!”
“원래 맛난 건 혼자서 먹어야 되지 않겠…!”
두 사람은 빠르게 농을 주고받다 말고, 갑자기 그림자 하나가 머리 위를 빠르게 스쳐 지나가자 똑같이 고개를 위로 들었다.
그리고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저 먼저 갑니다.]
엘릭이 비행 마법으로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이런…! 반칙 쓰는 게 어디 있나!”
[원래 맛난 건 혼자서 먹어야 제맛이죠.]
헤르만의 항의(?)를 헤르만이 했던 말로 똑같이 응수해주면서.
엘릭은 어느새 그리고리의 총단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마, 막아아아아!”
“마법! 어서 마법을 발동해라!”
“저놈을 떨어뜨려!”
원래대로라면 제아무리 엘릭이라도 단신으로 뚫고 들어가기엔 버거웠을 결계였지만.
구멍이 숭숭 뚫린 지금은 아니었다.
무너진 틈새 사이로 수직 낙하를 시도하면서 권능을 잇달아 전개했다.
“【휘몰아쳐라】.”
한설. 겨울 폭풍이 거칠게 휘몰아치면서 가뜩이나 내구력이 급속도로 저하되었던 결계를 단박에 날려버렸다.
다급하게 성채 위로 뛰어와 엘릭을 막으려 들던 마족들은 거친 눈보라에 휩쓸려 눈더미에 파묻히고 말았고.
하늘에서는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많은 고드름이 무더기로 생성되어 바닥으로 줄기차게 쏟아졌다.
퍼퍼퍼퍽!
콰콰콰쾅-
“크아아악!”
“내 팔! 내 파아아알!”
“앞이 안 보여! 앞이…!”
시야가 차단되고 맹추위가 찾아오니 혼비백산하는 이들 사이로, 그림자가 뱅글뱅글 돌더니 엘릭 쪽으로 일제히 향했다.
“【나타나라】.”
북풍. 각기 다른 그림자에서부터 가디언들이 일어났다.
과거에 오토 한의 충복으로 살았고, 현재는 엘릭에게 충성을 바친 존재들은 빠르게 마족들을 제거해 나갔다.
더군다나 그 사이에는 쇠사슬이 단단히 묶여 있어도 흉포함만은 사라지지 않는 맹수도 있었으니.
하나 같이 마음에 안 차는 것들이지만, 뭐.
없는 것보단 낫겠지.
츠츠츠-
가디언들 사이로, 휼의 사념체가 일어나면서 거칠게 날뛰기 시작했다.
그렇다 보니 마족들의 대열은 단박에 어수선해지고 말았다.
콰아아앙!
엘릭은 그런 놈들 사이로 착지했다.
빙판이 내려앉으면서 얼음 파편과 가루가 사방으로 흩날리는 가운데.
“…저기군.”
엘릭은 심안을 활짝 열어 주변을 빠르게 훑다 말고, 목표물이 마족들 틈 사이로 도망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왕을 제외하고, 그리고리의 주인으로 보이는 자.
대제사장이 분명했다.
엘릭은 지체하지 않고 그쪽으로 몸을 날렸다.
파아앗-
“제, 제사장 님을 보호하라!”
“엘릭 메르빙거! 여기서 한 발자국도 뗄 수 없다!”
마족들이 단박에 인의 장막을 쳤다.
엘릭은 어느새 오른손에는 얼음창을 쥔 채 살벌하게 드래곤 피어를 피워대고 있었다.
얼음을 흩날리며 짐승처럼 으르렁대는 엘릭의 기백은 마족들을 이미 완전히 압도하고 있었다.
“잔챙이들은 꺼져!”
나하트람의 빙의와 함께 얼음창이 돌풍을 일으키며 연거푸 쏟아졌다.
* * *
“여깁니다!”
“이곳으로 오십시오!”
“헉, 헉!”
대제사장은 친위대의 안내에 따라 나선형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마음 같아서는 더 서두르고 싶었지만, 좀처럼 몸이 따라주질 않았다.
살해라도 당하지 않는 한 마족은 수명이란 굴레에 갇히지 않는다지만, 그래도 마왕 급이 되는 게 아니고서야 마족이라도 나이를 먹을수록 신체적 기능은 많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대제사장은 까마득한 시간 동안 그리고리를 이끌어오고, 아자젤을 위한 헌신의 삶을 살며 정작 제 몸은 돌보지 않았으니, 이미 육체는 망가질 대로 망가진 상태였다.
언제든 마신의 품으로 귀의해도 절대 이상하지 않은 상태라는 뜻.
애당초 대제사장은 그가 제작한 ‘그릇’들과는 달리, 전투에 특화되어 있지 않기도 했다.
그렇다 보니 항상 ‘그릇’들에게 명령을 내렸을지언정.
정작 본인은 항상 이렇게 총단 깊숙이에 틀어박혀 있으면 됐을 뿐이었다.
설마 총단의 위치가 발각될 줄이야…!
‘메르빙거가…! 메르빙거가 이렇게 턱 밑까지 쫓아오다니!’
대제사장은 숨이 턱 하고 막히는 기분이었다.
감히, 제깟놈이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오긴 기어온단 말인가!
이곳은 위대하신 아자젤께서 눈을 감으시고 마신의 품으로 귀의했던 성지(聖地).
그런 곳에 메르빙거 따위가 발을 들인다는 것은 절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콰르르릉!
쿠르르르-
“메, 메르빙거가 여기까지 쫓아왔다!”
“어서 막으래도…!”
어느새 메르빙거는 대제사장의 뒷그림자까지 밟을 정도로 가까워지고 있었으니.
엄청난 혹한이 불어닥치자, 친위대가 다급하게 엘릭을 막아섰지만.
퍼퍼퍼펑!
그들 모두 별반 어쩌지 못하고 죄다 나가떨어지는 소리만 들렸다.
빙판이, 어느새 그의 뒤까지 따라붙고 있었다.
“게이트! 게이트는?”
“예! 발동을 준비 중인…!”
“대제 뭘 하는 게냐! 서둘러라! 어서!”
“아, 알겠습니다!”
텔레포트 게이트가 제대로 작동되기 위해서는 좌표 설정을 정확하게 해야 하기에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지만.
이미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한 대제사장에게는 그런 생각을 할 겨를 따윈 전혀 없었다.
그렇게 텔레포트 게이트가 있는 방으로 달리는데.
콰콰쾅!
“크아악!”
“어떻게 이런 곳에… 컥!”
대제사장이 성채의 로비에 도착하자마자, 한쪽 벽면이 터지면서 거대한 맹수가 나타나 으르렁거렸다.
크르르르!
여기 있었군!
휼의 사념이 대제사장 쪽을 보면서 한껏 비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발아래에는 이미 피떡이 되다시피 한 마족들의 핏자국과 벽돌 파편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텔레포트 게이트로 향하는 길목이 완전히 차단되고 만 것이다.
“메, 메르빙거에게 달라붙은 변절자가 있다더니…!”
대제사장은 저 거대한 그림자 짐승이 엘릭의 말에 충실하다는 옛 동대륙의 마왕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몸을 파르르 떨어야만 했다.
“이곳으로! 이곳으로 오십시오, 제사장님!”
대제사장은 친위대의 일부가 또 분리되어 휼의 사념을 막아서는 사이에 다른 복도로 바삐 움직였다.
하지만.
쿠쿠쿵!
“크아아악!”
그쪽 모퉁이에도 가디언이 나타나 길목을 막아서고 있었다.
“여, 여기로 가시지요!”
대제사장이 어디론가 움직일 때마다 가디언들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났다. 그럴 때면 친위대 중 일부가 재빨리 나서서 가디언을 막아설 수밖에 없었고, 대제사장의 호위 인력도 아주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말았다.
“대체 일을 어찌 처리하기에 이 모양이…! 벨롯은? 벨롯은 어디로 간 게냐?”
그럴수록 대제사장은 자꾸만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메르빙거의 손바닥 위를 자꾸 뱅글뱅글 맴돌면서 서서히 궁지로 내몰리고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었다.
엘릭을 어떻게든 내쫓기 위해서는 벨롯이 있어야 했지만, 문제는 현재 그리고리의 최고 전력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 그것이…!”
“왜 그러지?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게냐?”
“조금 전부터 벨롯 님의 행방을 찾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툭!
대제사장의 걸음이 멈췄다.
그의 눈동자가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
믿기 힘들다는 투.
“무, 뭐라고? 다시 말해보아라!”
보고를 올리던 수하는 고개를 푹 숙이면서 눈동자를 굴리기 바빴다.
“조, 조금 전부터 벨롯 님을 계속 찾고 있지만, 자리에 계시지 않았다고 합니다. 행방도… 묘연해지셨습니다.”
“말도 안 되는…!”
대제사장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것이냐고 쏘아붙이려던 때였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말을 하려다 말고 뭔가 떠오르는 게 있어 도중에 그쳐야만 했다.
‘그러고 보니 녀석의 눈빛이…?’
대제사장은 벨롯에게 그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엘릭을 죽여야만 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그때. 벨롯은 순순히 그러겠노라고 대답했지만, 눈빛만큼은 잠잠했다.
만약 그때 다른 생각을 떠올린 것이라면?
‘말도 안 된다! 그릇이 내 명령을 거부할 리가 없잖은가!’
대제사장으로서는 세뇌와 암시가 단단히 걸려있는 ‘그릇’이 자신을 배반할 거란 생각은 전혀 할 수가 없었지만.
더군다나 그중에서도 가장 어수룩하고 우둔해서 충성심만큼은 독보적이었던 벨롯이 배신할 수 있다고 여기가 어려웠지만.
막상 상황이 이렇게 되니 불안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이럴 때 벨롯이 갑자기 감쪽같이 사라진 게 말이 안 되지 않은가.
‘그게 아니면 그 전부터…? 메르빙거가 총단을 발견할 수 있도록 미끼를 내어준 것이 놈이라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럴수록 불안감도 자꾸 커져만 갔다.
이대로 있다간 정말 총단이 궤멸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등골을 타고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서…!”
그래서 대제사장은 다른 길을 뚫으라고 친위대에게 외치려 했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주변에 있던 친위대원들이 모두 길쭉한 얼음창에 꽂힌 채로, 그보다 한참 눈높이가 높은 곳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바닥에… 어느새 빙판이 깔리며 얼음송곳이 높이 치솟은 것이다.
대제사장의 눈이 격하게 떨렸다.
두려움은 어느새 공포가 되어 목까지 꽉 하고 옥죄어왔다.
그리고.
“버림이라도 받았나 보지?”
등 뒤에서 음산하게 울린 엘릭의 목소리에 황급히 몸을 반대로 돌리려 했지만.
“…컥!”
퍼어억!
바로 등 뒤.
엘릭의 얼음창이 어느새 대제사장의 가슴팍 꿰뚫고 있었다.
바로 눈앞에는.
차가운 미소를 띤 엘릭이 바로 눈앞에 서 있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