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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222화 (221/405)

222화

깃발을 들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지하실.

그곳으로 이어지는 나선형 계단을 타고 발소리가 들려왔다.

뚜벅.

뚜벅.

그러자 미동도 없던 지하실의 공기가 파르르 떨렸다.

동시에 무언가가 눈을 떴다.

시퍼런 귀광(鬼光) 한 쌍이 마치 촛불처럼 확 타올랐다.

“정신이 드느냐, 벨롯?”

발자국의 주인은 그러한 한 쌍의 귀광을 보면서 말을 걸었다.

잔잔한 목소리. 귀광의 주인과는 달리 그리 큰 힘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그저 기껏해야 저잣거리 노점상 주인에게나 어울릴 법한, 약간은 걸걸하지만 평범하기 그지없는 노인의 목소리.

하지만 귀광의 주인에게는 아주 무겁게 다가오는 목소리이기도 했다.

그가 바로 귀광의 주인을 이 세상에 탄생케 하고, 거닐 수 있게 해준 어버이이기 때문이었다.

“나… 는….”

“너 때문에 상당히 많은 제물을 바쳐야 했다. 아느냐?”

“죄송… 합니다….”

귀광의 주인, 마왕 벨롯은 그런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드래곤 하트를 구하러 갔다가 도리어 반쯤 죽어서 돌아오지 않았던가.

심지어 같이 갔던 레다는 아예 죽어버리기까지 했으니. 그리고리로서는 전력상 손실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목소리의 주인, 대제사장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투로 혀를 찼다.

“쯧! 미안하다는 말로 끝낼 수 있을 것 같으면 쉽게 풀리지 않을 일이 어디 있을까?”

“죄송… 합니다….”

“그 말은 이제 그만해라. 지겨우니.”

“죄송… 합니다….”

대제사장은 이놈이 자신을 놀리나 싶어 노려봤지만, 활활 타오르던 귀광에 힘이 빠졌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야만 했다.

저놈은 진심이었다.

바로 이것이 문제였다.

‘이놈을 데리고 대체 어떻게 일을 도모한다…?’

현재 휘하의 쓸만한 ‘그릇’들은 전부 제국에 나가 있는 상태.

가장 머리를 잘 쓸 줄 아는 라피스와 라줄리는 그리고리의 군단을 이끌고 있고.

아직 단 한 번도 세간에 공개되지 않은 그의 ‘후계자’는 제국 내에 숨어 언제 내려올지 모르는 대제사장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현재 이곳 총단에 남은 마왕은 벨롯 하나.

문제는 벨롯이 그의 발은 되어줄 수 있을지언정 손은 되어주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어쩌다 이런 쓸모없는 멍청이가 그릇으로 태어났을까?’

따지자면 그의 실수라고 봐야 할 것이다.

앞서 만들어진 그릇들이 전부 부활할 아자젤을 수용하기엔 부족한 면이 없잖아 있어 무리하게 큰 그릇을 빚으려다 탄생한 것이 벨롯이었으니.

다른 마왕 둘 이상을 합친 것보다도 강한 마기와 괴력을 품은 것이 벨롯이었지만.

정작 머리는 아둔하기 짝이 없어서 아자젤을 수용하기가 어려워진 케이스였다.

‘차라리 이럴 때 유다라도 있었다면 좋았으련만.’

‘마왕’의 칭호도 얻지 못한 반편이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어쨌거나 머리는 원활하게 돌아가는 편이었으니까. 대제사장이 시키는 대로 움직여줄 손의 역할로는 충분한 것이다.

물론, 유다도 죽었고, 원래 손의 역할로 남겨뒀던 레다도 전사한 상태에서 이제 와 미련을 가져본다고 한들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떻게든 이놈을 데리고 뭐라도 해야만 했다.

‘메르빙거, 메르빙거…! 너희들은 끝까지 우리의 발목을 잡는구나.’

으드득!

대제사장은 비록 실제로 만난 적은 없었지만, 사실상 만난 것과 다를 바가 없는 놈을 떠올리면서 이를 갈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후우!

대제사장은 숨을 크게 내쉬면서 침착함을 되찾았다.

여기서 화를 내본다고 한들 달라질 것은 없다.

‘이미 밖에 나가 있는 라피스 라줄리를 돌아오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 그러니 이곳의 일은 모두 내가 처리해둬야만 한다.’

대제사장은 어떻게든 엘릭 메르빙거를 잡을 생각이었다.

그가 눈앞에서 앗아간 드래곤 하트뿐만 아니라, 북풍과 한설로 대변되는 권능까지도 가져와야만 했다.

원래대로라면 그것은 자신들이 가져야 할 힘이었으니까.

‘아니. 아예 메르빙거, 그 자체를 빼앗아야지. 원래대로라면 메르빙거, 그놈들이 가진 모든 것들이 실은 우리들의 것이었으니.’

대제사장의 시선이 여전히 잠잠하게 있는 벨롯에게로 향했다.

“엘릭 메르빙거가 이 근방에 나타났다.”

“…!”

쿠쿠쿠…!

귀광이 다시 활활 타올랐다.

그러자 지하실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크게 요동쳤다.

‘그래도 힘 하나는 넘치는군.’

대제사장은 짜증으로 가득했던 마음이 한결 풀리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아둔하고 멍청하다고 한들.

그저 단순한 무기로 쓴다면 벨롯만 한 녀석은 찾기 힘들었다.

힘도, 충성심도, 모두 확실하지 않은가.

항상 대제사장이 내린 명령을 이리저리 돌려보고는 제 입맛대로 골라서 취하기 바쁜 라피스 라줄리보다 나은 면도 많았다.

“엘릭… 메르빙거…!”

“보아하니 다시 제국령으로 되돌아갈 생각을 하는 모양이다. 조금 전 아크란 요새를 점령했지.”

“아크란…!”

귀광이 다시 한번 타올랐다.

아크란 요새는 사고 판단이 느린 벨롯도 익히 잘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총단이 있는 곳에서 그리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으니까.

“아무리 메르빙거라 하여도, 설마 우리가 자신의 목덜미 근처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하고 있겠지. 적사자군과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며 의기양양해진 지금이 적기다.”

대제사장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이것은 아자젤 님께서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주신 기회이기도 하다. 그러니 벨롯. 네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잘 알겠지?”

대제사장은 설마 엘릭이 자신들을 노리고 아크란 요새를 점령한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총단이 이곳에 똬리를 튼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지척에 있던 적사자군에서도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지 못한 것부터가 완벽하게 은신을 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즉, 엘릭과 별의 종군이 이 근방에 출몰한 건 어디까지나 ‘우연’에 불과했다.

그가 가진 상식선에서는.

“죽여야…!”

“그래. 엘릭 메르빙거. 그놈은 무슨 일이 있어도 죽여야만 한다.”

대제사장의 눈빛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설사 네가 죽는다 해도.”

“내가 죽어도…!”

“그럴 수 있겠느냐?”

“반드시 죽여…!”

대제사장은 현재 별의 종군이 가진 전력이 이미 그들이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총단의 대다수 병력들은 레다와 함께 죽지 않았던가.

현재 총단에 남아있는 병력도 방비를 위한 최소한에 가까웠다.

반면에 별의 종군에는 제국에서도 강하다고 손꼽히는 작자들이 많았다.

엘릭 메르빙거를 차치하더라도, 청사자와 회사자가 그곳에 있으니.

아무리 벨롯이 강하다고 한들, 그런 곳에 던져뒀다간 고립되어 죽기 십상이었다.

그러니 벨롯이 지금 이 순간 밖으로 나간다면 두 번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그릇을 또 깨버려야 한다는 사실이 애석하긴 하지만. 차라리 메르빙거를 죽이는 용도로 깰 수 있다면 남는 장사다.’

대제사장은 어떻게든 메르빙거의 씨를 말려야 한다는 생각밖에는 없었다.

‘그릇이야 얼마든지 다시 빚으면 그만이니.’

대제사장이 거듭 확인했다.

“알겠느냐?”

“레다 원수…! 엘릭 메르빙거 죽여…!”

“결행은 오늘 새벽이다. 작전은 그때 따로 가르쳐줄 테니 컨디션부터 끌어올려 둬라.”

“알겠습니다….”

대제사장은 벨롯의 복명 이후,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지하실을 빠져나왔다.

홀로 남은 공간에서.

“엘릭 메르빙거…. 원수이니 죽여야 해…. 하지만….”

벨롯의 두 귀화는 대제사장이 빠져나간 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제사장도 나쁘다….”

대제사장이 착각한 점이 있었다.

벨롯이 너무 많은 마기를 품고 있어서 사고 판단이 느린 건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생각할 줄 모른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을.

화르륵…!

두 귀화가 알 수 없는 의미로 잔잔하게 타올랐다.

* * *

뚜벅, 뚜벅!

대제사장은 계단을 따라 다시 총단 밖으로 나오면서 중얼거렸다.

‘이번 일을 계기로 어떻게든 그리고리의 부활을 완성해야만 해.’

사실 대제사장은 초조해하고 있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많은 신앙을 끌어모아 아자젤 님의 강림을 불러들일 수 있을 테니….’

사실 아자젤의 부활은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늦게 이뤄지고 있었다.

계획대로라면 이미 진즉에 그릇 중 하나를 선택하시고, 이 땅에 완전히 강림하시어 제국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계셔야만 했다.

제2의 대마전쟁… 아니, 이제는 기억하는 이들도 거의 없다는 마신전쟁을 일으킬 생각이었다.

‘최근에는 계시(啓示)도 잘 내려주시지 않으니.’

하지만 그런 그의 뜻은 이뤄지지 못했다.

‘예상보다 우리의 깃발 아래에 모이는 마족의 수가 적어도 너무 적었어.’

이것이 바로 문제였다.

그릇이 완성되면 뭣하나? 부활을 위한 신앙이 제대로 모이지 않은 것을.

사실 대제사장은 그리고리의 이름을 다시 세상에 드러냈을 경우, 많은 마족이 구름 떼처럼 몰려들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럼 그리고리라는 이름 아래에 복속된 마족들이 바친 신앙이 신성을 형성하고, 아자젤을 새로운 마신(魔神)으로서 이 땅에 강림시킬 수 있는 매개체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원대한 계획은 절대 헛된 망상이 아니었다.

그리고리가 그동안 준비해둔 것들이 있으니, 이론적으로는 충분히 가능했다.

무엇보다.

현재 대륙에는 수많은 마족이 이렇다 할 구심점도 없이 뿔뿔이 흩어져 있는 상태.

상당수가 정체를 숨기고 인간들의 틈바구니에 섞여 살고 있었다.

그러니 그들에게 구심점이 되어줄 생각이었건만.

문제는 호응도가 적어도 너무 적다는 점이었다.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아직도 많은 놈들이 그리고리에게 붙을지 말지를 계산하기 바쁘다는 뜻일 테지.

‘멍청한 것들…! 무엇이 똥이고 무엇이 된장인지 직접 찍어 먹어봐야 아나…!’

대제사장으로서는 머리 쓸 줄 아는 놈들이 죄다 대마전쟁에서 죽어버렸나 싶을 정도로, 흩어진 마족들이 벨롯처럼 멍청하게 보였지만.

그래도 어쩌겠나.

당장 급한 것은 자신들인 것을.

그러니.

대제사장은 그런 놈들의 호응도를 끌어올리기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크게 이슈를 터뜨릴 생각이었다.

‘이곳에서는 엘릭 메르빙거의 머리통을, 저곳에서는…!’

대제사장은 머리를 털었다.

어쨌든 무슨 일이 있어도 그가 바라는 일들은 성공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고리는 자멸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 우리만의 전력으로 제국을 전복하기에는 많은 것이 부족하니.’

밖에서 흘러들어온 바람이 시원하게 불었다. 대제사장의 머릿속도 한결 맑아지는 것 같았다.

여기서 조금만 바람을 쐬고 다시 들어가야겠군.

저 멀리.

능선 너머로, 아크란 요새가 보였다. 힘차게 나부끼는 메르빙거의 깃발도.

‘언제까지 의기양양하게 있을 수 있는지 보자꾸나, 메르빙거.’

대제사장이 눈을 가늘게 좁히는데.

“바람이 찹니다. 이만 들어가시지요.”

그의 옆을 따라왔던 수하가 머리를 살짝 숙였다.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언제나 충실하게 자신의 말을 따르고 아자젤의 가르침을 몸소 잘 실천하던 아이였다.

아마 메르빙거의 깃발을 계속 보고 있으면 그의 심기도 다시 불편해질 성싶으니 그를 데리고 들어가려는 것일 테지.

생각이 아주 깊은 아이였다.

‘벨롯이 이 아이 정도만 되었어도.’

대제사장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어도, 싱긋 엷은 미소를 띠었다.

“오냐. 그러자꾸나.”

녀석의 말대로 몸을 돌려 다시 총단으로 돌아가려던 그때.

피잉-

“제사장님! 위험합니다!”

“무슨…?”

다급한 외침에 대제사장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는데, 조금 전 그 아이가 그를 보호하려는 듯 이쪽으로 달려오다 말고 갑자기 머리통이 산산조각이 났다.

푸화아악!

더러운 핏물과 살점이 대제사장의 얼굴을 덮었다.

“이게 무슨…?”

대제사장이 순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두 눈을 끔뻑거리는데.

휘휘휘휙!

하늘 위로, 수백 수천 개의 화살이 소나기처럼 떨어졌다.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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