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깃발을 들다
“이제야 드디어 제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군.”
힘차게 나부끼는 깃발 아래.
엘릭은 요새 끄트머리에 서서 저 멀리 펼쳐진 지상을 굽어보았다.
여러 개의 산으로 온통 울퉁불퉁하기만 한 지평선이었지만.
엘릭은 알고 있었다. 저 너머에 한창 혼란스럽기만 할 제국이 있다는 것을.
몇 달만의 귀환인 걸까?
석 달, 넉 달?
아니. 어쩌면 반년일지도 모르겠다.
대충 계절이 두 번인가 세 번이 바뀌었으니까.
마왕들을 잡고 난 뒤에도 너무 정신없이 시간을 보낸 탓에 시간 감각이 무뎌진 것이다.
그렇기에 엘릭은 제국으로 되돌아가게 되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조금 들떴다.
헤르만도 마찬가지였던지 입가에 미소를 달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부터 시작이죠.”
“그래. 이제부터 시작이지.”
헤르만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착 가라앉은 그의 동공 위로, 지난 시간 동안 있었던 수많은 사건 사고들이 잔상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만 같았다.
인터레시아에서의 볼 일을 모두 끝낸 후.
엘릭은 곧장 수호룡을 해체하고, 거기서 생긴 부산물로 별의 종군을 용아병으로 만드는 데 집중했다.
그들에게서 진실한 충성 서약을 받고, 자신이 직접 정제한 수호룡의 혈청(血淸)을 나눠준 것이다-물론, 그 과정에서 맹약을 어겼을 시에 패널티가 주어지는 계약을 맺는 건 아주 당연했다.
그리고 조부님이 남겨주신 시조의 마법, 「용아병의 술」까지 일부 넘겨주었으니.
이를 바탕으로.
가뜩이나 엘릭이 나눠준 여러 기술로 기량이 한껏 올라왔던 병사들은 또 한 번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수호룡의 가죽과 비늘, 그리고 뼈를 바탕으로 무구 제작에도 몰두했다.
한때 스스로를 ‘용 사냥꾼’이었다고 자부했던 만큼, 메피스토는 용의 사체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용이란 놈들은 말이지. 아주 아낌없이 주는 나무야. 버릴 데라고는 하나도 없거든. 다만, 이것들이 수명이 다하고 나면 자신의 몸뚱이를 자연에다 마나로 해체시켜놔서 사냥이 아니면 구하기가 어려운 게 단점이었…!
간만에 자신이 잘 아는 분야가 나타나자 쓸데없이 설명이 길어져서 지루했던 것은 덤.
여하튼.
그렇게 무구 제련은 큰 실수 없이 빠른 속도로 이뤄질 수 있었다.
단단한 뼈로 검과 창 따위의 날붙이를 만들고.
가죽으로 내갑(內甲)을 만들며.
비늘을 백련정강의 강철과 섞어 탄탄한 중갑옷으로 제련했다.
다행히 수호룡의 덩치가 워낙에 컸던 덕분에 별의 종군에게 이러한 무기를 모두 나눠주는 것은 물론, 바일 가문과 블랙 스컬에 일부를 나눠주기에도 전혀 무리가 없었으니.
-흠, 이걸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군.
-부담스러우시다면 돌려주셔도 됩니다.
-그, 그게 아니라…!
-파하하핫! 그럼 나는 잘 받아가도록 하겠네. 늙어서 욕심을 부릴 데라고는 이런 것밖에는 없거든.
-헤르만은요?
-험험! 갑자기 생각이 바뀌었다네. 주는 것을 마다한다면 친구로서 예의가 아니겠지. 험험험!
헤르만과 세일러는 새로운 검을 받았을 때, 표정이 밝아져도 그렇게 밝아질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그동안 엘릭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었던 바일 가문의 기사단들이 엘릭에게 하나둘씩 마음을 열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동안 저희가 저지른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청양 기사단의 단주, 카나타가 직접 휘하의 기사들을 대동한 채 엘릭에게 고개를 숙인 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
헤르만과 이사벨은 멀리서 그것을 흐뭇하게만 바라봤다.
그리고 다시 시간의 수레바퀴는 굴러갔고.
무기 제련은 물론, 용아병으로서의 기초 훈련도 끝나게 되었다.
탄탄한 갑주와 병기로 무장한 별의 종군은 이제 세상 어디에 내놓아도 절대 뒤지지 않을 정병이 되어있었다.
엄격한 훈련 덕분에 기존 가신들의 소속이었던 프란츠 백작가와 트워크 자작가로서의 정체성도 많이 희석되어 있었으니.
2천여 명에 달하는 정병 집단은 그렇게 탄생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 드디어 진짜 떠날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엘릭은 마지막 인사를 위해 사르나이를 찾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엘릭은 언젠가 만나고 싶었지만, 만날 기회가 없었던 누군가를 만날 수 있었다.
사르나이의 몸에 강림한 창천의 신이었다.
-네가, 우스던이 말하던 바로 그 손자로구나.
분명히 앞을 못 볼 텐데도 불구하고. 당시의 사르나이만큼은 엘릭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평상시 차분했던 그녀의 목소리도 어딘지 모르게 달라져 고요하고, 기품이 넘쳤다.
그 앞에서 저절로 고개를 숙여야만 할 것 같은 기분.
꽃의 신전에서 수선의 신을 비롯한 여러 꽃의 신들을 직접 만나보기도 했지만, 그것과는 또 전혀 느낌이 전혀 달랐다.
이것이 정말 신의 기품인가 싶었다.
-으으…! 이 더러운 기분을 또 느껴야만 하다니. 구역질이 나는 공간이다. 볼일 끝나면 빨리 나가자. 계속 여기 있다간 본 왕이 도저히 못 버틸 것 같으니.
정작 옆에 있던 메피스토는 그 기운을 너무 싫어했지만.
-메피스토펠레스, 당신은 여전히 무례하군요.
그런데 창천의 신은 그런 메피스토의 짜증을 들었던 모양이었다. ‘정확하게’ 메피스토를 보면서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반가운 듯, 입가에는 웃음도 걸려있었다.
-뭐지? 본 왕이 보이는 건가? 그래도 신이라는 자리를 노름으로 딴 건 아닌 모양이지?
-전 모든 것을 주관하고 있으니까요. 당신이 어디로 흘러왔는지, 또 어디로 흘러갈지를 보고 있답니다.
-주관은 무슨. 방관이겠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선택할 수 있는 어휘도 달라질 테지요.
-쳇!
창천 신의 유려한 말솜씨에 메피스토는 더 이상 말을 섞기가 싫었던지,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옆으로 돌려버렸다.
엘릭은 옆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야만 했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메피스토는 말싸움을 참 못 하는 편이었다.
그러다 엘릭은 마음을 다잡고, 창천의 신에게 예를 갖췄다.
황태자에게도 머리를 제대로 숙이지 않던 그였지만. 창천의 신은 그렇게 인사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존재였다.
-조부님을 만나시고, 사르나이로 하여금 저를 이곳으로 인도하게 하신 것이 창천의 신이시라고 들었습니다. 감사했습니다.
-저는 그저 해야 할 일을 한 것일 뿐이랍니다. ■■의 후손이여.
■■.
엘릭은 창천의 신이 언급한 대상이 정확하게 어떤 발음이었는지 도통 기억할 수가 없었다.
분명히 듣긴 제대로 들었다.
하지만 뇌가 판단을 거부한 듯, 기억에 남질 않았다. 마치 인식을 회피하기라도 한 것 같았다.
하지만 엘릭은 창천의 신이 언급한 대상이 누구인지 눈치챌 수 있었다.
시조.
가문 내에서도 존재 여부에 대해 전설적으로만 남아있던 그분의 이름을 언급한 것이다.
-저는 그저 친구였던 ■■의 부탁을 받아 이뤄준 것일 뿐. 제게 감사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답니다.
-시조 님의… 부탁이 무엇이셨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저도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가 없네요. ■■의 유언이었거든요. 쉽게 말해주면 후손이 너무 날로 먹을 것 같다나? 재미없을 것 같으니 최대한 숨겨달라고 하더군요. 우스던도 그 때문에 적잖게 애를 먹었었지요.
-….
-지금 당신이 짓고 있는 웃음. 그것이 딱 우스던이 짓던 웃음과 똑같았답니다.
엘릭은 혀를 찼다. 자신을 괴롭히신 조부님이 결국 시조에게도 똑같이 당한 모양이었다.
역시 메르빙거. 남이 쉽게 잘 되는 건 절대 죽어도 못 보지.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성향이 대체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더 짜증이 났다.
-여하튼. 한 번쯤 보고 싶었어요. ■■이 언젠가 태어날 거라고 말했던 자신의 ‘후계자’가 어떤 모습일지.
그 말에.
두근!
두근!
엘릭은 가쁘게 뛰는 심장을 억지로 추슬러야만 했다.
후계자. 시조가 말했다던 그 단어가 너무 강하게 와닿았던 것이다.
시조께서는 그 말을 단순히 가문의 가주를 가리키는 용도로 쓴 것이 아닐 것이다.
자신의 마법과 유훈을 제대로 계승할 사람을 의미할 터.
그것이, 자신으로 지목되었다는 사실이 기뻤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사계의 안배가 대체 어떤 ‘이유’로 자신에게 전해졌는지를 알고 싶었다.
-그런데 이렇게 보니 아주 헌앙하군요. 아주 그를 똑 닮았어요. 젊은 시절의 ■■을 떠올리게 할 만큼.
그리고 길지 않은 창천 신과의 대화에서. 엘릭은 그녀가 매우 기뻐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마치 오래전에 떠나보내야만 했던 친구와의 만남처럼 느껴진 모양이었다.
엘릭도 엘릭 나름대로 그녀로부터 많은 비밀을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지금은 기록으로도 남아있지 않은 옛 시절의 이야기를 접할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서쪽으로 가세요. 그곳에 당신이 원하는 것이 있을 겁니다.
엘릭은 신탁 아닌 신탁을 받을 수 있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는 끝내 알 수 없었다.
그 의미를 묻는 질문에 창천의 신은 그저 말없이 묘한 미소를 흘리기만 할 뿐이었으니까.
당시 자신이 있던 곳이 동부 변경 지대에서도 끝자락에 있는 곳이었으니, 서쪽으로 가라는 말은 단순히 제국으로 돌아가라는 의미였을 수도, 혹은 그보다 더 먼 서쪽 끄트머리까지 가라는 의미였을 수도 있었다.
어쩌면 진짜 서해 바다에 가면 무언가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미였을 수도.
하지만 그것이 앞으로 자신에게 아주 큰 도움이 되리라는 것을 잘 알았기에 엘릭은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출정을 개시했다.
첫 번째 공훈은 되도록 아주 큰 것으로 세울 생각이었다.
그래야만 적사자군도, 바투도, 마족도, 그리고 제국도, 자신들의 귀환을 알 수 있을 테니까.
-아크란 요새. 그곳으로 간다.
아크란 요새를 택한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별의 종군이 처음으로 활약한 무대였던 케트라인 요새에 이어 적사자군에게 가장 큰 자극을 줄 수 있는 장소였으며.
‘벨롯… 그 커다랗던 마왕의 마기가 이쪽으로 향하고 있었지.’
그리고리의 본단인지 지부인지는 몰라도, 어쨌거나 마족의 흔적이 향하고 있는 장소였다.
『음험한 냄새가 아주 여기까지 풍기는군.』
메피스토의 혼잣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으면서.
“【보여라】.”
엘릭은 시야에 폭 담긴 지평선을 따라 넓게 마법을 발동시켰다.
벨롯은 전혀 짐작도 못 하고 있겠지만.
녀석의 그림자 속에는 여전히 휼의 사념이 던져둔 사념 덩어리의 일부가 남아있었다.
키키킥. 또 간만에 맛난 것을 먹을 수 있겠군.
휼의 사념이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키득거렸다.
그리고.
‘찾았다!’
엘릭은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다른 산보다 훨씬 험준한 경사를 자랑하는 산자락.
그곳에서 휼의 ‘냄새’가 잔뜩 풍기고 있었다.
“헤르만.”
“그래. 또 재미난 것을 찾은 모양이지?”
“저번에 못 잡으셨던 마왕, 잡고 싶지 않으십니까?”
헤르만은 전혀 예상도 못 한 말이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곧 피식 웃었다.
크게 비틀린 한쪽 입술 사이로 송곳니가 드러났다.
“잡고 싶지. 기사가 되어 사냥감을 놓쳤다는 게 얼마나 억울한지 자네는 모를 걸세.”
“그럼 잡으러 가죠. 그 사냥감.”
엘릭도 따라서 웃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