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깃발을 들다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 * *
리트머스 전선(戰線).
제국군 본영.
네레스타 가 진영의 대막사에서 거친 노호성이 터졌다.
쾅!
“그러니까 내가 직접 가겠다는 것 아닌가! 길리티, 저 인간하고 같이!”
오거스틴이 탁상을 세게 내려치고 있었다.
이를 가는 내내. 그의 두 눈은 흉흉하게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맞은편에 있는 네레스타의 가주, 가이는 아무렇지 않게 마시던 홍차만 마저 홀짝일 뿐이었다.
“안 됩니다.”
“그러니까 왜!”
“그래서 안 되는 겁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탁!
가이가 홍차를 내려놓으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정말 모르십니까?”
“…젠장!”
여태껏 길길이 날뛰던 오거스틴도 여기서는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오거스틴이 나선다는 것은 그 의미부터가 절대 단순하지 않았다.
당대에 황금사자와 유일하게 비견할 수 있을 만한 존재. ‘천하제일’이라는 타이틀을 노려볼 수 있을 만한 존재가 가지는 무게는 평범한 사람들과는 전혀 다르다.
그가 나선다는 것은 곧 네레스타가 움직인다는 것과 진배없었다.
가이의 진짜 의견이 어떠하건 간에, 다른 귀족과 황실이 보기에는 그렇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감찰국부터가 집요하게 움직일 테지.
가뜩이나 그동안 베일에 싸여있던 오거스틴을 확실하게 조사할 기회랍시고 거머리처럼 달라붙을 테고, 네레스타에게서 수상한 혐의점을 찾아볼 수는 없나 하며 승냥이 떼처럼 물어뜯을 것이다.
특히나 지금 오거스틴이 요청하는 것은 가벼운 나들이와는 그 궤를 달리했다.
적진에 고립되어 있을 엘릭 메르빙거의 구출.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그를 찾기 위해 적진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녀야만 한다. 적의 이목을 살 수밖에 없었고, 자칫 오거스틴이 도리어 표적이 될 수도 있었다.
물론, 오거스틴이 쉽게 당하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 손이 열 손을 당해내지는 못하는 법이라고, 적진 한가운데에 고립되어 있다 보면 아무리 오거스틴이라고 해도 위험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가장 큰 문제는.
‘작은 할아버님이 움직이시면, 작은 할아버님 혼자만 움직이시는 게 아니라는 거지.’
현재 엘릭을 구하고자 기회를 엿보는 이들은 아주 많았다.
의형제인 길리티 렌즈를 비롯해서 원로원의 다른 원로들까지. 죄다 일어날 가능성이 컸다.
하루에도 몇 번씩 집무실을 찾아와 언제 엘릭을 구하러 갈 것이냐고 생떼를 부리는 노인들의 민원(?)으로 정신이 평온할 날이 없을 정도였다.
원로원이 움직인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 파장은 얼마나 클 것인지. 가이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정작 원로원의 괴물들은 전혀 모르고 있을 테지만.
아니, 알고 있어도 신경도 쓰지 않을 테지만.
‘원래 그런 분들이시니.’
여하튼 가이는 네레스타 가주로서 절대 오거스틴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었다.
그의 말을 무시하고 오거스틴이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 하여도 오거스틴은 자신이 허락해주지 않으면 함부로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원로원주이자 태상원로로서, 가주의 무게를 지켜주고 존중해줘야 한다는 것은 늘 그가 내보이던 철칙이었으니까.
가이가 오거스틴과 관계를 좋게 유지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여하튼. 지금은 아니야.’
“그게 아니면 제자를 믿지 못하시는 겁니까?”
“그럴 리가 없잖나.”
“그럼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으으!”
가이는 말없이 자신을 노려보는 오거스틴의 시선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면서 마저 남은 홍차를 마셨다.
그러던 그때.
“아버지.”
조용히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주라고 불러라.”
“예. 가주님.”
“그래. 뭐지?”
션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본 가와 메르빙거 간에 맺은 협약, 지키지 않으실 작정이십니까?”
“그럴 리가.”
“그럼 왜 아직 움직이지 않으시는 겁니까?”
“난 기회를 엿보는 것일 뿐이다.”
“기회라 하시면…?”
“지금까지 적들의 반응으로 보건대, 메르빙거는 아직 발각되지 않은 게 분명하다.”
“그거야 적들의 기만일 수도 있잖습니까?”
“아니. 아직 저들은 모른다.”
“어떻게 그 사실을 확신할 수 있으신…?”
가이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걸렸다.
“이 세상에 내가 붙인 눈과 귀가 어디 한두 개인 줄 아느냐?”
“…!”
이번에는 션도 크게 충격을 받고 말았다.
가이는 지금 감찰국에서도 골머리를 썩는 야만족 내 깊숙한 곳에다가도 세작을 심어놨다는 뜻이었으니까.
그제야 사람들이 아버지를 가리키며 지나가듯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능구렁이.
속내를 알 수 없는 저 얼굴 속에 대체 몇 개나 되는 지략을 품고 있는 건지.
션은 순간 자신의 아버지가 무척이나 낯설면서도 무섭게 느껴졌다.
“용은 원래 쉽게 움직이는 법이 없다. 언제나 잠자코 기다리기만 할 뿐이지. 남들이 봤을 때는 게으르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들은 인내하고 또 인내한다. 그러다 몸집을 일으켰을 때 가장 큰 파장을 만들어낸다.”
가이는 황실과 감찰국의 요청에도 여태껏 단 한 번도 나서지 않고 있었다. 제라이츠 황태자가 작전 회의에서 노골적으로 가이를 콕 집었을 때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도리어 그럴수록 함부로 경거망동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며 가솔을 단단히 단속하고,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그때마다 제국군은 계속 적사자군과 야만족 군단에 밀려 패퇴를 거듭해야만 했다.
지금이야 적들도 보급선이 길어지고, 제국군도 전열을 재정비하면서 팽팽한 대치가 이뤄지기 시작했다지만.
“남들이 우리더러 비겁하다고 해도, 나는 기다리고 또 기다릴 뿐이다. 내가, 가문이, 일어났을 때 가장 큰 파장을 만들어낼 수 있는 때를. 최대한 피해를 덜 보고, 최대한 많은 성과를 얻을 수 있을 때를.”
가이의 두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그것을 위한 자리가 바로 내가 앉아있는 이 자리다.”
“….”
그 말에 션은 더 이상 자신의 말을 덧붙일 수가 없었다.
직계 혈육으로 태어났다지만.
그 덕분에 온갖 혜택과 지원을 다 받으며 자랐다지만, 그로서는 아버지가 앉아있는 자리가 너무 멀게만 느껴졌다.
가주의 자리. 그것은 대체 뭘 하는 자리인 걸까?
“끄응.”
오거스틴도 골치 아프다면서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던 바로 그때.
파락!
갑자기 대막사의 문이 열리면서 가솔 하나가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
“무슨 일이지?”
“전령이 하나 도착했습니다.”
“전령?”
오거스틴과 션의 시선도 저절로 그쪽으로 향했다.
가솔은 원로원주의 불타는 시선을 받고 움찔거렸지만, 곧 최대한 내색하지 않고 보고를 올렸다.
“예. 아크란 요새에 갑자기 적사자군의 깃발이 내려갔다는 보고입니다.”
순간, 가이의 눈이 빛났다. 션과 오거스틴도 마찬가지.
아크란 요새는 적사자군이 자랑하는 윈즈 변경주의 3대 요새 중 하나였다. 엘릭이 함락시킨 바가 있던 케트라인 요새도 바로 여기에 해당했다.
지금은 전선이 제국령 리트머스 성까지 밀려나면서 거리가 떨어져도 한참 동떨어진 곳인데.
갑자기 그곳의 깃발이 내려갔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
“그리고 새로운 깃발이 올라갔습니다.”
“그 깃발, 누구꺼지?”
“아직 확실하게 판단된 것은 아닙니다만.”
가솔은 잠시 숨을 고르면서 힘을 주어 말했다.
“메르빙거의 깃발인 듯합니다.”
“…!”
“…흘흘흘. 역시 이 늙은이의 제자로구나. 그동안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아서 대체 그동안 뭘 하고 자빠졌나 싶었더니. 아주 앙큼한 짓을 벌이려고 준비 중인 것이었어.”
오거스틴은 조금 전까지 가이 앞에서 발을 동동 굴렀던 사실을 잊어버린 듯, 마치 그럴 줄 알았다며 크게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가이의 입가에도 엷은 미소가 걸렸다.
그리고 그는 가주와 원로원주 앞이라 크게 기뻐하지도 못하고 입술만 씰룩대고 있는 셋째 아들을 돌아봤다.
“션.”
“예? 예! 가주님.”
션이 다시 반듯하게 자세를 갖췄다.
“작은 할아버님, 잘 모셔라.”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를 리가 없는바. 션은 가이가 말을 바꿀까 싶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
오거스틴과 원로원이 옆으로 빠지지 않도록 잘 안내하라는 의미가 아닌가.
션은 잔뜩 상기된 얼굴이 되어 대막사를 벗어날 수 있었다.
-용은 원래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하지만 몸집을 일으켰을 때 가장 큰 파장을 만들어낸다.
아버지가 하셨던 말씀이 자꾸만 입안을 맴돌았다.
이제 용이 일어났으니.
곧 전장에 새로운 바람이 불 것이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 * *
펄럭!
윈즈 변경주를 상징하는 요새, 남방의 아크란 요새 위로 메르빙거의 깃발이 날렸다.
그 좌우로 바일 가문과 블랙 스컬의 인장도 같이 날렸지만, 가장 크고 돋보이는 것은 메르빙거였다.
“대, 대체 너희들이 언제 이곳에…!”
“다들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거지, 뭐. 안 그래?”
변경주를 떠난 적사자군을 대신해 아크란 요새를 지키던 파비앙은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조금만 더 의심을 했었어도…!’
케트라인 요새에 이어 아크란 요새까지 메르빙거의 깃발이 내걸리게 만든 건, 어디까지나 자신의 실책이었다.
불과 몇 시간 전. 성문 앞에 수십 개도 넘는 수레가 도착했다. 그들은 본부에서 병량 지원 나온 보급조라고 소속을 밝혔고, 파비앙은 이곳이 전선에서도 한참 떨어진 후방이라는 사실에 크게 의심하지 않고 제대로 점검도 하지 않고 통과를 허락해주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요새의 함락이었으니.
수레에서 수십 명도 넘는 병사들이 튀어 나왔던 것이다.
물론, 아크란 요새 내에도 백여 명의 병력이 남아있긴 했다.
최소한의 인력이었지만, 그래도 별다른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들 대부분이 오랫동안 변경주를 지키면서 수많은 전투로 단련된 정예병이었으니까.
하지만 메르빙거의 군사들은 그들보다 머릿수도 훨씬 적으면서 힘은 압도적으로 강했다.
표범이라도 되는 것처럼 몸이 엄청 날랠 뿐만 아니라, 힘도 웬만한 장정을 쉽게 거꾸러뜨릴 수 있을 정도로 강했다.
더군다나 착용하고 있던 갑주와 병장기는 얼마나 대단하던지….
‘당장 시장에 내놓기만 해도 귀족들조차 군침을 흘릴 만한 수준의 무기들. 대체 이걸 어디서 구한 거지…?’
파비앙으로서는 도저히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별의 종군이 제국군 본군에서 떨어져 나와 동쪽으로 이동했다는 것은 분명 적사자군에서도 파악하고 있던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뒤로 따로 수색을 해봐도, 야만족의 영역으로 넘어갔다는 사실만 알아낼 수 있었을 뿐, 그 외에는 좀처럼 아무것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적사자군에서는 자체적으로 별의 종군이 야만족들의 틈바구니에 휩쓸려 알아서 증발했을 거라고만 짐작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본군의 지원 없이 자생하기는 힘들 테니 큰 피해를 면치 못할 거라고 판단했는데.
도리어 새롭게 나타난 별의 종군은 케트라인 요새를 접수했을 때보다 훨씬 군기가 살아나고, 무장도 단단해져 있었다.
적사자군이 미처 파악하지 못한 곳에서 완전한 정예화를 마쳤다는 뜻.
때문에 아크란 요새는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하고 함락되고 말았으니.
하지만.
파비앙을 가장 두렵게 만드는 건, 다시 나타난 이들이 앞으로 어떤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가뜩이나 제국군과 대치를 이루고 있는 판국에 후방에서 별의 종군이 혼란이라도 일으킨다면.
그때는 주군이신 안드레 윈즈께 크나큰 짐으로 작용할 게 분명했다.
‘그것만은 막아야…!’
하지만 파비앙의 그런 걱정과 우려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스걱-
엘릭이 가볍게 휘두른 창날에 머리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으니까.
저벅!
저벅!
“온 세상에 널리 알려라.”
엘릭은 병사들이 만든 길을 천천히 걸으며 요새의 정상에 올라섰다.
“메르빙거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부활을 위한 첫걸음이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