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용아병단(龍牙兵團)
파아아-
굳게 닫혀 있던 문이 마도경식과 같은 빛을 뿌려대고 있었다.
『이게 열쇠인가 보군?』
메피스토의 말에 엘릭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문 앞에 서서 손을 가져다 댔다.
손바닥이 닿는 자리에 마력 파장이 짧게 출렁이더니.
철컥!
끼이이이!
이음쇠가 풀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좌우로 활짝 열렸다.
엘릭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그 안으로 들어갔다.
가문의 마법보고 내에서도 가장 안쪽에 위치한 방. 그런 곳이라면 분명 아주 귀중한 것을 숨겨뒀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엘릭의 예상과는 달리 내부는 아주 조촐한 분위기를 자랑했다.
벽을 따라 세워진 서가 역시 텅 비어있었다.
하지만 엘릭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방에서도 가장 안쪽.
그저 버려진 것처럼 책상이 하나 놓여 있었다.
언제 불이 붙은 건지, 붉은 불꽃이 살랑살랑 흔들리는 은촛대 아래에는 두꺼운 책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이상하게 엘릭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두근!
두근!
마치 저것이 자신을 부르는 것 같아, 엘릭은 천천히 그 앞에 다가갔다.
책자 위로 드리우는 그림자가 짙어질수록 은촛대의 촛불도 더 크게 출렁이는 것 같았다.
『흠, 이거…?』
“아시는 물건입니까?”
『그런 건 아니다만.』
메피스토는 피식 웃으면서 책의 표면에 그려진 문장을 가리키면서 피식 웃었다.
어딘지 모르게 반갑기도, 혹은 껄끄러워 보이기도 하는,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웃음.
『아주 익숙해서.』
그것은 분명 메르빙거의 가문 문장이었다.
하지만 현재는 쓰지 않는 문장이기도 했다.
엘릭은 그게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시조께서 입고 계시던 로브. 거기에 그려져 있던 문장.’
안배를 겪을 때마다 봤던 시조의 잔상. 그가 입고 있던 옷의 문장이 딱 이것과 같았다.
현재의 것과 비슷하긴 하되, 고전풍이 더 강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니 엘릭으로서는 더 조바심이 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엘릭이 바로 움직이지 못한 이유는, 얼마나 오래된 건지 잘못 건드리기라도 했다간 책자가 바스러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보존 마법이 잔뜩 걸려 있는 걸로 봐서는 진즉에 사라졌어야 했을 것을, 누군가 억지로 간신히 남겨만 둔 듯한 느낌이었다.
엘릭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첫 장을 펼쳤다.
그러자 그곳에 책갈피처럼 끼워져 있던 양피지 하나가 조용히 아래로 툭 떨어졌다.
‘이건…?’
그것은 편지였다.
엘릭에게도 아주 익숙한 글씨체로 적힌 편지.
‘조부님께서 남기신 편지야!’
가문에 몇 개 남아있지 않은 우스던 메르빙거의 유품에 이와 비슷한 글씨가 있지 않았던가.
엘릭의 시선이 저절로 그곳으로 쏠렸다.
-언젠가 이곳을 방문할 나의 손자에게.
비록 우리가 실제로 만난 적은 없지만, 그래도 나는 너를, 너는 나를 서로가 서로를 아주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내가 지금 걷고 있는 길이 곧 네가 걸을 길이며, 네가 앞으로 걸어 나갈 길이 내가 걸었던 길일 테니.
그리고 그 길목에 위치한 자그마한 경유지 중 하나가 바로 이곳이란다.
여기쯤에서라면 너무 많은 것들로 인해 혼란스러움을 느낄 너에게 일부를 말해주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어 이곳에 편지를 남긴다.
흑의 설원에서부터 이곳에 이르기까지.
수도 없이 남아있던 조부님의 손길에 대해서 이제 이유를 들을 수 있는 걸까?
엘릭은 자기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우선 한 가지만 말해두자면, 나는 사실 네가 어떤 길을 걷고 있는지 정확하게는 모른다.
‘이게 무슨…?’
-나는 운이 좋아 오래전에 창천의 신과 손이 닿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도움 덕택에 별의 점지를 통해 아주 잠깐이나마 미래를 ‘엿볼’ 수 있는 능력을 손에 넣었다.
하지만 그 미래라는 것은 온통 가능성의 영역으로만 남아있어, 어느 것이 진짜라고 콕 집을 수가 없었다.
결국 내가 보았고 걷는 길도 모두 수많은 미래선 중에 하나에 불과할 뿐. 나는 그중에서도 가장 어렵고, 험난하며, 고통스러운 길만을 골라 걸었을 뿐이란다.
너라면 그 모든 것들을 해낼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기에.
이는 비록 너는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할 손자이지만, 나와 가문의 유지를 누구보다 잘 이끌어줄 아이라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란다.
엘릭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렇게 굳게 믿으셨으면 좀 더 쉽게 난이도 조절하고 가셨으면 되셨잖습니까?’
괜히 심통이 났다.
그러면서도 한 가지 의문이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창천의 신…. 사르나이가 모신다는 신이 조부님과도 관련이 있었구나.’
이곳을 나간다면, 아무래도 사르나이부터 찾아야 할 것 같았다.
-황도(黃道)와 천구(天球)에 그려진 별의 운명은 말하고 있다. 나를 의미하는 별은 이제 머지않아 곧 꺼질 것이라고. 지금은 다른 어느 별보다도 화려하게 빛나고 있지만, 그것은 촛불이 꺼지기 바로 직전에 가장 크게 타오르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엘릭의 시선은 잠시 환한 빛이 발하는 은촛대 쪽으로 향했다.
‘아 아래에서 편지를 쓰신 거구나.’
엘릭은 어쩐지 우스던 메르빙거가 이곳에 앉아 조용히 만년필을 끄적이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대체 어떤 식으로 꺼지게 되는지는 나도 잘 모른다. 다만 별이 나에게 준 소임이 거기까지라는 것만 알 뿐. 삶에 미련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미 나는 많은 사람이 겪어보지 못한 많은 찬사를 받았고, 아름다운 아내와 귀여운 자식, 그리고 심성 고운 며느리를 맞았으니까.
그런데도 걱정이 남는 것은 여전히 황도를 뒤덮고 있는 검은 구름이 좀처럼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화려하게 빛난다고 한들, 별자리를 전부 뒤덮는 먹구름을 뚫지는 못하지 않겠느냐?
‘먹구름.’
엘릭은 이 단어가 유달리 눈에 밟혔다.
이것은 과연 아자젤과 그리고리를 의미하는 걸까?
하지만 단순히 그것만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엘릭은 슬쩍 옆을 흘낏 보았다.
『뭐? 왜?』
“아닙니다. 아무것도.”
눈이 마주친 메피스토가 미간을 살짝 좁혔지만, 엘릭은 담담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겉보기와 달리, 머릿속은 복잡했다.
‘메피스토….’
이따금 자기도 모르게 불쑥불쑥 드는 생각이 있었다.
‘하필’ 메피스토가 천여 년 만의 봉인에서 깨어난 이때. 아자젤의 부활을 노리는 그리고리가 활동을 개시한 것을 두고 단순히 ‘우연’이라고 치부할 수 있는 걸까?
그 험난했던 대마전쟁에서조차 볼 수 없었던 대마왕이 두 명이나 눈을 뜬 것인데도?
그리고 만약 그의 우려대로 우스던이 말한 ‘먹구름’에 메피스토도 포함되는 것이라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그래서 먹구름을 흩뜨릴 방법을 찾기 위해 별의 점지를 따라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알게 되었다.
그 길은 사실 전부 누군가가 걸었던 길이라는 것을.
4대 가신.
사계.
바로 그분들이었다.
‘…!’
엘릭은 자신이 가는 길에 우스던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우스던 앞에도 다른 누군가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어찌 보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 길들 모두가 가문의 손길이 묻어나던 곳들이었으니까.
-참으로 신기했다. 가는 곳곳마다 사계라 불리는 분들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이.
덕분에 많은 것들을 보았다.
나도 알지 못했던, 여러 선대 가주들도 알지 못했던, 아니, 잊고 있었던 많은 것들을 말이다.
흑의 설원에서 수인족만 기억하고 있던 과거.
꽃의 신전에 남은 시조의 흔적.
오랫동안 기다리고 기다리던 용들.
그리고.
아직 엘릭이 닿지 못했을 뿐인 여러 안배의 장소들.
-그것들을 보면서 함께 웃기도 하고, 즐기기도 하면서, 많은 것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또한, 깨달았다.
내게 주어진 사명(使命)이 무엇인지.
그분들이 진짜 말씀하시고 싶으신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을 후손들에게 잘 전달될 수 있게끔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나의 사명이었다.
그리하여 먹구름이 흩어지게 만들고, 이제는 이 땅에서 잊히고 만 시조의 별빛을 하늘에다 틔우는 것.
그것 또한 나의 사명이었다.
엘릭은 언젠가 오토 한이 사라지면서 그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사계, 봄‧여름‧가을‧겨울을 상징하는 마법들은 4대 가신이 모두 발전시키긴 했지만, 그 뿌리는 모두 시조에게서 비롯되었다고.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수습할 수 있다면, 시조에게도 다가설 수 있을 것이라고.
어쩌면.
우스던이 말하는 것이 이것일지도 모르겠다.
‘시조의 마법….’
-그러니 나는 그것을 매만지기만 하면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다시 노파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먹구름을 물리치고자 시작했던 일이, 오히려 내 손자에게는 너무 버거운 짐을 남기는 것이 되지는 않을까 싶어서
-하지만 난 믿는다.
내가 그러했고, 내 아버지가 그러했고, 내 할아버지가 그러했으며, 여러 선조들이 그러했듯이.
그리고 시조께서 그러하셨듯이.
너 역시.
그렇게 길을 잘 걷게 될 것이라고.
엘릭은 괜히 코끝이 시큰거리는 것 같아 손끝으로 코를 훔치면서 투덜거렸다.
“…우리 조부님, 결국 끝까지 비밀은 말씀 안 해주시네.”
-그러니 그 길이 여전히 많이 고되고, 쓸쓸하고, 외로워도. 묵묵히 걷고 걸으며 또 기다리려무나. 곧 풀리고 풀릴 테니.
-하지만 할애비가 되어 여기까지 쫓아온 네가 기특해서라도 그냥 보내줄 수는 없을 노릇. 선물을 하나 주마.
우스던은 삐친 엘릭을 가볍게 달래기까지 했다. 진짜 조부님이 나타나 옆에서 다독여주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엘릭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따로 있었다.
선물.
대체 뭘까?
-보상으로 이 책자를 남긴다.
이 뒤에 적힌 것은 내가 별의 점지를 따라, 사계의 뒤를 밟으면서 어렴풋이 엿보게 된 것들. 얄팍한 재주로나마 따라 할 수 있게 된 시조의 마법들이다.
“…!”
바로 그 대목이 되었을 때, 엘릭은 허리를 쭈뼛 세울 수밖에 없었다.
‘시조의 마법이라고?’
우스던은 얄팍한 재주라며 스스로를 낮추었지만, 그만한 인물이 ‘복구한’ 마법이 정말 그 정도일 리가 없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거의 원형에 가깝게 복구했을 것이다.
대체 무엇일까?
용을 부리는 마법?
아니면 거인을 거느리는 마법?
아니. 용과 거인은 이미 사멸된 지 오래이니 아닐 것이다.
엄청난 벼락을 뿌리고 태풍을 일으키던 마법이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엘릭은 안배 속에서 엿보았던 시조의 여러 마법을 떠올리면서 눈을 반짝였다.
하나 같이 ‘기적’ 혹은 ‘재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었으니, 자신에게도 큰길을 제시해줄 게 분명했다.
-ps. 아 참, 그리고 지금쯤이면 ‘겨울’ 뒤에 있어야 할 ‘봄’의 안배가 도저히 기억나질 않아 전전긍긍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이 든다.
사실, 그거 내가 한 것이란다.
이유가 뭐냐고?
그러다 편지의 마지막 단에 이르렀을 때, 엘릭은 눈을 가늘게 좁히고 말았다.
봄의 안배가 기억나지 않았던 이유.
‘혹시나?’하고 가졌던 가정이 들어맞았던 것이다.
속이 깊으신 조부님인 만큼 혹시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걸까 싶었는데.
-그냥. 재미있을 것 같아서?
“….”
어쩐지 오토 한을 연상케하는 대답에 엘릭은 깊은 침묵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곧 머리를 쥐어뜯고 말았다.
“아아아악! 빌어먹을 메르빙거어어! 정말 빌어먹을 집안! 정말이지 맘에 안 들어어어어!”
한 가지 사실만큼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대륙의 영웅이니 구세주니 하는 조부님도, 결국 메르빙거셨다는 것을.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