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용아병단(龍牙兵團)
‘이렇게까지 해야 겨우 걸려드는군.’
쿠란시빌 자작을 해치우고 난 뒤.
엘릭은 그동안 캘리거 백작이 하는 꼴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사실 그전에도 그가 조금만 더 무리를 했더라면, 눈엣가시이기만 한 캘리거 백작을 치워버릴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이미 모든 권한은 그의 손에 쥐어져 있었고, 헤르만과 세일러도 그의 편인 이상 적당한 누명을 씌워 머리를 날려버렸어도 됐으니까.
하지만 그러지 않은 이유는 딱 하나였다.
반지.
캘리거 백작이 끼고 있는 반지의 정확한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이전에도 마도경식과 공명(共鳴)한 적이 있었으니, 분명히 가문의 아티팩트인 건 맞았다.
하지만 쓰임새도, 사용법도 모르니 함부로 취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제압하고 나서 심문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워낙에 고집이 센 놈이니 쉽게 입을 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들어 그 계획은 기각해야만 했다.
그래서 엘릭은 가만히 기회를 노렸다.
녀석이 반지를 사용하기만을.
하지만 어쩐 일인지 도통 쉽게 넘어오질 않아 전전긍긍하던 중, 엘릭은 결국 최후의 수단을 써야만 했다.
캘리거 백작이 용의 알을 들고 가게끔 만든 것이다.
그런 귀중한 것을 가져간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쓰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그리고.
드디어 이렇게 발을 들이게 되었으니.
“참 오래도 걸렸어. 이거 언제 사용하나 싶었는데.”
엘릭은 자신의 손에 끼어진 반지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보석은 여전히 시린 빛을 뿌려대고 있었다. 반지의 표면을 따라 세밀하게 적힌 글자가 요동쳤다.
『마도지환(魔道指環)이로군.』
그것을 보며. 메피스토가 아주 짤막하게 말했다.
[아세요, 이거?]
메피스토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유명하긴 했지. 마도경식이 가주를 상징하는 것이라면, 마도지환은 너희 가문을 상징하는 것이었으니까.』
엘릭의 두 눈에 이채가 어렸다.
가문의 상징물.
이건 애초부터 마도경식과는 쓰임새가 전혀 달랐다는 뜻이었다.
마도경식은 가주의 권위적 상징을 의미하지만, 마도지환은 가문을 대표하는 상징이었단 뜻이었으니까.
[쓰임새는 모르죠?]
『본 왕이 그걸 알게 되었으면 메르빙거로 있었겠지, 어디 대마왕으로 있었겠나?』
[그도 그렇네요.]
엘릭은 조금 더 정보를 캐낼 수 있을까 기대했지만, 아무래도 그건 자신이 알아봐야 할 모양이었다.
『그래도 한 가지만큼은 확실하지.』
[…?]
『그것까지 너의 손에 돌아온 이상, 메르빙거를 두고 감히 몰락했다 폄훼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을 거란 것.』
피식.
엘릭의 입술 사이로 실소가 터져 나왔다.
[간만에.]
한쪽 입술 끝이 비틀렸다.
[맞는 말씀을 하시네요.]
엘릭은 허공에서부터 얼음창을 길쭉하게 뽑아 손에 쥐었다.
“메르빙거어어어! 죽여버리겠다아아!”
파지지직!
콰르르릉, 콰르르-
반쯤 눈이 돌아간 캘리거 백작이 이쪽으로 미니 스태프를 들이대는 게 보였다. 수정구가 환한 빛을 뿌리자, 하늘에서부터 벼락이 이쪽으로 쉴 새 없이 쏟아졌다.
“내가 할 소리를 잘도 하네.”
콰앙!
쐐애애액-
엘릭은 허공을 거세게 박차면서 캘리거 백작에게로 수직 낙하했다.
벼락이 연거푸 그런 엘릭의 뒤를 노리려 했지만, 어느새 엘릭을 보호하듯이 감싸고 있는 겨울 폭풍이라는 장벽을 넘지 못했다. 결국 갈 곳을 잃은 벼락은 수십 갈래로 잘게 쪼개져 흩어져 사라졌다.
캘리거 백작은 순식간에 엘릭이 자신이 있는 곳까지 다다르자, 크게 눈을 떴다.
어마어마한 압박감이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마치 집채만 한 바위가 비탈길을 따라 이쪽으로 굴러오는 것처럼 두렵게만 느껴졌다.
맛도 없을 것 같은 놈이로군.
엘릭이 내뿜는 기세는 용마인이 되면서 획득한 드래곤 피어였다.
여기에 흉살의 인장까지 더해지니 살벌한 투기(鬪氣)가 만들어진 것이다.
대마전쟁 이후로는 이렇다 할 전쟁을 제대로 치러보지 못했던 그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는 기세였지만.
그래도 캘리거 백작은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지지 않겠다는 듯이, 저 바위를 어떻게든 부수고 말겠다는 듯이, 마력을 더 크게 끌어올렸다.
파라라락!
소맷자락이 거칠게 흔들렸다. 마력풍이 줄줄 새어 나온 것이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무, 무슨…?’
캘리거 백작은 그제야 자신의 몸에 벌어진 이상을 깨달을 수 있었다.
마력이 좀처럼 유동되질 않았다.
마치 무언가에 꽁꽁 묶인 것만 같았다.
그제야 캘리거 백작은 자신이 딛고 있던 땅 지천에 빙판이 깔렸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거기서부터… 전혀 생각지도 못한 기운이 체내로 파고들어 마력 기관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유명의 인장이었다.
엘릭이 마왕 레다를 잡고 난 뒤에 얻은 인장. 마기를 섬세하게 다룰 수 있는 이 인장을 활용하여 엘릭은 새로운 전술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마독(魔毒).
마기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극악한 성질일지니. 이것을 빙독과 같이 섞어서 위력을 최대로 증폭시킨 것이다.
캘리거 백작의 마력이 운행을 정지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아니, 정지한 건 마력만이 아니었다.
신진대사도 느려지다시피 하면서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손끝에서 감각조차 느껴지질 않아, 미니 스태프를 까딱할 수조차 없었다.
촤르르륵, 촤르륵!
동시에 빙판에서부터 튀어나온 냉혹의 사슬이 그를 칭칭 감기까지 했으니.
“안 돼!”
엘릭이 내뻗은 얼음창은 어느새 그의 미간에까지 다다랐다.
“안 된다고…!”
캘리거 백작의 두 눈에 처음으로 공포가 어렸다.
얼음창이, 엘릭이, 시야 속에서 점차 커져만 갔다.
“안 돼에에에에!”
공포는 절규가 되었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는 원통한 외침이 구슬프게 터져 나왔지만.
퍼억!
얼음창은 순식간에 캘리거 백작의 미간을 뚫고 지나갔다.
그리고.
쩌저저적!
구멍 난 이마에서부터 시작된 얼음이 삽시간에 살결을 타고 전신을 뒤덮었다.
그것이, 캘리거 백작의 최후였다.
탁!
파아아-
엘릭은 녀석의 뒤편으로 착지했다. 그리고 발동시켰던 모든 인장을 해제했다.
콰드득. 냉혹의 사슬이 빙판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덩달아 얼어붙은 캘리거 백작의 사체도 수십 조각으로 분해되어 와르르 쏟아지고 말았다.
엘릭은 더 이상 그쪽으로 신경 쓰지 않았다.
이로써 가문을 등졌던 두 반란자에 대한 모든 응징이 끝난 셈이었지만.
어째서인지 별다른 감흥이 들지 않았다.
아마도 이제는 엘릭의 시야가 그만큼 더 넓어졌기 때문이리라.
대신에 엘릭은 메피스토가 마도지환이라고 불렀던 반지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캘리거 백작은 용의 알을 마도지환으로 감추려 했다.
아공간에 설치된 창고 같은 게 분명했다.
‘이런 순이었던 것 같은데?’
엘릭은 까마귀의 눈을 빌려 캘리거 백작을 관찰해서 알아낸 패턴대로 마력을 불어넣었다.
철컥!
그러자 ‘닫혔던 문’이 열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허공에 균열이 퍼지면서 새로운 공간을 활짝 열었다.
엘릭은 용의 알이 든 상자를 챙기고, 스스럼없이 그 안쪽으로 발을 들였다.
‘이건?’
그 순간, 엘릭은 적잖게 놀라고 말았다.
상당히 많은 보물이 산적해 있었으니까.
벽면을 따라 진열된 선반 위로, 딱 한눈에 봐도 진귀해 보이는 보물들이 잔뜩 놓여 있었다.
심지어 현재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는 수백 년 전 시대의 유물들도 더러 보였다.
아무래도 선조들이 과거에 수집한 물품들을 이리저리 놓아뒀던 모양이었다.
『엔간히도 해 처먹었군. 여기가 메르빙거의 원래 보물창고였나 보지?』
메피스토는 아공간 내부를 이리저리 살피더니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긴. 원래 메르빙거 놈들이 이상하게 권력욕은 없어도, 물욕은 제법 있는 편이었지. 특히 당대에 구하기 힘든 물건들은 어떻게든 기를 쓰고 수집하려는 편이었어.』
엘릭이 언젠가 설인의 고원에서 찾았던 안가 속의 보물보다 더 좋아 보였다.
『그런데 여기 있는 것들, 아무래도 네 조상들이 모은 것 말고, 좀 이상한 것들도 많아 보이는데?』
이따금 기존에 배치된 것과 전혀 종류도 시대도 다른 것들이 섞여 있었다.
아무래도 캘리거 백작이 따로 모아둔 것 같은데… 참 많기도 많았다.
문제는 그 많은 것들이 하나같이 놓여 있는 위치가 이상하다는 점이었다. 더군다나 가품도 많았다.
물건을 보는 안목 따위는 전혀 없이, 그냥 제 딴에 보물이라 생각되는 것만 잔뜩 끌어모았다는 뜻이었다.
“…끼.”
『음?』
메피스토는 엘릭의 혼잣말에 무슨 말인가 싶어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개새끼.”
엘릭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아오, 저 빌어먹을 새끼가! 이렇게 잔뜩 해 처먹고, 그동안 입 싹 닦고 있었단 거지? 이럴 줄 알았으면 아예 줄로 주렁주렁 매달아다가 죽지도 못하게 만드는 거였는데…!”
이곳을 보니 메르빙거의 가세가 어째서 그토록 빠르게 기울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이 많은 보물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말았는데, 멀쩡하면 그게 오히려 더 이상할 일이었다.
‘조부님, 제 미래는 그렇게 잘도 내다보고 다니셨으면서 어째 가신들 미래는 못 보셨습니까?’
엘릭은 자신이 가는 곳마다 출몰하던 우스던 메르빙거를 떠올리면서 그분의 위대함에 감탄하면서도, 가장 중요하다고도 할 수 있을 소소한 것들은 전혀 챙기지 못한 것이 너무 밉게 느껴졌다.
이런 것들만 제대로 남겨놨어도.
캘리거 백작 같은 소인배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손을 써놓기만 했어도, 아버지께서 그렇게 병환으로 고생하지 않으셔도 됐을 텐데.
그런 생각이 드니, 괜히 그가 원망스러웠다.
‘그냥 이런 것들까지 보시지는 못하신 건지. 아니면 보시고도 모른 척을 하신 건지. 참 밉습니다.’
결국 엘릭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면서 더 깊숙한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아공간은 아예 철저하게 구획 별로 나눠진 모양이었다.
더 깊이 들어가니 마법 서책들도 즐비하게 있었다.
하나같이 뛰어난 가전 마법들.
역시나 안가에서 봤던 것과 동일하지만, 그보다 더 오래되어 보이거나 위력적으로 보이는 것들이 많았다.
『‘엘리멘탈 버프’…? 이게 아직도 남아있었나?』
메피스토는 낡은 책자를 하나 보고는 화들짝 놀라고 있었다.
“아시는 겁니까?”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지금은 실전된 너희 마법이니까. 그것도 너희 가주들이 쓰던 마법.』
“…!”
『여기 있는 ‘필살마환염’이라는 것도 마찬가지고.』
메피스토는 두 눈을 가늘게 좁혔다.
『보기 싫은 것들이 아주 많군. 마음 같아서는 불이라도 한 대 질러버리고 싶은 마음이야.』
엘릭은 그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이곳의 용도가 정확하게 무엇인지를.
‘가문의 창고이자 가주의 창고… 아니, 개인 집무실 같은 거라고 보면 되려나.’
두근!
두근!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간사한지. 우스던에 대한 원망으로 시무룩해졌던 심장이 다시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가전 마법들이야 이미 안가에서도 구할 수 있었다지만, 가주 마법은 또 달랐다.
메르빙거 마법 체계의 가장 중요한 뿌리이자 꽃이라 할 수 있는 것들.
엘릭의 마법 실력도 한층 더 깊어질 게 분명했다.
하지만.
엘릭을 더욱더 설레게 만든 것은 따로 있었으니.
서고의 복도를 가로질러 더 깊숙하게 다다른 곳.
그곳에 새로운 방이 있었다.
그냥 복도로 이어진 다른 방들과 달리 문으로 꽁꽁 닫혀 있는 방.
『만년한철? 대체 안에다 뭘 처박아놨기에 이런 걸 통짜로 문을 만들어 놔?』
메피스토는 어이없다는 표정이 되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만년한철은 동대륙과 서대륙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산맥의 끄트머리에 위치한 만년설, 그것도 아주 깊은 심처에서만 소량으로 발굴된다는 희귀 금속이었으니까.
그런데 이런 것으로 문은 물론, 벽까지 만들다니. 그의 눈에는 미친 짓으로만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누가 보더라도 이곳이 가장 중요한 곳임을, 명백히 알 수 있기도 했다.
마지막 방.
캘리거 백작이 그토록 들어가고 싶어 애썼지만, 결국 들어가지 못했던 인터레시아 속 ‘진짜’ 보고(寶庫)였다.
『잠금장치가 되어있는 것 같은데, 네놈이 열기는 어려울 것 같… 음?』
메피스토는 말을 하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엘릭의 목에 걸려 있는 마도경식이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