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용아병단(龍牙兵團)
엘릭이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은 무의식 세계에 접속한 지 족히 반나절은 흐른 뒤였다.
『이제야 겨우 정신을 차렸나 보군?』
엘릭은 메피스토의 말에 시선을 그쪽으로 돌렸다.
그러고는 적잖게 놀라고 말았다.
[메피, 모습이…?]
『파하하핫! 보이느냐? 이 몸의 화려한 부활이!』
메피스토는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또렷해진 육체를 갖고 있었다.
늘 흐릿해서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보이던 발도 생생해져 땅에 발을 붙이고 있었으니.
이제 부유령 신세를 끝내고, 원한다면 타인들에게도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 정도로 존재감이 형성된 모양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전과 비교했을 때, 가장 큰 차이점은 그를 중심으로 마기가 조금씩 휘몰아치고 있다는 점이었다.
메피스토가 양팔을 뻗으며 대소를 터뜨리자, 마기가 불길처럼 활활 타올랐다.
대기가 조금씩 떨리고, 살갗이 따끔거렸다.
드디어 본격적으로 물리적인 힘의 행사가 가능해졌다는 뜻.
그에 따라 엘릭의 팔에 그려진 원죄의 인장도 은은한 빛을 뿌려댔다.
그것을 본 엘릭의 소감은.
[더 만만해 보이는데요?]
아주 간단했다.
『이 미친놈이!』
메피스토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아니. 사실이 그렇잖아요. 그런 상태로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직까지 마졸 하나도 못 당해 내겠구만.]
『….』
사실 엘릭의 박한 평가도 그리 크게 틀린 건 아니었다.
지금 메피스토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고작 모습을 드러내고, 마기로 불씨를 일으키거나 물을 뿌려대는 정도가 고작이었으니까.
싸움에는 일절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전능(全能)하다고까지 평가받던 대마왕 시절에 비하면… 아직도 갈 길이 멀어도 너무 멀었다.
『그, 그래도…! 그래도 마기를 되찾았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한…!』
[지금 그게 자랑입니까?]
『….』
엘릭이 고개를 외로 꼬았다.
[아니. 근데 좀 툭 까놓고 한 번 물어봅시다. 왜 이렇게 비효율적인 건데요?]
『그건!』
[솔직히 이렇게 회복이 거북이 걷는 것처럼 느려터질 거면 휼한테 던져주는 게 백 배 더 낫지.]
마침 옳은 소리를 하는군.
[오늘도 봤잖아요? 저놈이 메피보다 훨씬 밥값하더만?]
저런 식충이와 비교되는 것부터가 나로서는 슬픈 일인데, 주인.
사실 엘릭은 휼의 사념이 이렇게 순순히 돌아올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풀어주었으니, 그냥 이대로 도망치거나 한 번 삼킨 유명의 인장을 절대 그냥 내어주지 않을 거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래서 풀어줄 당시에도 녀석과 엎치락뒤치락 할 각오까지 했었으니.
하지만 휼의 사념은 그런 엘릭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다.
모든 싸움이 끝나자, 순순히 엘릭에게로 돌아왔을뿐더러 유명의 인장도 곧장 내뱉었다.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긴 했지만, 엘릭이 준 레다의 마기를 먹는 것으로 만족했을 뿐이었다.
더 포함한다면 전장에 널브러진 마족의 시체들도 있겠지만… 사실 그런 것들을 아무리 끌어모아도 유명의 인장을 먹는 것보다 효과가 좋을 리는 만무했다.
‘무슨 생각인지를 도통 모르겠단 말이야.’
그런 반면에.
메피스토는 광폭의 인장을 가져갔다-레다가 죽으면서 저절로 엘릭에게로 흘러들어온 광폭의 인장을, 약속한 대로 메피스토가 날름 먹어치운 것이다.
레다의 절반을 가져간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건데.
그런데 달라진 정도가 고작 이제 마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된 정도란다.
그것도 아주 조금.
병아리 눈물만큼.
그러니 열이 받을 수밖에.
‘유다 때도 마찬가지고, 지금도 그렇고. 벌써 마왕의 인장을 두 개나 가져갔잖아?’
『본 왕이 어디 저런 아귀와 비교가 될…!』
[비교가 안 되죠. 휼이 훨씬 나으니까.]
『….』
[좀 잰 체는 그만하고 이유를 설명하시라니까?]
메피스토는 자존심이 잔뜩 상한 듯 인상을 구기고 있었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못하고 결국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네 말이 맞다.』
[…또 헛소리 할 거면…!]
『아, 진짜라고! 네놈이 그동안 협조적이었던 건 사실이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메마른 바다를 메우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작업이다. 그게 어디 하루 이틀 정도로 달성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엘릭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럼 얼마나 더 이런 생고생을 해야 하는 겁니까?]
엘릭은 많이 바라지도 않았다.
메피스토가 완전히 힘을 되찾는 건 언감생심 꿈꾸지도 않았다. 아니, 그건 바라지도 않았다. 그래서야 본말전도, 세상에 해악만 풀어놓을 뿐이니까.
그래도 이만큼 아까운 걸 먹어치웠으면 한 사람의 분은 해야 하지 않겠나.
『그래도 이제 바다로 흘러들어오는 강의 물꼬도 트고 그랬으니 회복 속도가 점차 빨라질…!』
[혓바닥이 너무 깁니다. 짧게.]
『오늘 잡은 것과 마찬가지로 오십여 놈 정도…?』
엘릭의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아, 아니. 스무 놈? 열다섯 놈? 그 정도면 어떻게든…!』
[미친 거 아냐? 지금 세상에 남은 마왕도 열 명이 안 넘겠구만!]
이 양반이 지금 시대가 대마전쟁 때인 줄 아나!
그때 줄줄이 죽어 나간 마왕이 몇 명인데!
『그럼 열 명 정도라도…?』
메피스토가 엘릭의 눈치를 슬쩍 살피면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지만, 엘릭의 도끼눈은 도저히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거 진짜 식충이네!]
* * *
『…그래서. 겨울의 그놈들을 만난 건 어떻게 되었지?』
엘릭이 자신과 연대하기로 했던 약조를 깰 것 같은 분위기를 보이자, 다급해진 메피스토가 이런저런 설득을 시도한 끝에야 겨우겨우 변심을 막을 수 있었다.
그래도 엘릭의 뿔난 얼굴은 도저히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아 슬쩍 눈치를 살피면서 질문을 던졌다.
그는 엘릭이 명상에 잠겨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얼추 짐작하고 있었다.
엘릭은 여전히 ‘이 식충이를 어쩌면 좋지?’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래도 그 덕분에 그리고리와 관련된 정보를 많이 받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에 일단 꾹 참고 넘기기로 마음먹었다.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되겠어요?]
『절반 정도만 수확이 있었던 모양이군.』
[뭐가 그렇게 까다로운 양반들인지, 어휴.]
엘릭은 그들과 나눴던 대화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우리가 고작 얼굴이나 한번 보자고 너를 여기까지 부른 건 아니고.
-…?
-용란(龍卵, 용의 알) 받았지?
-그렇습니다만.
-그거 우리도 좀 연구해보면 안 되냐?
-….
-안 돼?
겨울 6장이 엘릭을 보고자 했던 건 사실 달라진 그를 본격적으로 인정하기로 마음을 먹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물론, 이제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 그를 조금은 대등한 선상에서 놓기 시작한 건 사실이었지만, 여전히 그들의 눈에 엘릭은 못 미더운 구석이 적잖게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불렀던 이유는 하나.
엘릭에게 용의 알이 굴러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세 개나.
-게다가 그 귀중하다는 용의 사체도 얻었고. 오토 한이 해내지 못한 걸 얘가 해내네?
-확실히 별의 점지는 이놈에게로 향하고 있는 게 맞다니까?
-그거 솔직히 좀 반은 사이비….
-닥쳐줄래?
-아, 다들 좀 시끄럽고! 다시 본론만 얘기해서.
-용란 깨울 자신 없지?
-우리가 도와줄게.
-여기 꽤 괜찮은 마법사가 있거든.
그때 그림자로 가려진 옥좌에서 두 번째로 모습을 비춘 이가 있었다.
겨우 150센티미터나 될 법한 작은 키를 한 여자였다. 뒤집어쓰고 있던 로브 자락이 바닥에 질질 끌릴 정도라, 거구를 가진 나하트람과는 상반되는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오토 한이나 나하트람 때와 마찬가지로, 엄청난 압박감을 주는 존재이기도 했다.
-나. 너, 가르쳐.
‘얼음꽃’, 미아.
겨울 6장 중에서 가장 마법에 깊게 통달했다던 존재가 도와주겠다고 나선 것이다.
가문 내에 남은 설화만 되짚어봐도, 그녀가 있는 자리에는 항상 폭풍이 휘몰아쳤다고 기술되어 있었다.
또한, 가문 내에서는 수많은 가솔을 가르쳤던 스승이기도 했으니.
오토 한이 가전 마법의 체계를 잡았다면, 미아는 그 세부 내용을 채운 장본인이라 할 수 있었다.
-너, 미아한테 배우는 게 얼마나 복 받은 건지는 아냐?
-옛날에는, 어? 목소리라도 한 번 들으려고, 어? 산 한 바퀴를, 어?
-고대 지식에도 아주 깊게 통달해 있으니 용혈을 제대로 다루는 법은 물론, 용의 사체를 분리하고 아티팩트를 제작하는 등, 많은 작업에 있어서 큰 도움이 될 거다.
나하트람의 보충 설명에 엘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방대한 지식을 자랑했던 미아. 시조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 그녀라면 앞으로 용과 관련된 일에 있어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그리고.
나하트람이 무력(武力)에 있어 큰 도움이 된 것처럼, 미아를 통해서는 마법에서의 실력 향상을 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호오. ‘얼음꽃’이란 말이지?』
[아나 보네요?]
『알다마다. 아주, 아주아주 재수 없는 계집이었는데.』
빠드드득!
『그년 때문에 개고생했던 걸 생각하면 아직도 속에서 화딱지가…!』
메피스토의 이런 반응만큼 미아의 실력을 확실하게 파악 가능한 방법도 없을 테니까.
『그래도 확실히 천둥벌거숭이 같기만 하던 오토 한의 가신 중에서는 가장 진중하고 지식도 깊었으니 용에 관해서는 가장 잘 알겠지.』
메피스토는 팔짱을 끼며 뚱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래서? 그럼 바로 그럼 바로 얼음꽃을 이리로 부를 생각이냐?』
[아뇨.]
『음? 용의 사체부터 여기서 처리해야…!』
[그게 아니라 얼음꽃은 안 올 겁니다.]
『…?』
메피스토는 엘릭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순간.
피식!
엘릭의 입술 끝이 비틀어졌다.
『…또 무슨 사고를 쳤나보군.』
메피스토는 항상 불길함만 가져다주던 엘릭의 미소를 보면서 혀를 찼다.
-아뇨. 필요 없는데요?
미아가 나서려고 했을 때, 엘릭이 그렇게 대답했었지 아마?
[그냥 거절했어요.]
『뭐? 어째서?』
-무, 무, 뭐…?
-너, 지금 비싼 척 튕기려고 하는 것 같은데. 지금 얼마나 잘못된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알고나 있는 거냐…!
-튕기는 거 맞습니다. 비싼 척하려고 하는 것도 맞구요. 아무리 선조들이라고 하셔도, 적선하듯이 던져주시는 도움을 받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전 메르빙거의 가주입니다. 제게 정말 도움을 주고 싶으시다면, 다음부터는 예의를 갖춰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아랫사람 부르듯이 함부로 불쑥 부르지도 마십시오.
[그냥 꼴 보기 싫어서?]
『…푸하하핫! 미친놈!』
메피스토는 어이가 없다는 투로 엘릭을 봤지만, 곧 그다운 반응이라는 사실에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 시끄럽기만 하던 놈들이 네 대답에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는 아주 훤하군. 특히 얼음꽃, 그년은 아주 당혹했겠어?』
엘릭은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
확실히 얼음 조각상처럼 차갑기만 하던 미아의 얼굴이 미묘하게 틀어진 건 재미있기도 했다.
『후회 안 할 자신은 있고?』
[후회는 왜 합니까? 용 다루는 법을 아는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고.]
엘릭은 가장 먼저 지금쯤 보석룡의 둥지에서 열심히 유물을 발굴 중일 타샤를 떠올리다가, 메피스토의 눈을 직시했다.
[잘 알죠, 용?]
메피스토의 한쪽 입꼬리가 엘릭처럼 똑같이 말려 올라갔다.
거울을 갖다 댄 것처럼 똑같았다.
『도마뱀 놈들이 한창 날뛰던 시절에 가장 많이 부딪치고, 가장 많이 연구했던 게 누구라고 생각하나?』
오히려 활용 측면에서 용에 대한 지식은 메피스토가 미아보다 훨씬 더 많을 게 분명했다. 실제로 보석룡을 잡은 것도 그이지 않은가.
[어휴. 이제야 밥값 좀 하겠네. 하여간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어.]
『….』
메피스토는 그 말에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