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용아병단(龍牙兵團)
저대로 부딪치면 죽는다!
여느 때보다 가장 크게 예민해진 아귀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헤르만도 쉽게 처치하지 못했던 녀석이다. 행동은 굼뜨지만, 딱 봐도 레다보다 마기를 두세 배 이상 흘리는 녀석과 정면으로 맞부딪쳐서야 좋을 것이 없었다.
그렇기에 엘릭은 재빨리 얼음창을 뒤로 빼면서 물려야만 했다.
덕분에 벨롯이 아슬아슬하게 엘릭의 눈앞으로 스쳐 지나가고.
“너…!”
“너… 많이… 다쳤다.”
벨롯은 다시 엘릭을 노리는 대신, 흔들리는 눈을 한 레다를 우악스럽게 한팔로 안고 다시 지면을 박찼다.
콰아앙!
육탄 돌격을 시도했을 때처럼, 벨롯은 다시 몸을 거세게 밀어 전장에서의 탈출을 시도했다.
행동이 굼뜨고 느리니, 차라리 무지막지한 힘을 활용해 억지로 속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엘릭이 그런 녀석을 잡고자 얼음창을 잇달아 내질렀다.
빙열이 수도 없이 벨롯의 등판 위로 작렬했다.
쩌적!
쩌저저적!
녀석의 넓은 등판을 따라 안쪽 뼈가 훤히 드러날 정도로 깊은 상처가 생겼다.
빙독이 깊게 스며들어 상처가 덧나게 했지만, 벨롯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탈출했다.
콰앙!
쾅! 콰콰쾅!
마치 개구리가 점프라도 하는 것처럼, 벨롯은 몇 번이나 그렇게 포물선을 그리면서 빠르게 전장을 빠져나갔다.
그 속도가 얼마나 빠르고 맹렬하던지, 엘릭이 냉혹의 사슬로 아무리 붙잡아보려 해도 번번이 튕겨나거나 놓치기 일쑤였다.
결국 엘릭은 벨롯이 점이 되어 사라지는 것을 가만히 지켜봐야만 했다.
“엘릭! 내가 녀석을 쫓을 테니 넌…!”
한 박자 늦게 도착한 헤르만이 그런 벨롯의 뒤를 쫓으려 나타났다.
그 역시 벨롯이 자신과 한창 잘 싸우다 말고 갑자기 도주를 선택한 것에 적잖게 당혹해한 것 같았다.
“잠시만요. 기다리십시오.”
“왜 그러나?”
하지만 그런 헤르만을 엘릭이 붙잡았다.
헤르만이 순간 걸음을 멈췄다.
한시가 급한데 왜 서두르지 않느냐는 의문.
그러다 그는 갑자기 바닥에 주저앉는 엘릭을 보면서 눈을 크게 떠야만 했다.
“우웨에엑!”
엘릭의 안색이 갑자기 창백해지더니 바닥에다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
“자, 자네…? 괜찮나?”
헤르만은 그제야 엘릭이 부상을 숨기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여태껏 엘릭이 아무렇지 않게 계속 싸울 수 있었던 게 이상한 일이었다.
레다와 몇 번이나 격전을 벌이고, 그 와중에 용의 사념을 읽으면서, 드래곤 하트를 섭취하여 용마인으로의 진화까지 시도했다.
어디 그뿐인가. 휼의 사념체가 마음대로 날뛸 수 있게 마력까지 계속 제공해야만 했으니.
심력과 체력, 두 개 모두 바닥이 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건, 도저히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을 정도로 전쟁 상황이 격변하고 있어서였으니.
하지만 그마저도 한계에 부딪히자, 레다를 뒤쫓는 것을 포기한 것이다.
쿠드득, 쿠득-
콰드드득!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의 육체는 계속 변화하고 있었다.
끔찍한 고통을 동반하며, 체력도 상당히 좀먹어가면서.
그나마 다행인 건, 엘릭이 토해낸 피는 전부 붉은 선혈이 아닌 검은 사혈이었다는 점이었다.
죽은 피라는 뜻.
토혈을 마치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그래도 어느 정도 안색이 돌아와 있었다.
그래도 지친 기색은 역력했지만.
“우선… 전장부터 수습해주십시오. 저쪽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헤르만은 엘릭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걸려 있는 것을 보고, 자신도 따라서 웃고 말았다.
아무래도 엘릭이 두 마왕을 그냥 보낸 데에는 다른 꿍꿍이도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럼 그렇지.’
엘릭이 한 번 점찍은 먹이를 놓칠 사람이 아니지.
그렇다면 지금은 그의 말을 들어야만 했다.
“알겠네. 마무리하고 오지. 잠시 쉬고 있게.”
헤르만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마왕들은 패퇴했다-! 쓸데없는 저항을 계속할 시 모두 사살하되, 투항한다면 안전을 보장하겠다!”
마력을 실은 그의 사자후가 얼마나 크던지, 전장 곳곳으로 헤르만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마, 마왕 님들이 정말 다 떠나셨다고…?”
“말도 안 돼! 개수작 부리지 마라, 인간!”
“하, 하지만 너도 조금 전에 봤잖아. 벨롯 님이 레다 님을 안고 사라지시는 거…!”
“제기랄!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마족 진영은 삽시간에 혼란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여태껏 자신들에게 명령을 내려주던 두 마왕이 후퇴나 철수 명령도 제대로 내려주지 않은 채 튀어버렸으니까.
지휘 체계가 완전히 붕괴하고 만 것이다.
몇몇은 어떻게든 저항을 시도하려 했다. 투항한다고 한들, 인간들이 자신들을 살려둘 거라고 생각하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제국군은 살려둔다고 해도, 성역을 짓밟히고만 보르푸르 족이 절대 그들을 내버려 두지 않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막상 항거하고자 해도 제대로 된 지휘관의 통솔도 없이 조직적으로 포위망을 형성하고 달려드는 제국군을 당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거기다 헤르만과 세일러가 빠르게 합류하면서 마족 진영은 삽시간에 허물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거기 어디에서도.
마족들의 사체를 보면서 신나게 날뛰어야 할 휼의 사념체를 찾아볼 수 없었다.
* * *
『몸이 완전히 걸레짝이 다 되어버렸군.』
메피스토가 팔짱을 낀 채로 다가와 피식 웃었다.
엘릭은 대답할 힘이 없다는 식으로 손사래를 쳤지만, 입가에 어렸던 미소는 좀 더 또렷해져 있었다. 권능도 모두 중단되어 나하트람의 빙의도 해제된 상태. 그가 입을 열었다.
[그놈들, 길 안내는 제대로 해주겠죠?]
『안 해주면 어쩌려고? 그렇게나 큰 부상을 입은 놈들이 갈 수 있는 곳이라고 해봤자 결국 한정되어 있지.』
엘릭은 그냥 무방비로 레다를 놓친 게 절대 아니었다.
벨롯이 뛰어들 때, 그 짧은 순간 동안 레다를 이 자리에서 완전히 처치하기란 불가능하다고 예상했던바.
그래서 도중에 작전을 바꿨다.
놈들을 그냥 풀어주는 대신, 어디로 이동하는지를 확실하게 파악하기로.
마지막에 벨롯의 등판에다 작렬시켰던 빙열. 그 속에는 놈들의 행적을 좇을 수 있는 마력 수신 단말이 심어져 있었다.
심안이 말하고 있었다.
녀석들은 현재 북서쪽으로 빠르게 달아나는 중이라고.
『미끼를 풀어두는 건 좋은 생각이긴 한데, 그 재수 없게 생긴 쌍칼은 계속 이대로 내버려 둘 생각이냐? 다음에 만났을 때는 짜증 날 일이 이만저만이 아닐 텐데.』
한평생 군주나 지배자로 살았던 존재들이 한 번 크게 꺾였을 때, 보이는 반응은 크게 두 가지였다.
그냥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거나, 아니면 심기일전의 기회로 삼아 더 높이 날아오르거나.
메피스토가 봤을 때, 레다는 후자였다.
여태껏 그리고리라는 우산 아래에 승승장구하기만 한 우물 안 개구리였다지만, 세상에 더 넓은 하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더 높이 뛰어오를 수 있는 놈이었다.
그러니 이번 부상을 치료하고 다시 나타났을 때, 아주 귀찮은 걸림돌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미쳤어요?]
엘릭은 메피스토의 우려를 가볍게 코웃음 치는 것으로 답변했다.
[미끼는 미끼고, 설마 이미 다 잡아놓은 걸 내가 그냥 놓아주게?]
『역시. 뭔가를 해뒀군.』
메피스토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역시 그리고리의 가장 큰 불운은 하필 엘릭이 현역으로 활동하는 시절에 부활을 시도했다는 게 분명했다.
* * *
쾅!
쾅!
이제 더 이상 아무도 뒤쫓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벨롯이 여전히 지면을 거세게 박차면서 빠르게 이동 중이었다. 발을 굴릴 때마다 족히 산등성이 하나씩을 뛰어넘고, 지반이 내려앉은 자리에서는 모래 기둥이 높이 치솟았다.
“놔! 놓으란 말이다! 메르빙거가! 아직 메르빙거가 저곳에 있단 말이다!”
“지금 네 상태… 안 좋다…. 일단… 복귀부터… 한다.”
벨롯은 레다의 명령을 전혀 듣지 않았다.
놓으라며 이리저리 그를 밀어내봤자, 평상시에도 힘으로는 당해낼 수 없는 녀석에게 고작 다친 몸으로 저항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제기라아아알!”
그 때문에 레다는 분통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가 바라던 것은 절대 이런 초라한 모습이 아니었다.
용의 심장을 들고, 위풍당당하게 본단으로 복귀하는 것. 영광된 승리만을 누비는 것. 그리하여 아자젤의 왕관을 물려받는 것. 그것만이 그가 그리던 미래의 모습이었건만.
지금의 상태로는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죽여버린다… 죽여버리겠다, 메르빙거…!”
그 때문에 레다는 자신에게 이런 굴욕을 안긴 엘릭의 얼굴을 몇 번이고 곱씹었다.
다음에 만났을 때는 어떻게든 이 수모를 갚아 주리라. 그렇게 몇 번씩이나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나니 조금씩 흥분이 가라앉혀졌다.
여전히 분노의 불씨는 마음 한편에 남아있었지만, 그렇다고 이성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다른 걱정이 뭉게뭉게 피워 올랐다.
“…이 꼴로 되돌아간다면 제사장 님께서 화를 많이 내시겠군.”
그냥 화를 내는 정도로 안 끝날 공산이 컸다.
분명히 징계가 따를 것이다.
아자젤의 부활에 있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드래곤 하트를 놓쳐버린 이상, 그 죄는 더할 나위 없이 아주 큰 중죄라 할 수 있었으니까.
거기다 그들에게 딸려준 군사들까지 전부 잃은 것을 감안한다면….
하지만.
그런 것보다 정작 레다의 심기를 더 자극하는 건 따로 있었다.
‘…라피스 라줄리, 그년들에게 두고두고 씹힐 것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짜증이 치미는데.’
그 두 쌍둥이는 절대 같은 주교가 공을 세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자신들이 즐길 만한 재밋거리를 원할 뿐.
그리고리의 비원이나 이상 따위는 관심도 없었다. 위대하신 아자젤의 분신이라기보다는 저 해괴망측한 난교의 릴리스가 더 잘 어울릴 것들인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 무시를 당한다는 것이야말로 가장 굴욕적이라 할 수 있는 일.
이 때문에 레다는 몇 번이고 생각을 바꿔야만 했다.
‘차라리 이대로 본단으로 돌아가지 않고, 놈들이 방심하기를 기다리는 것은…?’
레다는 슬쩍 벨롯을 바라봤다.
이놈은 한 번 각인된 생각을 좀처럼 바꾸는 법이 없다. 그래서 설득하기가 아주 어렵지만, 한 번 설득에 성공하고 나면 아주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그래서 그에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려는데.
미안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은데?
갑자기 귓가를 울린 목소리.
레다는 허리를 쭈뼛 세웠다.
“왜… 그러나…?”
“너 조금 전 무슨 말 못 들었어?”
“무슨… 소리…?”
벨롯의 반문에 레다는 안색을 딱딱하게 굳혔다.
기력이 쇠한 나머지 환청이라도 들은 걸까. 분명히 그 이상하게 생겼던 그림자 짐승의 목소리를 들었던 것 같은데…?
그래도 좀처럼 진정이 되질 않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감각도 다시 세워봤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질 않았다.
‘헛소리를… 들은 건가.’
메르빙거에게 너무 당한 나머지 노이로제라도 걸린 모양이었다. 그놈과 관련된 목소리가 들린 것을 보니.
사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본다면, 엘릭에게 묶여있던 휼이 한참 떨어진 이곳에 나타날 리가 없….
내가 버러지라고 말했었지?
그 말 그대로 돌려주지.
하지만 레다의 생각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크와아앙!
지면에 깔려 있던 레다의 그림자에서부터 휼의 사념체가 불쑥 나타났다.
그리고.
콰직!
레다의 오른쪽 날갯죽지에 그려져 있던 유명의 인장을 크게 물어뜯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