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언령(言靈) 혹은 언령(言令)
“말도 안 되는…!”
캘리거 백작은 엄청난 마력풍을 쏟아내는 엘릭을 보면서 기함하고 말았다.
엘릭이 수호룡에 정신이 팔린 동안 기습해야겠다는 생각만으로, 몰래 마법으로 땅까지 파면서 여기까지 온 것이건만.
도저히 뒤를 노릴 만한 타이밍이나 허점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기습을 하려면 그만큼 ‘단번에’ 엘릭을 노릴 수 있어야만 했다.
그렇지 않는다면 자신이 엘릭에게 되레 당할 가능성이 컸으니까.
하지만.
저렇게 거친 마력풍을 뿜어내는데 일단 기습을 할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었다.
시도하려 한다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캘리거 백작은 성공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빈틈을 노리려 했지만, 이제는 완전히 눈까지 떠버렸다.
거기다 드래곤 하트까지 먹은 상태.
그 역시 대마도사 출신이기 때문에 저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짓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드래곤 하트는 마법 학계에서도 대대로 전설처럼 전해지는 영약. 아니, 신약(神藥).
그것을 먹었다면 가뜩이나 저 인간 같지 않은 것이 더 인간 같지 않게 변할 게 틀림없었다!
보라!
지금도 드래곤 하트를 완전히 소화한 것이 아닐 텐데도 불구하고, 단박에 마왕의 한쪽 날개를 뜯어버리지 않았는가!
쾅!
콰콰콰-
엘릭은 저 높은 허공으로 튕겨 나는 레다에게로 몸을 날렸다.
그가 뛴 자리에서 일어난 마력풍은 이제 눈보라로 변해서 얼음 가루가 사방으로 날릴 정도였다.
“감히… 감히이이이!”
“감히는 무슨. 뒈지려고.”
레다는 노호성을 터뜨리면서 어떻게든 엘릭을 밀어내려 했지만, 엘릭은 도리어 코웃음을 치면서 레다를 맞받아치고 있었다.
얼음창을 휘두를 때마다 마치 천둥이 치는 것 같은 엄청난 굉음이 터져 나왔고, 이와 함께 쉴 새 없이 불어 닥치는 눈보라에 제아무리 레다라 해도 속수무책으로 계속 밀려나는 게 눈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도저히 캘리거 백작으로서는 따라잡기도 힘들 것 같은 무위.
눈 깜짝할 새에 엘릭은 정말이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것만 같았다.
특히 그가 한 마디 한 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풍겨 나오는 기세는 대기 자체를 진동케 했으니.
드래곤 피어(Dragon Fear).
용이 살아있을 시절, 만물을 저절로 떨게 하고 고개를 조아리게 만들었다던 기세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캘리거 백작도 엘릭이 둥지에 남긴 드래곤 피어로 인해서 살짝 몸을 떨고 있었다.
‘저걸… 대체 어떻게 잡아야 하지…?’
엘릭은 호랑이였다. 하지만 드래곤 하트는 그 범에다 날개를 달아준 격이 되고 말았으니.
캘리거 백작은 자신이 어떻게 손을 쓰기도 전에 너무나 크게 벌어진 격차에 주먹을 꽉 쥐어야만 했다.
이제 어떻게 엘릭을 잡아야 할지 감도 오질 않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캘리거 백작을 충격으로 빠뜨린 것은.
저 정도 기세라면 캘리거 백작이 근방에 있는 것을 이미 느꼈을 텐데도 불구하고, 이쪽으로는 시선을 주지도 않았다는 점이었다.
애당초 자신 따위는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다는 뜻일 테지.
‘저래서야 마왕과 싸우는 와중을 노리지도 못하지 않은가.’
정말이지 이대로 정말 손을 놓은 채로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해야 하는 걸까.
무력감에 캘리거 백작이 몸을 잘게 떨던 그때.
우우우웅-
그는 갑자기 발밑이 살짝 진동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주 미세한 떨림.
‘뭐지?’
처음에는 엘릭이 남긴 드래곤 피어 때문에 지반에 여진이 남은 것인가 싶었지만.
자세히 느껴보니 그런 떨림과는 종류가 달랐다.
혹시 자신이 감지하지 못한 가디언이라도 있는 건가 싶어서 인지 영역을 아래쪽으로 더 넓게 펼쳐 봤다.
그러자 텅 빈 공간이 느껴졌다.
‘숨겨진 다른… 방?’
캘리거 백작은 본능적으로 그곳에 뭔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따금 발굴되는 용의 둥지에는 간혹 보물을 숨겨둔 방이 있지 않던가.
일반 금화나 보석뿐만 아니라, 고대의 비밀을 품은 마법 서적이나 아티팩트 등을 보관해둔 방.
그 때문에 학계에서는 용이 보물 수집욕이 있지 않았나 하고 추측할 때도 많았다.
그렇다면.
수호룡도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잖은가…?
‘비록 엘릭 메르빙거는 해치우지 못하더라도, 차라리 이런 것이라도 챙길 수 있다면.’
어차피 이대로 있다간 시기에만 차이가 있을 뿐, 자신의 몰락은 당연한 수순이 될 것이다.
하지만 훗날을 기약할 수는 있잖은가.
로데오를 비롯한 자식들에게 새롭게 재기할 기회를 주려면, 그만한 보물이 필요할 것이다.
인터레시아가 있긴 하지만, 이걸로는 부족했다.
결국 캘리거 백작은 뭔가를 크게 다짐하고, 마력을 가득 실은 채로 발을 세게 굴렸다.
“【폭발하는 천둥】.”
콰아아앙!
그러자 토사가 저절로 아래쪽 공동으로 쏠리면서 전혀 새로운 방이 나타났다.
캘리거 백작은 조심스레 그쪽으로 몸을 날렸다.
사람 하나 겨우 들어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아주 좁은 방.
기대했던 것과 달리 이렇다 할 보물을 보관해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캘리거 백작의 시선은 방에 들어왔을 때부터 한 곳에 집중되어 있었으니.
방의 가장 깊숙한 안쪽에 위치한 큰 상자 하나가 거칠게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게 대체 뭐지?’
잘게 떨리는 상자에서 풍기는 기세가 제법 강렬했다.
어쩐지 드래곤 피어를 닮은 것 같았다.
캘리거 백작은 순간 수호룡이 쓰던 폭발물이 들어있나 싶어 잔뜩 긴장했지만.
그래도 일단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방어 마법을 여러 겹이나 캐스팅 한 채로, 상자의 뚜껑을 활짝 열었다.
철컥!
그리고 그는 볼 수 있었다.
“이건…!”
곱게 깔린 비단 방식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세 개의 화석 알을.
그것이 용의 알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본 캘리거 백작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 * *
“어떻게 이런…!”
레다는 왼쪽 어깨를 찔러오는 창날을 겨우 튕겨내면서 이를 악물었다.
공세는 막을 수 있었지만, 그는 자꾸만 무거워지는 몸 때문에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찌어찌 공격을 막아낸다고 하더라도, 충격파와 함께 터져 나온 눈발은 계속 그의 몸뚱이에다 거친 상처를 남겼으니까.
분명히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에게 별다른 타격을 주지 않았던 눈발에 불과하건만.
지금은 그 속에다 일일이 마력이라도 잔뜩 심어두는 것인지,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이 많은 눈발과 얼음 가루를 전부 마기로 쳐낼 수도 없잖은가!
특히 틈틈이 체내로 들어오는 빙독은 계속 레다의 움직임을 굼뜨게 만들었다.
눈발이 주는 추위도 추위였지만, 병장기가 부딪칠 때마다 손끝을 타고 흘러드는 오한 속 냉기(冷氣)가 자꾸만 그를 미치게 했다.
아무리 마기로 방어해 봐도 여전히 손끝이 얼얼하고, 뼛속까지 전부 얼어붙는 것 같았다.
언제부터인가는 몸의 감각도 점차 무뎌져만 갔다.
‘빌어먹을 드래곤 피어…!’
레다는 그것이 용이 자랑하는 ‘기세 속에 섞인 힘’이라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용은 본능적으로 자신들의 행동 하나하나, 숨결 하나하나에도 마력을 실을 줄 아는 종족이었으니까.
엘릭도 그런 것을 ‘직감적으로’ 터득해 나가는 중인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레다를 더욱 미치게 만드는 것은.
“나를… 시험대로 삼아…?”
엘릭이 그를 몰아붙이면 몰아붙일수록 계속 강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뭐랄까?
마치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던 자신의 힘을 빠르게 습득해 나가는 중이라고 해야 할까?
드래곤 피어의 사용법을 깨달은 것과 마찬가지로.
용혈이 주는 여러 가지 힘을 빠르게 확인하고, 그것을 레다에게 시험해 보고 있는 것이다.
바닥에 깔리는 빙판하며.
레다의 몸뚱이에다 자꾸만 상처를 새기는 눈발.
그리고 거칠게 내지르는 일격까지.
휘휘휘휘!
조금 전까지만 해도 레다가 일방적으로 엘릭을 몰아붙이던 것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었다.
물론, 그것이 엘릭이 정말 마왕을 압도할 만한 힘을 가졌기에 생긴 결과는 아니었다.
잘도 한눈을 파는구나!
콰직!
엘릭의 공격을 겨우 밀어냈다 싶으면, 빈틈을 노리고 사각지대를 노리는 휼 사념체의 공세도 있었으니.
어느새 크기도 작게 축소한 녀석의 이빨이 어깻죽지를 거세게 물어뜯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 뒤에는.
쐐애액-
콰아아앙!
여지없이 세일러가 던진 투창이 그대로 작렬하면서 몸뚱이에다 상처를 크게 만들었다.
사실 세일러만 하더라도 도저히 승부를 장담하기 어려운 존재건만.
여기다 다른 두 녀석까지 득달같이 달려드니 레다로서는 정말이지 죽을 맛이었다.
“오오! 이래도 사는군? 오늘 정말이지 원 없이 창을 던져보는데 그래?”
마치 이 순간이 아주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세일러가 켈켈 거리는 웃음소리가 레다의 귓가에 꽂혔다.
‘이것들이… 이것들이 나를 우롱해…?’
레다는 피투성이 몰골이 된 채로 눈가에 핏줄이 잔뜩 섰다.
지금 겪는 이 모든 것들이 그로서는 굴욕적이기 짝이 없었다.
눈을 떴을 때부터 아자젤의 그릇이란 정체성을 가지고 있던 그가 아니던가.
당연히 그는 그리고리 내에서도 항상 지배자의 입장이었고, 손가락을 까닥거리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쉽게 이뤄졌다.
더군다나 그만큼 뛰어난 재능도 지니고 있어, 제사장의 신임도 받아왔으니 여태 거칠 것이 없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야말로 아자젤이 내려앉을 완벽한 환생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유다? 그런 반편이와 비교한다면 자신이 쪽팔렸다.
벨롯? 힘만 센 멍청이지 않은가.
라피스와 라줄리? 자신들의 쾌락과 이익만을 좇는 그 머저리들은 결코 아자젤을 수용할 만한 그릇이 될 수 없었다.
그러니 자신이었다.
광기의 왕관을 쓸 만한 자격을 지닌 건 자신 외에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그런데 왜…!
퍼퍼퍼펑!
레다는 허벅지를 강하게 휩쓸고 지나가는 창날에 이제는 낯설기만 한 새로운 감정을 느껴야 했다.
분명히 눈에 확연히 보이는 궤적인데도 불구하고, 피할 수가 없었다.
마기를 너무 많이 흘리고, 빙독이 몸을 좀 먹어가면서 몸이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전신을 엄습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엘릭은 레다의 그런 빈틈을 절대 놓치지 않았다.
‘된다. 내 공격이 먹혀.’
엘릭에게 있어서는 바로 그 사실이 가장 중요했다.
이제 레다와 대등한 접전을 이룰 수 있다는 것.
여태껏 별다른 충격도 주지 못하고 튕겨났던 것과 다르게, 이제는 그를 죽일 수 있다는 아주 대단한 가능성을 얻어낸 것이었으니까.
그만큼 용혈이 주는 힘은 대단했다.
콰드득, 콰득-
우드드득!
지금 이 순간에도, 용혈은 빠르게 신체 곳곳을 누비고 다니면서 신체 조직을 빠르게 변화시키고 있었다.
조금 전에 내지르던 창과 지금 내지르는 창. 불과 한 호흡의 차이인데도 불구하고, 그 속에 실린 기세는 엄청난 격차가 있었다.
거기다 마력의 수발은 왜 이렇게 자연스러운 건지.
이전에는 일일이 마력 순환을 지정하고 마력장을 설정해야만 했다면, 이제는 그저 ‘의지’만으로도 마력이 아주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그것이 아주 당연하기라도 한 것처럼.
의념(意念, 뜻과 의지)을 담을 수 있다는 것.
그렇게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마력을 끌어낼 수 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언과 언령, 두 가지의 가장 큰 차이점인 것 같았다.
‘이제 끝내자.’
엘릭은 이왕에 승기를 잡은 것,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레다를 완전히 잡기로 마음먹었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올지 알 수 없었으니까.
‘몸도 이제 슬슬 한계야.’
용혈이 힘을 무한정 쥐여주고 있지만, 반대로 체력과 정신력은 빠른 속도로 닳고 있었다.
신체를 제어하는 것만 해도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도와주마.」
그의 의지를 읽은 건지, 빙의된 나하트람도 새로운 창식(槍式)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엘릭은 그것이 헤르만과 푸른 매로부터 배웠던 <보라매의 기상> 중 ‘부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를 둘러싼 수많은 결이 소용돌이를 그리면서 창끝으로 몰리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오른발로 지면을 세게 찍으면서 얼음창을 앞으로 내찔렀다.
빙열(氷裂)!
쩌저저적-
퍼어어엉!
“안…!”
레다의 머리통 중 절반이 얼어붙었다가 부서지며 폭죽처럼 허공에 튀어 올랐다.
엘릭이 마무리를 위해 재차 빙열을 터뜨리려는 순간.
『피해라!』
메피스토의 다급한 외침이 갑자기 들렸다.
쐐애애액-
벨롯이 공성 병기가 내던진 바위처럼 이곳으로 육탄돌격을 감행하고 있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