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언령(言靈) 혹은 언령(言令)
“짜증나는군.”
레다는 청사자나 회사자와 충돌하기 시작한 거구의 마왕을 탐탁지 않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마왕 벨롯.
유다, 라피스, 라줄리와 마찬가지로, 아자젤의 강림을 위한 그릇으로 만들어진 주교였다.
하지만 유다가 실패작으로 분류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벨롯도 실패작에 해당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너무 강해서.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너무 많은 마력 때문에 육체와 정신 간의 불일치가 빈번하게 이뤄졌고.
그 때문에 벨롯은 다른 주교들에 비해 사고력이나 행동력, 두 측면에서 모두 굼뜨게 되어버렸다.
아자젤이라는 ‘거대한 정보’를 수용하기에는 지능이 모자랐던 것이다.
그래도 조직에 대한 충성심 하나만큼은 확실한바.
주교로 활동하기에는 충분했기 때문에 이따금 바깥으로 보내질 때가 많았다.
하지만 레다는 벨롯과 같이 다니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저렇게 느리고 굼뜬 녀석을 데리고 뭔가를 하려면 신경을 써야 할 게 한, 두 가지가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그는 어쩔 수 없이 녀석과 같이 나서게 되더라도, 그냥 버려두고 먼저 훌쩍 떠날 때가 많았다.
목적지는 말해주었으니 따라오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그럼 벨롯이 도착할 때쯤에는 레다가 이미 모든 임무를 해치우고 난 다음이었다.
하지만 멍청한 벨롯은 레다가 자신을 놀리는지도 모르고, 임무가 다 끝났다는 말에만 기뻐하면서 다시 본단으로 되돌아갈 뿐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
둥지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했으니 심장을 가져오라는 말에 레다는 벨롯을 두고 그냥 움직였다.
어차피 다 죽어가는 용 한 마리를 사냥하는 것이 뭐가 어렵겠냐는 생각이었다.
아니, 그보다는 여태 그 존재에 대해 이야기만 들었을뿐, 현 시대에는 멸종하고 없다던 용을 혼자서만 상대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더 강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용과 노는데(?) 시간을 너무 많이 허비한 모양이었다.
벨롯이 저렇게 나타나서는 큰소리를 뻥뻥 쳐대고 있었으니까.
“용… 사냥… 너무 느려…. 내가… 대신 한다….”
벨롯이 말을 내뱉을 때마다 입과 코에서 마기가 김처럼 마구 풀풀 휘날렸다. 그만큼 엄청난 양의 마기를 품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마 절대적인 마력의 양만 따지자면 레다보다 두세 배는 많지 않을까?
벨롯이 괜히 주교들 사이에서도 ‘괴물’로 통하는 게 아니었다.
헤르만과 세일러도 그 기세를 느꼈는지, 말을 달리던 것을 멈추고 무기를 강하게 움켜쥐고 있었다.
“손대지 마라. 저것은 내 것이다!”
레다는 저 아래에 보이는 벨롯을 보면서 인상을 팍 찡그렸다.
입술 사이로 송곳니가 확 드러났다.
허튼짓을 하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투.
아군이라고 해도 절대 봐주지 않겠다는 살의가 잔뜩 보였다.
“그럼… 빨리… 잡았어야… 지.”
하지만 벨롯은 별반 개의치 않고 움직일 뿐이었다.
콰아아앙!
벨롯이 한껏 몸을 움츠렸다. 워낙에 덩치가 덩치다 보니 아무리 몸을 숙여봤자 일반인들보다는 훨씬 컸지만, 그래도 마치 동산 하나가 살짝 작아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녀석이 지면을 거세게 박차면서 추진력을 얻는 순간, 이야기가 달라졌다.
화포에서 발사되는 포탄이 되듯이, 그 거대한 몸뚱이가 둥지가 있는 방향으로 빠르게 내달렸으니까.
벨롯이 아주 느린 사고 판단력을 지녔다고 해서 정말 멍청해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만큼 정확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었다.
몸이 움직이기에 너무 무겁다면, 그것을 강제로 튕겨버리면 그만이지 않은가.
쐐애애액-
벨롯이 지면 위를 질주하는 모습은 동산이 통째로 움직이는 것 같은 엄청난 위압감을 선사했다.
저 앞에 놓인 건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모조리 부서질 것 같았다.
“영감님, 이쪽은 내가 맡겠소.”
헤르만은 세일러의 대답을 굳이 듣지 않고 나섰다.
파앗-
벨롯이 달리는 궤적 앞으로 청색 갑옷을 입은 헤르만이 순간 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나타나고.
차아아앙!
선명한 청색 오러가 잔뜩 뭉친 검이 벨롯과 충돌했다.
콰아아앙!
콰릉! 콰르르르-
충격파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두 사람이 충돌한 지점에서 먼지구름이 미친 듯이 치솟았다.
동시에 부서진 마기 폭풍과 오러 파편이 사방으로 흩뿌려지는 가운데.
“너… 누구…!”
“누구긴. 오늘 여기서 그대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사자지.”
“비켜…. 비키지 않는다면… 죽는다…!”
화아악!
벨롯이 이쪽으로 손을 뻗었다. 마치 눈앞을 어지럽게 만드는 하루살이를 치워버리기라도 하려는 투. 그 앞에서 헤르만은 너무 왜소하게 보였다.
괴력(怪力).
녀석의 가슴팍에 걸쳐 아주 넓게 새겨진 인장이 칙칙하게 빛나고 있었다. 반대인 등 쪽에서는 주교를 상징하는 인장이 빛나면서 양면으로 서로 다른 인장이 공명(共鳴)했다.
“이거 아무래도 만만치 않겠는데.”
헤르만은 그런 녀석을 보면서 가볍게 혀를 찼다.
보르푸르 족의 바투라는 놈도 그렇고, 이번에는 마왕까지.
왜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놈들이 갑자기 이리도 많이 쏟아지는지 당최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말투와 달리, 그의 두 눈은 형형히 빛나고 있었으니.
새로운 대적자를 만나게 되었다는 짙은 호승심이 빚어낸 결과였다.
콰릉, 콰릉, 콰르르르!
콰콰콰콰-
청사자와 마왕.
다른 곳에서 절대 쉽게 볼 수 없을 것 같은 엄청난 격전이 치열하게 벌어지는 동안.
“실례함세.”
세일러 역시 레다가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잿빛으로 빛나는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면서 움직이는 노장(老將)의 모습은 나이가 아주 무색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레다는 벨롯에게 던지던 시선을 이쪽으로 돌려야만 했다.
회사자는 그 역시 함부로 여길 수가 없는바.
마기를 잔뜩 응축시킨 칼바람을 이쪽으로 돌리려는데.
내 것에 함부로 손대지 마라!
별안간 휼의 사념체가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레다에게 달려들었다. 마치 자신의 먹이를 다른 놈에게 빼앗길 수는 없다는 듯.
콰콰쾅!
콰아앙-
졸지에 둘을 동시에 맡게 된 레다로서는 황급히 칼바람을 두 개로 찢어야만 했다.
“이것들이, 끝까지…!”
두 공격을 겨우 막아낸 뒤. 레다는 인상을 팍 찡그리고 말았다.
기분 좋게 사냥을 하러 왔다가, 되레 사냥을 당하게 된 입장으로서 이번 상황은 상당히 짜증이 많이 날 수밖에 없었다.
완전히 일그러뜨린 얼굴은 이제 실핏줄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팽팽하게 부풀었다.
분노가 이성을 잠식해나갔다. 눈앞에 있는 것들을 어떻게든 처치하지 않으면 도통 이 분이 풀리질 않을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잠깐만.’
불안감이 등골을 엄습했다.
‘메르빙거는 어디 갔지?’
괴상한 그림자 짐승과 두 사자, 그리고 벨롯까지 얽히면서 정신이 없긴 했다지만.
그래도 이럴 때 가장 크게 날뛸 것 같은 당대 메르빙거의 가주가 보이질 않았다.
저 무너진 동굴에 생매장되어 죽었나?
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애초에 고작 그따위에 죽을 놈도 아닌 데다가, 이 그림자 짐승이 아직도 날뛰는 걸 봐서는 생생한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대체 어디서 뭘 하는 거지?
‘용!’
레다는 그제야 거기까지 생각이 미쳐 그쪽으로 몸을 돌리려 했다. 아니, 그러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콰르르르-
배가 고프다. 난.
배부른 게 필요해. 맛난 게 필요해.
휼의 사념체가 쉴 새 없이 달려들었다.
레다, 자신에 비하면 덩치만 클 뿐이지 터무니없이 약한 군장 급의 마족에 불과했지만.
문제는 아무리 튕겨내도 계속 달려드는 바람에 도통 다른 곳으로 한눈을 팔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녀석은 도무지 지칠 줄을 모르는 것 같았다.
팔다리가 날아가도 다시 금세 그림자로 복구시키고, 머리가 반쯤 부서져도 고통스러워하는 기색은커녕 오히려 웃기까지 했다.
마치 이 상황이 즐거워 죽겠다는 듯!
너를 어떻게든 잡아먹고 말겠다는 듯 말이다!
그래서 레다가 어떻게든 휼의 사념체를 찢어 죽이기 위해 마기를 끌어모으려 해도, 틈만 나면 사각지대를 교묘하게 노리고 세일러의 투창(投槍)이 이어졌다.
“에잉. 어쩔 수 없지. 간만에 자식들 앞에서 좀 멋있는 모습 좀 보일 수 있나 싶었는데. 지금은 이렇게라도 몸을 좀 푸는 수밖에.”
세일러는 자신이 끼어들 틈은 주지도 않는 휼의 사념체가 못마땅하다는 투로 투덜거렸지만, 그의 입은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실실 웃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크게 날뛸 것도 없이 이런 식으로 휼의 사념체에 보조만 맞추면 되었으니 크게 어려울 것이 없었던 것이다.
도리어 마왕을 이런 식으로 궁지로 몰아간다는 사실이 재미있기만 했다.
그가 내던지는 투창에 실린 오러는 실로 대단한 것이어서, 레다로서도 도저히 그냥 무시할 수가 없었다.
자칫 잘못 막았다가는 자신의 몸뚱이가 그대로 박살이 나는 수가 있었으니까.
산악민족을 최초로 통일한 바투가 누구에게서 비롯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결국.
휼의 사념체가 벌이는 주공(主攻)과 세일러의 엄호, 두 공세 앞에서.
‘대체 어떻게 해야…!’
레다로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속이 뒤집힐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럴수록 조바심은 자꾸 커져만 갔으니.
‘안 되겠다. 이렇게 내버려 둬서는 안 돼.’
결국 레다는 도중에 생각을 바꿔야만 했다.
재차 달려드는 휼의 사념체를 겨우 밀어내고, 두 날개를 활짝 펼치면서 더 높은 상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러고는 목소리에 마력을 한껏 실어 소리쳤다.
“전(全) 마군은 둥지를 약탈하라! 용의 심장을 어떻게든 내 앞으로 가져와라!”
“명…!”
“명…!”
“명…!”
마족에게 있어 계급과 신분이란 절대 항거할 수 없는 영혼의 속박이자 구속과도 같은 것이었고.
하물며 그리고리처럼 아자젤의 마군이라는 통일된 체계를 갖춘 곳은 그런 구속력이 더 강할 수밖에 없었다.
마왕이 내린 명령은 지상 최대의 과제가 되는 셈이니.
두 마왕의 싸움에 치일까 싶어 주변으로 물러나 있던 마족들이 하나 같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마치 메마른 장작이라도 된 것처럼 몸이 빳빳해진 그들은 일제히 동굴이 무너진 장소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두 눈에는 초점마저 없었다.
“아무도 저곳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으세요!”
지휘를 맡고 있던 이사벨이 다급하게 소리치자, 별의 종군도 일제히 한쪽으로 몰리면서 그들을 어떻게든 막아서고자 했다. 청사자군과 회사자군도 그 옆을 도왔다.
헤이즈는 직접 마족들 사이로 뛰어들면서 슬렛지 헤머를 빠르게 휘둘러댔다.
어떻게든 한 놈이라도 저지하기 위해서.
하지만 자신의 목숨을 도외시한 채, 오로지 무너진 둥지 쪽으로 내달리는 마족들을 전부 막기에는 손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고.
“이런…!”
헤이즈가 놓친 마족들을 발견하고 황급히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이미 몇몇은 무너진 동굴에 다다르고 있었다.
놈들은 용의 사체를 어떻게든 찾아보겠다는 일념만으로 둥지 잔해를 이리저리 치워대기 바빴다.
몇몇은 아예 구멍 사이로 머리를 밀어 넣는 위험천만한 짓까지 저지를 정도였다.
그러다 바람과 관련된 인장을 가진 마족들이 황급히 강풍을 일으키면서 잔해를 모두 치웠고.
그 아래.
아홉 겹이나 둘러쳐진 결계 아래로 엘릭과 용의 사체가 보였다.
* * *
그 순간.
엘릭이 위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쿵! 쿵! 쿵!
마족들이 결계를 어떻게든 부수기 위해 달려들고 있었다. 짓밟고, 할퀴어대기도 했다. 몇몇은 마법을 쏟아부었지만 절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릭은 놈들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 너머.
여전히 휼의 사념체와 겨루고 있는 레다가 보였다.
엘릭은 여태껏 여유만만한 모습만 보여주던 레다의 두 눈이 격하게 떨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아무래도 엘릭이 뭘 하려는지를 깨달은 모양이었다.
“어쩌나. 겨우 다 잡아놨는데, 바로 눈앞에서 코 베이게 생겼네?”
“아, 안 돼…!”
“뭐가 안 돼?”
엘릭의 한쪽 입술 끝이 비틀렸다.
“돼.”
엘릭은 손에 잡힌 용의 심장, 드래곤 하트를 그대로 뽑아 올렸다.
레다를 약 올리듯이.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