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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208화 (207/405)

208화

언령(言靈) 혹은 언령(言令)

“아버지, 걸리면 어쩌시려고 대체…!”

로데오는 주변 눈치를 살피면서 발을 동동 굴렀다.

그와 함께 있던 가병들도 안절부절못하는 건 똑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조금 전에 캘리거 백작이 잠시만 어딜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비워버렸기 때문이었다.

두 마왕이 나타나고, 전황도 급격한 혼전의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가서 아무도 이쪽을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지만.

만약 퇴각 명령이라도 떨어진다면 캘리거 백작이 부재중인 사실이 들키는 건 시간문제였다.

하물며 캘리거 백작이 향한 곳은 동굴이 무너진 곳.

휼의 사념과 레다가 한창 치열하게 맞부딪치고 있는 지역 아래였다.

또한, 먼저 엘릭이 따로 달려간 곳이기도 한데….

대체 뭘 하시려고 저곳으로 들어가신 걸까?

‘혹시 엘릭의 뒤를 치시려고…?’

로데오는 쿠란시빌 자작의 머리가 잘려나간 이후, 아버지 캘리거 백작이 계속 무언가를 노리고 있으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행여 무언가를 놓칠까 봐 초조해하시면서도, 두 눈빛만큼은 예리하게 빛내며 엘릭에게서 무언가를 찾아내고자 하셨다.

그러다 지금이 기회라고 여기고 저렇게 따라나서신 것이고.

‘부디 무사히 돌아오셔야 할 텐데…!’

로데오가 아무리 망나니 인생을 살아왔다고 해도, 캘리거 백작은 그에게 있어 하나뿐인 아버지였다.

음흉하기로 소문났던 쿠란시빌 자작도 별달리 손을 쓰지 못하고 엘릭에게 당한 것을 보았기에.

로데오의 마음속에서는 서서히 옅어지는 옛 그림자 대신 엘릭에 대한 공포가 자리를 메워가고 있었다.

그러니 부디 아버지는 쿠란시빌 자작과 비슷한 길을 걷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 * *

“뭘 그렇게 서두르나 했더니. 역시 여기서 뭔가를 발견한 게 틀림없어.”

캘리거 백작은 마법을 활용해 폭삭 무너진 동굴 아래로 갱도를 따로 파면서 움직였다.

엘릭이 본군과 따로 움직였을 때부터 알아봤지만.

역시 아무래도 여기 동굴에 뭔가가 있는 게 분명했다.

“듣기로 여기가 야만족들의 수호룡인지 뭔지가 머무는 곳이라고 했었지, 아마? 그렇다면 정말 용의 둥지일 수도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그만한 뭔가가 있겠지.”

캘리거 백작은 쿠란시빌 자작이나 다른 가병들처럼 단순히 자신들이 머무는 곳이 야만족의 터전이라며 무시하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되레 이곳으로 데려왔던 회사자 세일러가 신녀라는 야만족 여인과 친분이 있는 것을 보고, 다른 뭔가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잠깐 가졌다.

그리고 그러한 의심은 정확하게 들어맞았으니.

캘리거 백작은 이것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눈엣가시나 다름없는 엘릭을 제거하고, 모든 것을 독차지할 기회.

“혼란스러운 전투 중인 만큼 불상사가 생겨도 이상하지는 않을 테지.”

캘리거 백작은 이번 전투가 끝나면 더 이상 엘릭을 처치할 기회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엘릭을 애송이라 생각하고 있었기에, 아무리 그가 영웅이니 뭐니 날뛰어봤자 언젠가는 허점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지만.

쿠란시빌 자작이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을 보고 난 뒤부터는 생각이 완전히 180도 뒤집히고 말았다.

이쪽이 먼저 쳐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당할 테니까.’

이미 엘릭은 자신에 대한 약점을 모두 쥐고 있는 상황.

가병에 대한 실권까지 모두 빼앗긴 상태였다.

그런데 이번 전투가 끝난다?

이 뒤에는 분명히 엘릭이 이 기세를 한껏 몰아 큰 공을 세우며 본토로 돌아갈 것이 분명했다.

엘릭은 또다시 영웅으로 추앙을 받을 테고, 메르빙거의 재림이니 뭐니 하면서 다들 설레발을 칠 게 분명했다.

그런 와중에 대립각을 세웠던 캘리거 백작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는 불에 보듯 뻔한 일이었다.

‘4황자는 절대 날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크롬헬 황자는 사람 좋아 보이는 모습을 보여도, 이따금 종잡을 수 없는 면을 가진 자였다.

엘릭의 환심을 사보겠다면서 로데오의 팔까지 잘라버리지 않았었나?

그런 와중에 자신이 제라이츠 황태자를 이용하려던 것을 알게 된다면 가차 없이 내칠 것이다.

아무리 4황자 파벌 내에서 나름대로 입지를 구축했다고 해도, 크롬헬 황자는 그런 것에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니.

‘지금밖에는 없다.’

캘리거 백작은 차라리 잘 된 것인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대마전쟁이 끝난 이후, 완전히 박멸한 줄로만 알았던 마왕이 둘이나 나타난 지금.

엘릭은 그들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다.

그것만큼 확실한 기회가 또 어디에 있을까?

‘마도경식을 가져오고, 인터레시아의 남은 비밀까지 풀 수 있다면… 그래. 그럴 수만 있다면 오히려 이 모든 것이 전화위복이 될 게야.’

엘릭을 처치한 이후에 헤르만과 세일러가 어떻게 나설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건 우선 이 일부터 서둘러 끝내고 난 뒤에 결정할 참이었다.

‘그러고 보니 결국 쿠란시빌 놈의 말이 맞았던 셈인가? 그때 손을 잡고 같이 쳤더라면 일이 훨씬 수월했을지도 몰랐는데.’

코끼리가 뒷걸음치다가 쥐를 밟은 격으로, 어쩌다 보니 멍청한 놈도 뭔가 하나를 얻어걸린 셈이었다.

하지만 쿠란시빌 자작은 멍청하게 타이밍을 잘못 노리다가 당했다.

반면에 자신은 달랐다. 최소한 캘리거 백작은 그렇게 생각했다.

딸칵.

캘리거 백작은 품속에 손을 밀어 넣었다.

휘휘휘…!

그를 중심으로 날카로운 칼바람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손끝에서 마도구가 매만져졌다.

그에게 승리를 가져다줄 마도구였다.

까악! 까악!

그런 그의 뒤를 따라, 까마귀 한 마리가 조용히 따라붙고 있었다.

* * *

‘조부님이 어째서, 여기에?’

엘릭은 여기 있는 우스던의 모습에서 강한 데자뷰(Dejavu)를 느껴야만 했다.

자신보다도 먼저 40여 년 전에 꽃의 신전에 방문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는 수호룡의 둥지에서 그의 흔적을 발견하게 될 줄이야!

‘이번에도 내가 언젠가 이곳을 오리라는 것을 아시고…?’

하지만 꽃의 신전에서야 마도경식의 안배가 풀릴 걸 예측하고 오셨었다지만.

여기 이 둥지는 대체 어떻게 알고 오셨던 걸까?

정말 미래를 내다보는 ‘예지’를 갖추기라도 하셨던 걸까?

엘릭은 강하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우스던과 수호룡의 대화에 집중했다.

-메르, 빙거…!

-예. 제가 메르빙거입니다.

-드디어 왔구나! 메르빙거…!

수호룡의 목소리는 감격에 잠겨 있었다. 스스로에 대한 존재까지 잊어가면서도, 어떻게든 알을 존속시키고 말겠다는 다짐 하나만으로 비루한 삶을 겨우 살았던 그에게 있어 드디어 빛이 내리쬐게 된 셈이었으니까.

하지만 수호룡의 그러한 감격은 얼마 가지 않아 깨지고 말았다.

-하지만 전 당신이 바라시던 그 메르빙거가 아닙니다.

순간, 숨이 턱 하고 틀어막힌 게 아닌가 싶은 그런 적막이 깊게 내려앉았다.

이제 수호룡의 목소리에서는 허탈함과 함께 짙은 분노마저 느껴졌다. 마치 자신을 우롱하기라도 하느냐는 투였다.

-그럼… 넌 대체 무엇이냐?

-전 ‘준비하는 자’입니다.

-준비…? 무엇을?

-다가올 더 큰 격란과 환란을 막고자 준비하는 자입니다. 아쉽게도 저는 별의 점지를 받지 못해 그 격란과 환란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대신에 사소한 재주이지만 별의 운행을 조금은 읽을 수 있어서, 환란이 줄 피해를 조금이나마 줄이고자 애를 쓸 뿐이지요.

우스던의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씁쓸하게만 느껴졌다.

-그래… 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 이냐.

-당신이 기다리시는 메르빙거는 곧 머지않은 시일 내에 이곳을 찾아올 것입니다. 시조께서 저희에게 심으신 씨앗이 이제야 겨우 싹이 틀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럼?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말씀드리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우스던은 그렇게 말하면서 수호룡에게 무언가를 건네주는 것처럼 보였다.

‘저게 뭐지?’

엘릭은 혹시 그게 우스던과 관련된 중요한 단서가 아닐까 싶어 집중해서 보려 했지만, 아쉽게도 의식 세계는 다시 흔들리면서 다른 광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수호룡은 우스던과의 짧은 만남에서 새로운 희망을 보았고, 다시 새로운 메르빙거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다만, 우스던이 생각하지 못한 점이 있다면, 그가 다녀간 이후로 수호룡이 조금씩 조바심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어느 날, ‘창천의 눈’을 빌려 둥지 속 미궁을 뚫고 들어온 한 사내아이가 있었을 때.

-내 피를 나눠주마. 그러니 이곳으로 메르빙거를…, 메르빙거를 데려와다오.

수호룡은 그 아이에게 몇 남지 않은 자신의 심장 한 조각을 떼어다 주며 그런 부탁을 남겼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차차 흐르면서 마족으로 보이는 것들이 둥지 근방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동안 세 알을 지키기 위해 천년 넘게 둥지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던 자신의 흔적을 어떻게 찾아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자신의 피를 받은 사내아이가 바깥세상으로 나가면서 꼬리가 밟힌 건가 싶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수호룡은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빨리. 빨리 와야 할 텐데….

그리고 지금.

수호룡은 엘릭과 마주칠 수 있었으니.

【그래도 다행히 이렇게라도 만났구나.】

격랑이 마구잡이로 휘몰아치는 의식 세계의 한가운데에서.

수호룡이 지닌 의식의 파편 하나가 겨우 눈을 떴다.

엘릭과 편하게 대화를 하기 위해서 그런 건지, 용의 의식은 사람의 형상을 띠고 있었다. 다만, 그 모습이 우스던과 닮은 건 괜한 착각일까?

“제가 맞는지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엘릭이 던진 질문에 수호룡은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네 조부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그리고 너에게서는 우리네 종족의 향기가 진하게 풍기고 있으니까. 샤이나크 님의 향. 그분의 체취가 이렇게 묻어있는 네가 기다리던 메르빙거가 아니면 또 누가 있을 수 있을까?】

“절 기다렸다고 하셨습니다. 그게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나 역시 자세한 건 모른다. 동족들이 모두 떠났을 때, 나는 뭘 모르는 애송이에 불과했으니까. 종족에서 가장 어린 애송이. 그래서 남게 된 것이고, 이 알들을 품게 된 것이다. 지금은 전부 부화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단단한 돌이 되어버리고 말았지만.】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말해줄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너희네 시조가 심은 씨앗에서 비롯되었다는 것. 네 조부는 그것에다 거름을 주고 물을 뿌리는 자였으며, 거두는 것은.】

“저라는 말씀이신 거군요.”

엘릭은 목에 걸린 마도경식을 매만졌다.

【우리네 용들은 원래 너희네 족속들과 가까운 존재였다. 마법(魔法). 마도(魔道). 그런 것들로 묶인 운명공동체라고 봐야겠지. 메르빙거는 우리를 통솔할 주인이었고, 우리는 메르빙거의 대변자였다. 그러던 것이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잊혀지다가…!】

수호룡은 말을 잇다 말고, 도중에 멈춰서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리고 뭔가를 보는 것처럼 고개를 위로 들었다.

【그래. 우리에겐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었지.】

어쩐지 말투에는 다급하면서도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수호룡이 시선을 다시 아래로 내리면서 엘릭을 주시했다.

【옛날 일이 어떻고, 네가 내가 기다리던 메르빙거이고, 그런 것은 중요치 않다. 우리 관계에 신뢰가 쌓였을 리는 없고. 그저 거래만 나눌 수 있다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공감합니다.”

【무너진 지반 아래에 숨겨진 석실이 하나 있을 것이다. 거기에 있는 세 알을 품어다오. 그리고 다시 깨워다오.】

엘릭의 눈이 빛났다.

용의 알을 가진다는 것.

그것도 세 개나 품을 수 있다는 건, 마법사로서 분명히 대단한 업적일 수 있었다.

하지만.

“도와드리고 싶습니다만, 전 방법을 모릅니다.”

엘릭은 곧 세상을 떠날 이 가련한 용을 속이고 싶지 않았다. 선의의 거짓말을 할 수도 있었지만, 그것은 기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엘릭의 생각을 읽은 걸까?

어쩐지 용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걸린 것 같았다.

【아니. 너에겐 방법이 있다.】

“무엇… 입니까?”

【‘봄’.】

“…!”

【따스한 햇살이 비추는 곳에서는 생명이 잉태를 하게 되는 법이지.】

두근! 두근!

엘릭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마도경식을 매만지는 손길에 힘이 바짝 실렸다.

【자, 이제 말해라. 너에게는 방법이 있고, 나는 그것을 알기에 너에게 세 알을 부탁하였다. 거래로써, 네가 나에게 부탁할 것은 무엇이냐?】

“진언… 아니, 용언을 배우고 싶습니다. 방법이 있습니까?”

언령 마법 체계의 끄트머리에 다다를 수 있는 방식을 얻을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이 자연스레 풀릴지도 모른다.

다만, 무엇 하나를 제대로 배우기에는 시간이 촉박하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는데.

【있다.】

다행히 용은 마법의 시조라, 무언가 해결책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 순간.

수호룡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내 심장을 먹어라.】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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