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언령(言靈) 혹은 언령(言令)
동굴을 무너뜨릴 당시.
엘릭은 용이 다치지 않도록 따로 그 주변에다 마력장을 몇 겹이나 겹친 상태로 결계를 쳐두었다.
이미 용은 과다 출혈로 인해 기식이 거의 끊어진 상태.
조금이라도 큰 충격을 받게 되면 남은 숨통마저 끊어질지 몰라서 최대한 조심스럽게 신중을 기해야 했다.
그리고.
헤르만과 세일러가 마왕들을 상대하는 동안, 엘릭은 다시 용이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쌔액!
쌔액!
이렇게 큰 덩치를 자랑하는 용이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모습은 애처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메르… 빙… 거.】
용은 엘릭을 만난 상태에서도 하는 말이 이게 고작이었다.
『완전히 맛탱이가 갔군?』
원래 이 용은 상태가 그리 좋지 못했다.
오랫동안 동굴에 갇혀있기만 해서 권능을 잃고, 이성까지 오락가락하고 있던 상태.
한낱 몬스터로 퇴화(退化)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엘릭을 만나 겨우 대화를 이어나갔던 것을, 레다와 격전을 치르면서 그나마 유지하고 있던 이성까지 완전히 무너진 것으로 보였다.
『이래서는 아무것도 캐내지 못할 것 같은데.』
메피스토는 용의 주변을 이리저리 맴돌더니 혀를 ‘쯧’하고 찼다.
그가 내린 결론은 아주 간단했다.
회생불가.
『이 도마뱀 놈들은 원래 옛날부터 반짝이는 것을 아주 좋아해서 그런 것을 얻을 수 있을까 싶기도 했는데. 보아하니 그런 면에서도 빈털터리인 것 같고.』
엘릭에게 진언을 배우라고 조언해주었던 메피스토로서는 툴툴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음?』
이쯤 되면 어떤 답변이 돌아와야 할 엘릭이 아무 말이 없었다.
왜 그러나 싶어 가만히 그쪽을 보는데.
엘릭이 눈을 가늘게 좁히면서 다 죽어가는 용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용의 거대한 동공에는 초점도 제대로 잡혀있지 않았다.
[메피.]
『왜?』
[용의 정신세계는 얼마나 클까요?]
『무슨 뚱딴지같은… 너! 또 무슨 쓸데없는 짓을 하려고?』
메피스토는 기가 찬다는 표정이 되고 말았다.
엘릭이 뭘 생각하는지를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지금 엘릭은 이 다 죽어가는 용의 빙의를 생각하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빙의가 아닌 동화(同化), 혹은 동조(同調)나 공명(共鳴)이라고 봐야겠지만.
어쨌거나 나하트람의 망령을 빙의시켜 그의 기술과 식견을 모방하듯, 같은 방식으로 용의 의식세계를 엿보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메피스토가 보기에는 미친 짓이었다.
『아무리 다쳤다고는 해도, 용은 용이니라. 웬만한 하급 신 따위도 비견할 수 없는 격을 지닌 용이란 말이다! 한데, 아무리 영락에 영락을 거듭했다고 한들, 그런 용을, 아직 탈각이니 초월이니 하는 것을 감지하지도 못하는 네가 그 단면을 엿보겠다고?』
용의 의식세계는 무한한 바다와 같다. 하지만 인간인 엘릭의 의식은 그에 비하면 자그마한 시냇물에 불과할지니.
아무리 메르빙거라고 해도 바닷물에 휩쓸려서야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 거라는 게 메피스토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엘릭은 전혀 넘어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예전에 메피랑 제가 동화되었을 때, 기억해요?]
흑의 설원에 있을 당시. 노루스 재상에게 깊게 뿌리박혀 있던 새끼 마족을 뽑아먹었을 때 일어났던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당시 엘릭은 메피스토를 구성하던 과거의 단면들을 엿볼 수 있었다. 찰나에 불과해도, 메피스토가 가졌던 생각, 감각, 의식, 정보 따위를 모두 ‘자신의 일’처럼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메피스토도 똑같이 엘릭의 단면을 엿보았던 것 같았다. 무엇을 보았는지는 말해주지 않았어도, 아주 깊숙한 내면까지 들여다봤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그때는 왜?』
메피스토는 떠올리기 불쾌하다는 듯이 인상을 찡그렸지만, 엘릭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그때도 저 무사했습니다?]
『그때와 지금이 어디 같은 줄 아느냐? 당시에는 찰나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아주 용의 의식을 샅샅이 뒤지겠다는 것인데!』
[아뇨. 괜찮을 겁니다.]
『이이…!』
[제가 가진 마정석, 드래곤 하트도 겸한다는 거 잊었어요? 어떻게든 될 겁니다.]
엘릭은 절대 자신에게 아무 이상이 없으리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목에 건 마도경식을 쥔 손에 힘이 바짝 실렸다.
메피스토는 그런 엘릭을 보면서 인상을 썼다.
[걱정해주는 겁니까?]
『걱정은 무슨! 네놈이 잘못되면 본 왕까지 같이 휩쓸릴 게 빤히 보이니 그러는 게지!』
[흐흐. 눼이눼이. 알겠습니다.]
『이놈이!』
어쩐지 메피스토의 모습에서 항상 자신을 보면서 신경질을 버럭버럭 내는 션의 모습이 비쳐 보이는 건 괜한 착각일까?
엘릭은 왠지 착각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왕이 메르빙거 걱정이라니. 세상 참 말세란 말이지.’
처음 메피스토와 얽힐 때까지만 해도, 어떻게 하면 서로를 잡아먹을지 안달이 나 있기만 했었는데.
같은 목표가 생기고, 협력을 오랫동안 해서 그런지 알게 모르게 동질감이 생긴 모양이었다.
[아무튼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바깥 좀 잘 살펴 봐줘요.]
『맘대로 해! 어차피 본 왕의 조언 따윈 귓등으로도 안 들을 것 아니냐.』
엘릭은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다가, 곧 엄숙한 표정이 되어 한쪽 무릎을 꿇었다.
금방이라도 숨이 멎을 것처럼 구는 용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당신은 절 오랫동안 기다렸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예언이란 게 대체 뭔지 말씀해주십시오.’
【메… 르… 빙거…!】
그런 생각과 함께.
“【보여라】.”
그 순간.
화아아악!
엘릭의 눈앞으로 수많은 잔상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러는 동안.
『우스던이라고 했었나?』
메피스토는 동조를 시작한 엘릭을 보면서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엘릭과 동조했을 당시. 엘릭의 무의식 깊은 곳에서 ‘보았던’ 누군가가 자꾸만 눈에 밟혔다.
당시에는 그가 누군지 정확하게 알 수 없었지만.
엘릭과 함께 한 시간이 길어진 지금은, 이제 그가 누군지를 잘 알고 있었다.
『본 왕이 알지 못하는 메르빙거여. 대체 너는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냐?』
* * *
엘릭은 눈앞으로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잔상 때문에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시야가 이리저리 어지러워졌다. 모든 것이 빙글빙글 돌아가면서 감각이라는 것이 모두 무용지물이 되었다.
공간 감각이나 방향 감각마저 전부 일그러져 앞, 뒤, 옆을 모두 분간하기 힘들었다. 멀미가 나고, 정신이 어지러웠다.
이성을 겨우 붙잡는 것이 아주 용할 지경이었다.
망망대해에 떠다니는 난파선의 뱃조각에 불과할 거라던 메피스토의 경고가 무슨 뜻인지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격랑을 치는 용의 의식세계 속에서 엘릭은 자칫 잘못 휩쓸렸다간 흔적도 없이 산산조각이 나고 말 아주 자그마한 파편에 불과했다.
-나는. 나는 기다린다.
-그가 오기를.
-약속된 그가 오기만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권능을 잃었다. 격이 무너졌다. 이제 나라는 존재조차 사라진다.
-위대한 용이었던 내가, 하늘을 누비고 대지를 밟았던 내가, 서서히 잊혀 간다.
-한낱 미물이 되어간다.
-그래도 기다려야….
수많은 염원과 간절한 바람이 소용돌이처럼 뒤섞이는 가운데.
그 속에서.
엘릭은 원하던 한 단면을 볼 수 있었다.
-위대한 용왕이시여! 저도 함께하겠습니다! 당신과 함께하겠습니다! 스러질 동료들의 옆을 지키도록 해주십시오!
지금은 무너지고만 용의 둥지 속에서.
용은 자신보다도 한참 덩치가 큰 다른 용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새로운 용의 모습이 엘릭에게도 너무나 익숙했다. 절대 잊을 수가 없는 모습이었다.
‘보석룡!’
엘릭이 처음으로 발견했던 둥지의 주인이었으며, 메피스토와도 처음 마주치면서 절맥증을 치료할 수 있게 해주었던 존재.
마지막 남은 용왕이라던 그가, 한참 어린 보르푸르 족의 수호룡을 굽어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담긴 감정은 안타까움이었다.
마지막 전장을 떠나기 전, 동족들을 모두 잃어버리고 이 땅에 홀로 남게 될 후손에 대한 안타까움.
-안 된다.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으냐. 너는 이곳에 남아 우리의 아이들을 지켜야만 한다.
-이미 온기가 사라져버린 알입니다! 다시 깰 수 없다는 것, 잘 아시지 않습니까! 한데, 저에게만 이곳에 남…!
-아니. 그 아이들은 먼 미래를 위해 잠시 잠들어있는 것일 뿐이다.
-용왕이시여! 아직도 그런 말씀을…!
-메르빙거. 메르빙거만 오면 된다.
-저 땅에서 아직도 돌아다니고 있는 메르빙거를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늦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옛 맹약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그 옛날, 그들이 가졌던 모든 힘을 잃지 않았습니까!
-잃어버린 게 아니다. 잊은 거지.
-그게 그것 아닙니까!
-아니. 다르다. 그들은 언젠가 다시 되찾을 테니까.
보석룡에게서는 굳건한 믿음이 보였다.
그것이, 수호룡의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벽을 보고 말하는 기분. 아무리 떠들어대도, 보석룡은 절대 그의 생각을 가납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 격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엘릭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알?’
그러다 엘릭은 뒤늦게 용의 발치에 세 개의 알이 뒹굴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겉보기에는 그저 단단한 돌로만 보이는 것들.
하나는 붉었고, 어느 하나는 푸르렀으며, 마지막 남은 하나는 잿빛을 띠고 있었다.
‘용의 알….’
엘릭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보석룡의 말이 사실이라면.
용은 여태껏 저 알들을 지키기 위해서 오랜 세월을 꾹 버티면서 살아왔다는 의미가 되었다.
두근!
두근!
저 세 개의 알이 아직도 남아있다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엘릭은 그들의 대화에 더더욱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기다려라. 그들은 우리의 창시자. 언젠가 다시 잊은 맹약을 깨우게 될 것이다.
보석룡은 수호룡에게 그 말만 남긴 채 훌쩍 떠났다.
수호룡은 저 멀리 하늘을 빼곡하게 채우며 태양이 지는 서산으로 사라지는 동료들을 보면서 이를 악물었다.
비록 저들이 떠나는 마지막 길에 자신이 합류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마지막 남은 비원을 어떻게든 지켜야만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여전히 보석룡이 했던 말의 진의를 의심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자신에게 남은 세 명의 후손까지 사라지도록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수호룡은 전혀 기약 없는 기다림만을 반복해야만 했다.
눈이 내리고.
봄이 찾아오고.
여름이 왔다가.
가을이 스쳐 지나가며.
다시 겨울이 내리기를 여러 차례.
끝도 없이 반복되는 세월 속에서 수호룡은 서서히 지쳐만 갔다. 오랜 세월의 늪은 그에게서 많은 것을 앗아갔다.
발톱이 빠지고, 이가 흔들렸다. 눈이 어두워지고, 날개의 피막이 너덜너덜해졌다.
세상의 섭리를 엿볼 수 있었던 눈은 이미 닫힌 지 오래였다. 지식의 보고였던 머리도 제대로 열리지 않아 이따금 이성과 자아를 잃기 일쑤였다.
권능을 잃고 쇠퇴해가는 종족의 삶은, 그렇게 비루한 것이었다.
-어째서… 이렇게 긴 시간이 흘렀는데도… 아무도….
그래도 수호룡은 버티고 또 버텼다.
세 개의 알만 아니었어도, 진즉에 포기했을 지루한 기다림이었다. 물론, 세 알도 여태 온기를 찾지 못하고 이미 화석이 되어 버린 지 오래였지만, 그래도 마지막 남은 미련이 계속 그를 이 땅에 붙들어두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찾아왔다.
-당신이 보르푸르 족의 수호룡, 아로와나이십니까?
후드를 깊게 눌러쓴 인간 사내.
한 손에 긴 지팡이를 들고 있어 마법사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대는… 누구지?
-저는.
사내가 천천히 후드를 벗었다.
그 순간, 지켜보던 엘릭의 눈이 커지고 말았다.
아카데미에서도. 안배 속에서도 보았던 얼굴이 있었으니까.
‘조부님!’
-제 이름은.
-우스던 메르빙거라고 합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