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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206화 (205/405)

206화

언령(言靈) 혹은 언령(言令)

흠… 하!

그림자로 이뤄진 거대한 짐승은 숨을 크게 들이키더니, 곧 주둥이라 생각되는 부분의 한쪽 끄트머리를 크게 말아 올렸다.

바깥 공기가… 좋긴 하군.

물론, 불청객이 없는 상태라면 더 좋았을 텐데 말이지.

눈이라 생각되는 부분을 살짝 찡그리면서 휼이 앞을 본 순간.

콰아앙!

동굴이 무너진 자리가 다시 폭발하면서 무언가가 치솟았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레다는 인상을 팍 찡그리고 있었다.

“아끼던 옷이었는데… 아쉽군.”

레다는 옷깃에 묻은 먼지를 탈탈 털어냈다.

그다지 별다른 상처를 입지는 않은 것 같았지만, 그래도 모든 피해는 막을 수 없었는지 입고 있던 옷의 여기저기가 해져 있었다.

크르르…!

하지만 휼은 녀석의 그런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눈앞에 자신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없는 사람처럼 취급하고 있었으니까!

크아아앙!

휼의 사념체가 녀석을 향해 포효를 내질렀다.

포악한 살기가 사방으로 흩어지고, 대지가 들썩였다.

급수가 안 되는 마족들은 온몸에 경기를 일으키면서 오들오들 떨거나, 몇몇은 아예 게거품을 물고 졸도하기까지 했다.

레다도 이 이상 휼을 무시할 수는 없었던 듯, 고개를 옆으로 꺾었다.

순간, 그의 두 눈이 도깨비 불처럼활활 타올랐다. 마기도 다시 날개에 박힌 두 인장을 따라 휘감기기 시작했다.

“감히 인간에게 묶여 있던 개새끼 주제에 어딜 향해 짖는 것이냐?”

레다의 눈에는 보였다.

휼의 사념에서부터 엘릭으로 이어지는 보이지 않는 연결 고리를.

마족, 아니, 마왕으로서의 긍지를 잃어버린 놈이었다.

가진 힘은 일반 마족들을 상회할지 모르지만, 마족으로서 응당 가져야 할 기품이나 품위 따위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저열하고, 폭압적이다.

분명 한 번 죽었을 게 분명한데도,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연명해보겠다고 한낱 인간에게 얽매여 꼬리를 흔드는 꼴이 우습기만 했다.

지금도 보라.

주인인 메르빙거에게 잘 보이겠답시고, 주제도 모르고 자신을 향해 이빨을 내보이지 않나.

거기다 출신도 구천지옥의 밑바닥에서 뒹군다는 아귀 출신.

같은 마족이라 취급하기에도… 아니, 그저 한낱 마물(魔物)일 뿐인 놈이 이런 반응을 보인다는 게 그로서는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하지만 휼의 사념도 그 나름대로 화가 난 상태였다.

엘릭이 녀석에게 밀리는 내내.

옛 힘을 제대로 개방하지 못해서 얼마나 답답했던가?

비록 전성기 시절에 비하면 지금 여기에 있는 자신의 모습은 비루한 망아지 수준에 불과할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자신이 직접 나선다면 저깟 마왕쯤은 쉽게 찢어발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었다.

자신은 휼(獝). 동대륙을 오랫동안 겁란으로 몰아넣었던 재앙의 화신이 아니던가.

그랬던 자신이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단 사실에 울화가 치밀었다.

숙주인 엘릭에게 화가 난 게 아니었다.

감히 자신을 거스르려 하는 레다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다 엘릭의 허락에 따라 다시 이렇게 모습을 드러낸 순간.

휼의 사념은 여태 쌓아두기만 했던 울화를 제대로 풀어낼 심산이었다.

자신을 아래로 취급하는 저놈의 눈깔을 뽑아서 먹어 버려야 조금이라도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내가 한 말, 기억하지?]

그러던 그때, 엘릭의 전음이 전해졌다.

강한 노파심이 느껴지는 목소리.

그걸 들으니 이상하게 갑자기 화가 가라앉았다. 대신에 냉정한 이성이 대가리를 치켜들었다. 입가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크르르….

자신을 이런 꼴로 만든 작자의 제자이긴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는 엘릭에게 그리 싫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어떻게든 살고자 아등바등하는 모습에 옛날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게 되기 때문일까?

아니면 첫 대면 때, 자신을 보고도 별달리 두려워하지 않고 코웃음을 치던 모습이 귀여워서 그랬던 걸까?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키키킥. 걱정 마라.

엘릭은 휼의 사념에게 잠시간의 자유를 허락할 때, 최대한 레다만 상대하라는 조건을 달았다.

만약 자신의 아군이 다치기라도 한다면 그때 바로 그를 묶고 있는 사슬을 도로 잡아당길 것이라며.

엘릭이 지금 필요로 하는 건 시간 벌기였지, 그가 벌일 난장(亂場)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

하지만 휼 사념의 자신만만한 대답에도 불구하고, 엘릭은 여전히 못 미더운지 잠시간 말이 없었다.

그 모습에 휼의 사념은 속으로 가볍게 혀를 찼다.

보통 다른 인간이나 마족이 자신에게 이런 시건방진 태도를 보였다면 바로 잡아 먹어버렸을 테지만.

역시 이 인간에게는 딱히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도리어 어르고, 달래 주고 싶을 뿐.

오랜 세월을 살았지만, 그 역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묘한 느낌이었다.

누군가가 그랬지.

이 몸은 승냥이와 같다고 말이야. 키킥.

승냥이가 어떻게 사냥하는 줄 아나? 원하는 먹이를 물어뜯기 위해 막무가내로 달려들지 않아. 기회를 아주 잘 살피지.

이렇게!

파아앗!

휼의 사념은 말을 끝내자마자 강하게 지면을 박차면서 레다에게 달려들었다.

크와아앙!

콰콰콰-

“개새끼가 함부로 냄새나는 주둥이를 들이대는구나. 그 이빨부터 모조리 뽑아주마!”

레다를 중심으로 마기가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분노로 잔뜩 일그러진 녀석의 얼굴부터 상반신 전체까지, 실핏줄이 잔뜩 돋아났다. 보는 사람의 살이 절로 떨릴 정도로 강한 광기였다.

이에 대응해서 그림자가 해일처럼 지면에서부터 높이 일어나 레다를 덮어버리고자 했고, 검은 마기가 벼락처럼 하늘에서부터 강렬하게 떨어져 해일을 찢어발기고자 했다.

콰르르릉-

쿠쿠쿠!

그렇게 두 존재가 격돌하기 시작했다.

* * *

“엘릭, 저건…?”

“큰놈이 제가 부리는 쪽입니다.”

헤르만이 말을 몰아 엘릭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의 시선은 한창 충돌하기 시작하는 휼의 사념과 레다에게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흉살과 광증.

두 인장이 빚어내는 여파는 실로 대단했다.

여기저기서 어서 피하라며 황급히 물러서는 이들이 많았다. 인간, 마족, 가릴 것 없이 그들의 시선도 온통 그쪽에 고정되어 있었다.

보는 내내 등골이 저절로 섬뜩해지는 것이, 이대로 있다간 공기에 전신이 짓눌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대마전쟁.

30여 년 전에 온 대륙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던 그때의 전투가.

이제는 사람들의 머릿속에서도 많이 잊혀져 까마득한 신화나 전설처럼 되다시피 한 당시의 전투가, 이와 같지 않았을까?

“그러고 보니 들어본 적이 있어.”

헤르만의 두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아주 오래전에 동대륙에서 오랫동안 기승을 부렸던 어느 대재앙(大災殃)이, 어느 날 동부의 여러 산골짜기와 협곡을 넘어 우리네 쪽으로 들어온 적이 있다고. 그리고 그 대재앙을 쫓아 어느 한 마법사도 같이 넘어왔다고.”

엘릭은 그에게서 오거스틴에게서 들었던 녹야의 옛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마법사는 대재앙을 잡을 수가 없자 후대에 그 비원을 남겼고, 후대는 다시 그 후대에게, 그 후대는 또 다른 후대에게 비원을 넘기면서 장장 천년을 이어져 오다가 오늘날에 들어서 겨우 종식될 수 있었다고.”

엘릭은 어쩐지 헤르만과 오거스틴 간에도 자신이 모르는 어느 옛 이야기가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헤르만은 휼의 사념과 레다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다시 엘릭을 돌아봤다.

“그 대재앙이란 것이, 우리네에게 피해를 입히지는 않겠지?”

“아직은 고삐를 제가 쥐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마 얼마 못 버틸 겁니다.”

엘릭은 사실상 두 마왕의 승패를 레다 쪽으로 점치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아직 체급이 안 돼.’

레다는 마왕 급이다. 녀석이 지닌 유명의 인장이 고유 급을 넘어 이미 설화 급에 다다랐다는 뜻이었다.

그런 반면에 휼의 사념은?

아직 거기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진귀 급이었다.

고유 급도 되지 못했다는 뜻.

비록 전투 경험이 많고, 영혼의 격이 높아 사실상 고유 급으로 분류해도 무방할 테지만.

그렇다고 해도 결국 레다를 상대하는 데에는 그만큼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주변으로 그림자를 촉수처럼 뻗어 널브러진 마족의 사체를 흡수하고 있다지만, 결국 밀려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서 내가 뭘 하면 될까?”

그렇기에 헤르만은 엘릭의 말을 곧장 알아들을 수 있었다.

“저 희멀겋게 생긴 놈 있잖습니까?”

“재수없게 생긴 저 자?”

“예. 최대한 시간을 벌어주십시오.”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고수에게 겨우 ‘시간 벌이’를 부탁한다는 건 자칫 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헤르만이라면 어떻게든 내쫓을 수는 있을 거야. 하지만 그러려면 시간이 걸려. 지금은 어떻게든 빨리 놈을 처치하거나 내쫓아야만 해.’

엘릭은 어쩐지 이번 전투가 레다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불길한 느낌을 자꾸 받았다.

레다만 처치하라고 하면 사실 별반 어렵지 않았다.

아무리 마왕이라고 한들, 사자가 둘이나 나선다면 결국 쓰러질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만큼 사자가 가진 힘이란 아주 대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엘릭은 아직 잊지 않고 있었다.

‘유다… 만약 그놈과 비슷한 힘을 지니고 있다면 정말 위험해질 수도 있어.’

유다가 궁지에 내몰렸을 당시. 아주 미약하게나마 풀렸던 아자젤의 힘이 있지 않았나.

반편이라던 유다가 그 정도일진대, 어느 정도 완성된 레다가 그와 비슷한 광경을 보인다?

절대 쉽지 않으리라.

엘릭이 서둘러서 용에게 접촉을 하려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하물며 아자젤의 부활에 있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 드래곤 하트를 수거하러 온 놈들이 그저 그런 준비만 해두지는 않았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런 사실들을 지금 당장 여기서 구구절절 늘여놓기에는 너무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아 용건만 꺼낸 것이었지만.

헤르만은 어찌 보면 무례한 그런 부탁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 이 상황이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이, 세일러가 있는 쪽을 돌아보면서 소리쳤다.

“들으셨소, 영감님?”

“오냐. 흐흐. 간만에 마왕 사냥이라니. 이건 또 이것 나름대로 재미가 있겠군!”

세일러는 사람 좋은 얼굴과 다르게 피를 흠뻑 뒤집어쓴 채로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노익장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그는 쾌활해 보였다.

“이랴!”

한 손에 쥐고 있던 말고삐를 잡아당기면서 레다가 있는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헤르만도 똑같이 그쪽으로 내달렸다. 한 손에 검을 꽉 쥔 채로.

두 사자가 난입하게 되자 정작 당혹스럽게 된 것은 레다 쪽이었다.

눈앞에 있는 시건방진 짐승을 도륙 내고, 메르빙거의 종자까지 뿌리 뽑아버리려 했건만.

설마 그리고리에서도 최대한 당장은 부딪치지 말라던 사자를 둘이나 여기서 마주치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으니까!

차차차창!

각각 푸른색과 회색 궤적이 허공을 가로지르면서 휼의 사념과 레다 사이로 난입했다.

아니, 난입하려 했다.

다른 놈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콰아아앙!

헤르만과 세일러, 두 사람 앞으로 거대한 무언가가 떨어졌다.

“왜… 여태… 안 오나… 했더니… 이런 곳에… 시간 질질…!”

2미터? 아니, 그보다 훨씬 더 큰 것 같았다. 최소 2미터 20센티는 넘어 보이는 키와 덩치.

팔사자 중에서도 가장 큰 덩치를 갖고 있다던 헤르만보다도 훨씬 커 보였다.

하지만 재빠른 레다와 다르게 느릿느릿한 행동을 보이고, 두 눈은 졸린 듯 게슴츠레 뜬 자. 천천히 내쉬는 숨에서는 온갖 악취가 진동을 해댔다. 시체 썩는 냄새였다.

그럼에도 풍기는 위압감만큼은 레다와 비교해도 절대 뒤지지 않았다.

그 순간, 헤르만과 세일러는 깨달았다.

새로운 마왕의 출현이었다.

* * *

[제 말, 들리십니까?]

그사이.

엘릭은 용과의 접촉을 시도하고 있었다.

동굴이 내려앉은 한쪽.

짙은 어둠 속.

【메르… 빙… 거….】

용의 목소리가 울렸다.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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