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언령(言靈) 혹은 언령(言令)
파앗!
엘릭은 재빨리 마법을 발동시켜 레다와의 간격을 한참 떨어뜨렸다.
그러고는 재빨리 메피스토에게 물었다.
[어떻게요?]
그는 놀라워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레다와 겨루면 겨룰수록 느끼는 건 상대하기에 너무 벅차다는 점이었다.
조금 전까지 북풍을 완전히 풀어 내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
가디언을 모두 뽑아 물량으로 밀어붙인다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싶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결국 그러지는 못했다.
‘북풍은 한설보다도 마력 소모가 심해. 잘못 전개했다간 오히려 나하트람의 빙의마저도 깨질 수 있어.’
그러나 더 큰 문제가 있었으니.
‘저주… 정신 간섭이 너무 심해.’
레다는 유다와 달랐다.
자신에게 주어진 인장을 너무 잘 활용하고 있었다.
오른쪽 날개에 달린 유명의 인장을 이용해서 엘릭을 압도적인 힘의 격차로 밀어붙이는 한편.
왼쪽 날개에 찍힌 광란의 인장으로는 엘릭의 정신 방벽을 계속 건드리고 있었다.
저주.
엘릭의 정신을 자꾸만 조작하려 드는 것이다.
잔뜩 흥분케 하여 판단을 흩뜨리게 하려 하고, 때로는 레다에 대한 막막함을 두려움으로 변질시켜 의욕을 꺾고자 했다.
다행히 엘릭이 의지력이 강하고, 여태 오토 한의 안배를 여러 번 거치면서 무의식적으로 정신력을 강화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정말 큰 일이 일어났을 수도 있었다.
이미 자아를 반쯤 빼앗겨 레다에게 휘둘리고 있지 않았을까?
도저히 어떤 방법으로도 레다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던 것이다.
겨울 6장 중 다른 망령을 불러볼까 하는 생각도 몇 번씩 해보았다.
그들은 모두 각자가 가진 장기와 특기가 다 달랐으니까.
나하트람이 마법보다는 체술에 일가견이 있어 레다를 상대하기가 어렵다면, 레다와 천적 관계라 할 수 있는 망령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엘릭의 부름에 답하지 않았다.
여전히 무의식 세계, 저 깊은 곳 어딘가에 자리를 깔고 앉아 있을 뿐.
마법적 능력이 강해져 그들이 잠들지 않고, 자신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은 오히려 엘릭을 답답하게 만들 뿐이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준다면 뭐라도 하겠는데, 그런 것이 전혀 없었으니까.
그래서 다른 방책으로 헤르만과 세일러를 부를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레다는 그럴 틈도 전혀 내어주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메피스토가 반격할 방법이 있는 것처럼 말한다?
저절로 의문이 생기면서도, 당연히 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생각 해본 적 없나? 네놈의 마법 발동 체계가 뒤떨어진다는 것.』
[그게 무슨…?]
엘릭은 무슨 말을 하느냐고 물으려다가, 자기도 모르게 멈칫하고 말았다.
메피스토의 한쪽 입술이 더 크게 말려 올라갔다.
『그래도 짐작 가는 바가 없지는 않나 보지?』
[…자세히 설명해줘요. 지금 머릿속 정리할 시간 따윈 없으니까.]
엘릭이 다시 시선을 돌린 곳.
레다가 용에게서 다시 이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다시 어마어마한 압박감이 엘릭의 어깨를 짓눌렀다.
두근! 두근!
나하트람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거칠게 심장이 두근거리면서 피가 빠르게 돌고.
휘휘휘!
크르르-
엘릭을 둘러싼 그림자도 어느새 허리춤까지 일어나서 거칠게 떨리고 있었다.
마치 그 속에 사는 짐승이 잔뜩 열이 받은 나머지 울고 있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정말이지 마음에 안 들어. 어떻게든 찢어먹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은데 말이야….
『우리 마족들을 이토록 괴롭히려는 숙적의 후손에게 가르침을 줘야 하다니. 아아, 정말이지 본 왕의 마음은 하해와도 넓…!』
[그만 깐족거리고 제대로 말 좀 해봐요!]
엘릭이 결국 참다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지르니, 메피스토도 그제야 제대로 대답을 해주었다. 여전히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입가는 씰룩대고 있었지만.
『발동 체계를 바꿔.』
[발동 체계…? 아!]
그 한 마디만으로도, 엘릭은 단박에 메피스토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네가 가지고 있는 동계의 인장. 그것은 본 왕도 인정하는 몇 안 되는 인간의 총화(總和)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것을 ‘고작’ 언령으로 부린다고?』
그러고 보니 메피스토는 몇 번씩이나 언질을 준 적이 있었다.
사용할 수 있는 인장의 계급도는 계속 올라가는 반면, 정작 마법을 전개하는 언령은 발전이 너무 없지 않냐고.
이를테면 이런 것이었다.
오랜 연구 끝에 아주 질이 좋고 효과적인 화약을 개발했다고 치자. 그런데 만약 이것을 사용하는 화포의 격발 장치가 구식이라면?
이때 생기는 결과는 두 가지였다.
화포에 맞춰 효율이 급속도로 떨어지거나.
아니면 열기를 오래 감당하지 못해 몇 번 사용하지 못하고 화포가 망가지거나.
이 말인즉, 현재 엘릭이 사용하는 언령 마법으로는 동계 인장이 가진 힘을 제대로 끌어내기에는 한계가 있단 뜻이었다.
『네가 가진 인장으로 그냥 빙계 마법이나 부릴 거면 상관없을 것이다. 하지만 권능 급의 마법을 사용하려는데 고작 그것으로 될까? 제대로 된 체현이 가능할 것이라고 보는 것이냐?』
권능은 마법보다도 훨씬 우위에 해당하는 것.
그렇다면 그것을 제대로 다루기 위해 제대로 된 격발 장치를 갖춰야 한다.
지금 이 순간.
엘릭은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얻어야죠.]
레다가 날개를 활짝 펼치면서 지면을 박차고 있었다. 이제 엘릭을 완전히 치워버리겠다는 듯이.
『무엇을?』
[그야….]
엘릭은 발끝에 응결된 빙판에서 다시 얼음창을 뽑아 올리면서 이를 악물었다.
[더 강하고 센 거죠!]
엘릭은 얼음창을 레다에게 겨누지 않았다.
어차피 전면전을 벌여봤자 밀리는 것은 자신일 뿐.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전투 방식을 바꿔야만 했다.
‘시간도 벌어야 하고.’
다행히 지금 엘릭의 옆에는 언령보다도 상위에 해당하는 마법들을 가르쳐줄 아주 좋은 스승이 있었다.
물론, 메피스토는 아니었다.
마족과 마왕은 그저 타고난 인장을 본능적으로 다루기만 할 뿐, 언령과는 한참 거리가 멀었으니까.
하지만 언령의 끝이라 할 수 있는 ‘용언’을 부리는 용이라면 다르지 않겠나!
콰아아앙!
엘릭은 얼음창으로 바닥을 세게 후려갈겼다.
그러자 겨울 폭풍이 휩쓸고 지나가면서 잔뜩 빙결되었던 동굴 바닥으로 균열이 잔뜩 퍼졌다.
마치 거미줄이 뻗치는 것처럼 공동 전체가 삽시간에 균열로 뒤덮이면서 얼음 파편과 가루가 위로 튀어 오르고.
“또 허튼짓을 하려 드는구나, 메르빙거!”
레다가 얼음 가루로 이뤄진 구름을 마구잡이로 헤집으면서 그런 엘릭에게 한껏 비웃음을 던졌다.
또 겨울 폭풍을 부리려는 것 같은데, 그런 것으로는 자신을 잡을 수 없을 거라는 자신감의 발로로 보였다.
하지만.
“허튼짓인지 아닌지는 보면 알지?”
엘릭은 어느새 바로 눈앞까지 다가온 레다를 보면서 새로운 언령을 발동했다.
“【터져라】.”
『파하하하! 역시! 잔머리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굴린단 말이지!』
메피스토의 웃음소리를 뒤로 한 채, 어느새 동굴을 가득 메웠던 얼음 가루와 조각들이 일제히 폭발했다.
분말 폭발.
고운 입자들이 허공에 둥둥 떠다녔을 때, 한 번 불씨가 잘못 옮겨붙으면 곧바로 거대한 폭발로 이뤄진다는 자연적 현상.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되도록 대기 중에 수분기가 없이 건조해야만 했지만, 그런 것쯤이야 쉽게 해낼 수 있었다.
재빠르게 머릿속으로 연산한 결과에 따라, 마력장을 새롭게 일일이 배치하고, 언령이라는 격발 장치만 당기면 그만이었으니까.
콰콰쾅!
콰르르릉-
동굴 내부가 일제히 폭발에 휩쓸렸다.
연쇄 폭발. 크고 작은 폭발이 잇달아 일어나면서 엘릭과 레다 사이를 가려버렸다.
“허튼짓을…!”
레다는 이깟 꼼수로 자신을 어떻게 할 수 있겠냐는 듯, 마기를 사방으로 흩뿌리면서 폭발을 치워버리려 했다.
하지만 그가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이 있었으니.
이미 동굴은 그와 용이 벌인 격전으로 인해, 당장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많이 망가져 있었다는 점이었다.
천장이 무너졌다.
아니, 동굴이 그대로 폭삭 주저앉고 말았다.
콰지직-
쿠쿠쿠쿠…!
엘릭은 그 과정에서 용이 다치지 않도록 그의 주변에다 결계를 몇 겹이나 둘러치면서 재빨리 자신의 그림자를 내려다봤다.
“야.”
뭐지?
메피스토와 다르게 여전히 엘릭이 뭘 하려는지 짐작하지 못한 휼의 사념만이 의문을 잔뜩 드러낼 뿐.
레다에게 여태 밀려나기만 한 것이 상당히 굴욕적이었던 것인지, 목소리에는 짜증과 분노가 잔뜩 맺혀 있었다.
먹이를 맘껏 먹지 못해 허기에 분노한 맹수, 그 자체였다.
흉살의 인장이 되어 덩치도 불어난 만큼, 허기도 잔뜩 커져버린 것이다.
“너, 저놈 싫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네 맘대로 날뛰어보라고.”
호오…. 그래도 되나?
휼이라는 마왕은 엘릭의 스승인 오거스틴에게 있어 숙적이었으며, 그의 선조들이 반드시 뛰어넘고자 했던 원한 어린 대상이었다.
그런데 그런 자신을 맘대로 날뛰게 해도 되겠냐는 뜻이었지만.
“못할 게 있나. 내 맘이지.”
엘릭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애당초 인장이라는 형태로 녀석의 고삐를 쥐고 있는 한, 얼마든지 다시 거둬들일 자신이 있었으니까.
때마침 엘릭이 있는 천장도 무너지는 게 보였다.
“【풀려나라】.”
그렇게 여태 휼의 사념체를 속박하고 있던 사슬들을 풀어주는 명령어를 내린 순간.
철컥-
철컥, 철컥-
마치 자물쇠가 연달아 풀리는 듯한 소리가 연달아 들리더니.
기대에 부응해주지, 주인.
그림자가 더 높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마치 무저갱의 깊은 곳에 숨어있던 거대한 짐승이 수면 위로 나타나려는 것처럼, 그림자 위로 다른 ‘무언가’가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콰콰콰콰!
격진이 더 심해지면서 동굴이 완전히 무너져내렸다.
* * *
쿠쿠쿠쿠…!
“저, 저, 저게 무슨…!”
“동굴이… 무너져…?”
“동굴이 무너진다!”
“성지가…!”
“수호룡께서…!”
용의 둥지 밖에서 한창 격전을 벌이고 있던 이들의 시선이 똑같이 그쪽으로 돌아갔다. 인간, 마족, 가릴 것 없이 모두.
별의 종군은 엘릭이 동굴로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기에 초조해했고, 그리고리는 마왕 레다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알 수가 없어 발을 동동 굴렀다.
특히 부족의 오랜 성지가 무너진다는 사실에 보르푸르 족 전사들의 안색은 하나같이 창백하게 질리고 있었다.
오히려 앞을 보지 못하는 사르나이만이 침착하게 있을 뿐.
하지만 그녀도 무언가에 집중하다 말고, 곧 정신을 차리면서 황급히 고개를 높이 들었다.
“나타납니다! 모두 조심해요!”
사람들은 그녀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직감적으로 다른 위험한 상황이 추가로 발생한다는 의미임을 깨닫고 바짝 긴장했다.
바로 그 순간.
콰아아앙!
여태까지 벌어졌던 폭발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거친 폭발이 무너진 동굴의 끄트머리에서 일어났다.
휘휘휘휘!
그리고 바로 그 자리로 새하얀 겨울 폭풍이 불면서, ‘무언가’가 서서히 몸집을 일으키고 있었다.
“저, 저건…?”
“대체…!”
그것을 본 사람들은 눈을 크게 떴고, 그리고리의 마족들은 전신을 압박하는 새로운 마기의 출현에 숨을 죽여야 했다.
그것은 짐승이었다.
장장 크기만 수 미터를 훌쩍 뛰어넘는… 그림자로 이뤄진 짐승.
사자나 범과 같은, 고양잇과의 맹수로 보이는 것이, 눈을 떴다.
공기란… 참으로 좋구나. 먹고 싶은 게 아주 많아.
휼(獝).
한때, 동대륙을 겁란으로 몰아넣었던 마왕이 수십 년 만에 눈을 뜬 순간이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