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언령(言靈) 혹은 언령(言令)
촤르르륵!
첫 시작은 바로 냉혹의 사슬이었다.
허공에 잔뜩 응결되어 탄생한 얼음 사슬 여러 개가 녀석의 등 뒤에서 나타나 사각지대를 교묘하게 노리며 파고들었다.
“재미난 짓을 하려는군!”
레다는 흥미롭다는 듯이 엘릭에게 촉수처럼 내뻗던 마기 뭉치를 안쪽으로 잡아당겼다.
휘휘휘-
따다다당!
마기 뭉치가 다발로 꼬이면서 와류를 그려 냉혹의 사슬을 모조리 튕겨냈다.
그사이.
파앗!
엘릭은 다시 헤이스트 마법을 발동해서 레다와의 간격을 바짝 좁혔다.
그러고는 달리던 그대로 창을 앞으로 내질렀다. 그의 발끝에서 꿈틀대던 그림자가 사악한 웃음소리를 냈다.
도와줄까?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어서 와.’
농담도 못 하게 하는군.
그나저나, 마왕이라. 저만한 급수를 먹어 치우면 콩고물도 아주아주 많이 떨어질 텐데. 그렇지 않나?
휼의 사념은 레다를 잡고 나서 남은 것을 전부 메피스토에게만 주지 말고 자신에게도 일부 나눠달라는 식으로 칭얼거렸다.
하지만 엘릭은 굳이 여기에 대해 대답하지 않았다.
뭔가를 주려 해도 잡고 난 뒤에나 생각할 수 있는 문제였으니까!
화아아아…!
그림자가 창끝으로 빨려 들어왔다. 파랗고 투명한 빛깔을 자랑하던 창날이 흑요석을 깎은 것처럼 딱딱한 검은빛을 띠었다.
그림자로 물든 얼음창을 앞으로 곧추 세우면서 달리는 엘릭의 모습은 마치 달리는 말 위에서 랜스 차징을 시도하는 기사의 모습과 사뭇 흡사했다.
흉살(凶煞)의 인장.
휼의 사념이 파괴력과 공격력을 극대화시키고 있었다.
콰아아앙!
콰르르-
얼음창이 레다의 가슴팍에 작렬했다.
아니, 작렬한 줄 알았다.
분명히 창신을 타고 엄청난 반발력이 느껴졌으니까.
하지만.
“거기다 아주 흥미로운 것을 지니고 있고.”
가슴팍을 찌른 줄로만 알았던 얼음창은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 못한 채로 있었다.
창날이 아슬아슬하게 가슴팍 위에 떠 있었던 것이다. 레다의 손아귀에 붙들린 채.
창신 너머. 엄청난 완력이 느껴졌다.
‘강하다!’
분명히 엘릭이 날린 일격은 웬만한 사자들도 얕볼 수 없을 정도로 아주 강했는데도 불구하고, 레다는 그것을 한 손으로 너무 쉽게 잡아챈 상태였다.
녀석은 창날에 맺힌 그림자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봤다.
흉악하게 출렁이는 그림자 속에 깃든 게 무엇인지 단박에 알아본 모양이었다.
“우리네 종족과는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르군. 인외(人外)에서 비롯된 것은 사실이나… 그 안에 담긴 것은 ‘미지’나 ‘공포’ 따위가 아니라, 욕망, 뭐 그런 건가? 아니, ‘갈급’… 그렇게 봐야겠군. 그것을 뽑아다가 어딘가에 강제로 씌웠나?”
레다는 창을 붙잡지 않은 손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자고로 인외의 본질은 ‘모르는 것에서 풍겨 나오는 두려움’이거늘. 이것은 그저 인간과 생물들이 자아내는 단순한 본성에서 기인한 것일 뿐. 저열하군.”
저열하다.
그 말 때문일까?
흉살의 인장이 거칠게 떨렸다. 마치 분노에 휩싸인 듯.
그러거나 말거나.
레다는 무심한 눈길을 들어 엘릭을 직시했다.
망령의 시야에서 봤던 것과 똑같이 강렬한 눈빛이었다. 무덤덤한 것 같으면서도, 그 아래에는 금방이라도 끓어오를 것 같은 광기가 잔뜩 숨어있었다.
“고작 이 정도였나, 메르빙거? 우리네 마족을 박멸한다느니 퇴치를 할 것이라느니 잘도 떠들어댔던 것 같은데. 한 번 몰락을 겪고 나니, 안 되겠다 싶었던가? 그래도 그렇지, 그 많고 많은 마족 중에서 하필 이딴 저열한 것을 부리나? 실망이야. 아주.”
츠츠츠…!
이놈, 마음에 안 들어. 아주.
휼의 사념이 다시 일렁거렸다. 레다의 말을 맞받아치면서 이를 박박 갈아댔다. 실제로 녀석을 본다면, 잔뜩 노기를 드러낸 채 가래 끓는 울음소리를 내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갈기갈기 찢어서 먹어 치워야 직성이 풀릴 것 같은데….
주인. 이대로 놈을 계속 내버려 둘 생각은 아니겠지? 응?
‘그럴 리가.’
콰아아앙!
그 순간, 얼음창이 폭발했다. 수백 개의 크고 작은 파편이 우수수 레다의 몸 위로 쏟아지고.
“【휘몰아쳐라】.”
엘릭이 내뱉은 언령에 따라 회오리를 치기 시작했다.
권능, ‘한설’.
겨울 폭풍이 불어 닥치면서 삽시간에 녀석을 휘갈겼다. 마왕을 상대로 당장 전면전을 벌이기가 힘들다고 판단하여 선택한 꼼수였다.
권능의 범위를 최대한 축소해 위력을 강화한다. 이것이라면 아무리 레다라고 해도 쉬이 상쇄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다.
녀석과 똑같은 주교, 유다도 똑같이 당하지 않았던가!
“호오. 이것이 바로 그 겨울의 권능이로군. 대제사장이 그렇게 노래를 불러대던…. 하지만 허튼짓!”
레다는 엘릭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여유로워 보였다.
몸을 둘러싼 마기가 마치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뻗쳐나갔다. 수십 수백 갈래로 쪼개진 마기는 겨울 폭풍을 잇달아 빗겨내는 것으로도 모자라, 오히려 칼날처럼 예리하게 안쪽으로 파고 들어가 공격을 흩어놓기까지 했다.
그러고는 마치 종이의 양옆을 잡아서 찢는 것처럼, 겨울 폭풍도 똑같이 찢어버렸다.
파아앙!
휘휘휘…!
겨울 폭풍이 갈라져 흩어지고.
엘릭은 그 안에서 다시 두 자루의 얼음창을 뽑아 여러 번의 창격을 가하고 있었다.
촤촤촤촤-
퍼퍼퍼펑!
나하트람의 시야에 입각해서 펼치는 창격은 아주 날카로웠다.
빈틈을 교묘하게 파고들어서 상대를 완전히 갈라버리고자 했다.
창날이 궤적을 그릴 때마다 크고 작은 겨울 폭풍이 생겨났다가 사라지길 반복했고, 다른 방향에서는 얼음 화살이 무더기로 쏟아졌으며 냉혹의 사슬도 연거푸 튀어나왔다.
단 한 번.
딱 한 번만 녀석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다면, 빙독을 강제로 주입해서 조금 더 전력적 우위를 가져갈 수 있을 것 같건만.
레다는 절대 빈틈을 보여주지 않았다.
너무나 여유롭게 엘릭의 공격을 흘리고, 부수고, 반격을 가하면서 오히려 엘릭을 궁지에 몰아넣고자 했다.
마법?
강체술?
레다에게 그런 건 전혀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광소(狂笑)에 가까운 파안대소를 터뜨리기까지 했다.
“그렇지 않아도 용을 잡고 나면 메르빙거, 너를 찾으러 다닐 생각이었다만…. 이렇게 뜻하지 않게 한자리에 모이게 될 줄이야. 아주 좋아, 아주. 처음으로 세상에 나오자마자 이렇게 복이 두 개나 넝쿨째 굴러들어오다니.”
파앗, 파앗!
레다가 양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공간이 일렁이면서 두 자루의 검이 튀어나왔다.
시미터. 날이 완만하게 굽은 두 칼을 날개처럼 뻗어왔다. 녀석이 시미터를 휘두를 때마다 칼바람이 수도 없이 불어닥쳤다. 바닥이 긁히고, 동굴 벽에 상처가 마구잡이로 났다.
까가가강!
엘릭이 찌른 창날이 허망하게 막히고, 시미터가 아래에서 위로 사선을 그려왔다.
엘릭이 그걸 가까스로 피하려 치면 이번에는 반대 방향에서 검이 날아들었다.
차창! 퍽!
차창! 퍼걱!
게다가 일격 하나하나에 실린 힘은 왜 그리도 센 건지. 몇 번을 부딪치고 나면 얼음창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깨져버리기 일쑤였다.
심안을 활짝 열어도.
아귀감으로 아무리 쫓아보려 해도.
보이고 느껴지는 것이라고는 하나같이 칙칙한 어둠 뿐이기까지 해서 도저히 녀석의 움직임을 쫓기도 힘들었다.
압도.
엘릭은 계속 밀려나고 있었다.
마왕은 그만큼이나 강했다.
마음에 안 들어, 아주….
두근!
휼의 사념은 그런 상황이 답답하다는 듯이 불만에 찬 어투로 중얼거렸고, 이에 대답하는 것처럼 심장도 크게 맥박쳤다.
나하트람이었다.
메피스토의 말에도 별다른 대답을 해주지 않던 그였지만, 지금만큼은 이런 상황이 갑갑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한때.
동대륙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휼의 사념에게도.
오토 한의 뒤를 따라 대륙을 메르빙거의 깃발로 덮었던 나하트람에게도.
이런 상황은 도저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이겠지.
고작 ‘마왕’ 따위에게!
콰아아앙!
“큭…!”
커다란 폭발이 일었다.
두 자루의 얼음창이 한꺼번에 깨져버릴 정도의 폭발력.
엘릭이 튕겨나 저만치 아래의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딱딱한 바닥. 등뼈가 박살 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큰 고통이 찾아왔다.
레다가 그런 엘릭을 바로 뒤쫓아와 시미터를 이쪽으로 뻗었다.
퍽!
엘릭은 비명을 지르는 아귀감에 따라 고개를 황급히 옆으로 돌렸다. 시미터가 코앞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가고 뒤쪽 벽에 틀어박혔다.
하지만 레다의 무기는 쌍검. 아직 한 자루가 더 남았으니.
아귀감이 다시 비명을 질렀다.
여태껏 엘릭이 느꼈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비명. 혹은 절규.
귀가 떨어져 나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너무 컸지만, 문제는 거기 어디에도 어떻게 움직이라는 속삭임 따위는 없었다는 점이었다.
“아주 재미있었다.”
마치 이것만은 피할 수 없을 거라는 듯.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하려는 듯!
“그러니 이만 죽어라.”
쐐애애액!
레다는 동굴을 가득 메우고 있는 광기와는 전혀 다른 담백한 말투로 웃으면서.
남은 시미터를 엘릭의 미간이 있는 방향으로 그대로 내리찍었다.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엘릭이 어떻게 언령을 발동할 새도, 권능을 부릴 새도 없었다.
바로 그때.
화아악!
갑자기 뒤쪽에서 후끈한 느낌이 풍겼다. 맹렬한 속도로 공기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엘릭이 자랑하는 겨울 폭풍과는 전혀 다른 열기.
거대한 불덩이. 지옥의 불이라는 헬파이어를 동반한 용의 숨결이었다.
레다는 엘릭을 찌르려던 시미터의 궤적을 도중에 돌려야만 했다.
퍼어엉!
콰콰콰콰!
불덩이는 시미터와 부딪치자마자 너무 쉽게 부서져 사방에 흩어졌다. 빙판 위로 불똥이 떨어지면서 불꽃이 확 타오르거나, 수증기가 흩날렸다.
그리고 그 너머.
용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여전히 피투성이의 끔찍한 몰골을 한 채로.
제대로 지혈을 하지 못한 목에서는 여전히 핏물이 철철 흘러넘치고 있었다. 갈라진 살갗과 근육 사이로 뼈와 드래곤 하트가 얼추 보였다.
“죽은 줄 알았는데. 아직 숨통이 붙어 있나 보지?”
【떨… 어져라…!】
용은 억지로 목소리를 쥐어짜는 것만 같았다. 별다른 힘이 느껴지질 않았다.
【우리의… 창시… 자… 곁에서.】
용은 어떻게든 엘릭을 지켜내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내비쳤다.
“창시자라.”
레다는 여전히 그런 용의 반항을 아주 우습다는 투로 보고 있었다.
“그렇게 소중하면 어디 한번 해봐. 그럴 힘도 없겠지만.”
콰르르릉-
촤아아악!
레다는 그렇게 히죽 웃는 투 그대로 시미터를 거세게 내리쳤다. 그러자 천장에서부터 뭉친 마기가 고스란히 벼락처럼 떨어지면서 용의 목덜미에 난 상처를 더 깊게 만들었다.
푸우우!
피 분수가 미친 듯이 솟구치고.
크어어어…!
용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동굴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이런 상황에서.
엘릭과 용, 둘만으로 레다를 완전히 상대하기란 요원한 것처럼 보였다.
『이대로는 다 뒈질 것 같군.』
그때, 여태껏 여유롭게 사태를 관망하고만 있던 메피스토가 팔짱을 낀 채로 이죽거렸다.
『어떠냐. 본 왕이 도와주랴?』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