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용의 창시자
“크아아악!”
여기저기서 고통에 몸부림치는 소리가 울렸다.
창날 파편에 얻어맞은 마족들이 내뱉는 비명.
폭발에 휘말린 이들은 팔다리가 날아가서 그렇다 치더라도, 그렇지 않은 이들조차 엄청난 통증을 느끼는 것 같았다. 몇몇은 아예 파편에 얻은 맞은 부위가 흐물흐물 녹아내리기까지 했으니!
“설마…! 파사(破邪)?”
위노다는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파사. 현정. 축귀. 구마….
하나하나 전부 마족들에게 있어서 극독과도 같은 마법의 성질들.
하지만 통달하기가 극히 어려워 7써클 이상의 대마도사 급이 아니라면 쉽게 발현하기 힘들다는 마법을 이렇게 대규모로 뿌려 낸다고?
그 순간, 위노다는 여기 있어서는 안 될 자를 떠올렸다.
메르빙거가, 설마…?
두두두두!
“마족들을 몰아내라!”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말발굽이 대지를 두들기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곧 숲속에서부터 일단의 무리가 나타났다.
그들의 머리 위로 나부끼는 깃발이 위노다의 눈에 내리꽂혔다.
그가 예상했던 대로였다.
가증스러운 메르빙거의 깃발. 별의 종군이 바로 이곳에 나타나 있었다!
“마, 막아!”
위노다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러자 혼란에 빠져있던 마족들이 어떻게든 군열을 갖추려 했지만, 그보다 별의 종군이 한 발 더 빨랐다.
“푸른 사자들이여, 우리의 용맹함을 보이라.”
헤르만을 비롯한 청사자군이 크게 원호를 그리면서 마족 진영의 옆구리를 그대로 들이쳤다.
기사 집단답게, 전마(戰馬)를 다루는 솜씨는 가히 신기에 가까울 지경이었다.
콰콰쾅!
두두두-
악다구니를 내지르면서 그들을 어떻게든 막아보려던 마족들이 단박에 허물어졌다. 청사자군의 거친 말발굽이 우왕좌왕하는 녀석들을 짓밟으면서 기세를 한껏 더했다.
“아아악!”
“크윽! 빌어먹을 인간 놈들… 컥!”
마기는 어떻게 발동해 볼 새도 없었다.
애당초 그리고리는 광신적인 종교 집단에 가까웠지, 인간이 자랑하는 군대를 잘 갖추지는 못했다. 30여 년 전의 대마전쟁에서도 그랬다. 마족 개개인의 기량은 인간보다 뛰어날지 몰라도, 마군(魔軍)의 군열은 그렇지 못해 집단전에서는 항상 패배를 면치 못했다.
헤르만도 당시의 그런 경험을 잘 숙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놈들에게 정신을 차릴 여유 따위를 주지 않으려 했다.
다행히 엘릭이 랜스에다 새겨준 파사 기능 덕분에 청사자군은 더욱더 활약할 수 있었다.
“푸르딩딩한 놈들에게 뒤질 수는 없지!”
“가자, 마족 놈들 대가리 깨러!”
“아버지의 이름으로!”
“아버지의 이름으로!”
뒤이어 난입한 것은 바로 블랙 스컬이었다.
애당초 군율이 엄한 기사단인 청사자군과는 달리 자유분방한 성격이 짙은 용병단인 그들은 전투 방식부터가 달랐다.
난전(亂戰)을 시도했다.
한 곳에 대기하고 있다가, 청사자군이 마족들을 그쪽으로 몰아주면 집단 난타를 가하는 것이다.
쾅, 쾅, 쾅!
단장인 카로트가 날뛰고, 헤이즈가 뒤따라서 슬렛지 헤머를 이리저리 휘두르는 것이 보였다.
해머가 들릴 때마다 피 분수가 튀었다. 머리통이 박살 난 마족들이 쓰러지다가 이윽고 마기로 흩어지는 광경이 곳곳에서 속출했다.
“아, 안 돼…!”
위노다는 이래서는 정말 위험하다는 생각에 어떻게든 별의 종군을 막을 방법을 모색하고자 했지만.
콰아앙!
고심해볼 여유도 없이 갑자기 가슴팍으로 날아든 기습을 피하느라 집중이 흐트러졌다.
바로 눈앞에.
별의 종군의 간부로 보이는 자가 있었다.
무뚝뚝한 표정. 강렬한 눈빛. 아테가 그를 보면서 눈을 빛내고 있었다.
“네가 이놈들의 머리군.”
위노다는 한순간 아테가 자신의 정체를 어떻게 알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우선 그런 건 뒤로 던져둬야만 했다.
아테의 공세가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콰콰쾅, 콰앙!
쿠쿠쿠-
아테는 그동안 엘릭에게 배운 기술들을 맘껏 뽐내려는 것인지, 아주 거세게 검을 휘몰아쳤으니.
아니, 자세히 본다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그것은 분명히 엘릭에게서 배운 것과 비슷하되, 조금 궤를 달리했으니까.
검에서 돌풍이 휘몰아쳤다. 바람결 사이사이로 붉은 불빛이 튀어 오르고, 샛노란 뇌전이 작렬했다. 그러다 언제부턴가 불빛과 뇌전은 아테의 양손에서부터 소용돌이를 쳤다.
화르르륵!
파직, 파지지직-
발끝에서는 화광(火光)이 타오르면서 강렬한 열기를 발산하고.
검 끝에서는 뇌광(雷光)이 번뜩이면서 서로 맞물려 돌아갔다.
붉고 샛노란 열기가 아테를 중심으로 휘몰아쳤다.
여태껏 있었던 숱한 전투에서 아테가 단 한 번도 선보이지 않았던 새로운 기예.
-당연히 내 사람이지. 뭔 이런 당연한 소리를 해?
-너도 발 벗고 나서서 브라이언을 돕고 내 일을 도왔잖아. 그럼 당연히 나도 가주로서 널 품어야 하는 거 아냐?
-너도 숨기고 있는 거, 나중에 말해줘.
엘릭이 쿠란시빌 자작을 거꾸러뜨릴 때 했던 말이 지금껏 아테의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알고 있었어.’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울림이 되어 심장을 가득 채웠으니.
불과 벼락을 한꺼번에 다루고 있는 지금의 아테 모습은 마치 신화 속에 나타난 용장을 보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모습은 마족들에게 한때 공포로 다가오기도 했었던바.
“화, 화뢰(火雷)…? 호문클루스! 하지만 그건 분명히 30년 전에 우스던 메르빙거와 함께 소멸했…!”
위노다가 비명을 질렀지만.
쿠르르릉-
아테는 대답해줄 이유 따윈 없다는 듯, 세차게 검을 뿌렸다. 그러자 대기가 거세게 긁히면서 엄청난 우렛소리가 났다.
* * *
한창 전투가 벌어진 사이.
엘릭은 말을 몰아 단번에 둥지의 입구에 다다랐다.
보르푸르 족이 성지라고 여기는 곳. 조금 전 엘릭이 망령의 눈을 빌어 이미 탐험했던 곳이기도 했다.
『마기가 아주 완벽히 강해졌는데?』
메피스토가 던진 말에 엘릭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동굴 안쪽에서부터 불어닥치는 마력풍이 강해져도 너무 강해져 있었다.
그만큼 격렬한 다툼이 벌어지고 있다는 뜻.
하지만 마력풍의 태반이 마기였고, 용의 마력은 거의 느껴지질 않았다.
승부의 추가 한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뜻이었다.
“【빨라져라】.”
엘릭은 헤이스트 마법을 발동해 동굴 입구를 빠르게 통과하면서 이를 악물었다.
‘쉽지 않겠는데.’
동굴을 통과하면 통과할수록 마력풍은 자꾸만 거세졌다. 제대로 서 있기는커녕, 그 속을 걷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망령의 눈으로 살펴봤을 때도 그랬지만, 현재 용을 상대하고 있는 마왕은 절대 만만치 않은 개체인 게 분명했다.
‘그럼, 역시….’
『또 그거로군.』
메피스토는 어느새 두 눈이 보라색 광망으로 물드는 엘릭을 보면서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나하트람.』
츠츠츠-
메피스토의 말마따나, 엘릭은 다시 ‘북풍’을 전개하고 있었다.
마력회로를 최대로 발동시키고, 그 속에 담긴 망령 중에서 가장 협조적이면서도 강한 존재를 끌어냈다. 오토 한의 옆을 지켰다던 기수(旗手)가 눈을 떴다.
엘릭을 둘러싼 기도가 변했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얼음창이 들려 있었다.
기수 나하트람이 항상 챙기고 다니던 깃발은 그가 자랑하는 주 무기이기도 했으니.
깃발이라는 독특한 무기를 다루기 위해서는 봉술과 창술을 포함하여 때에 따라서는 채찍술이나 포박술, 검술 따위에도 두루 능통해야만 했다.
그런 뜻에서 나하트람이 빙의한 엘릭의 손에 얼음창이 들리는 것도 어찌 보면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그놈, 본 왕의 말도 들을 수 있나?』
메피스토는 자신 외에 동시대의 인물이 깨어났다는 사실에 몹시 흥미로워하는 얼굴이었다.
골치 아픈 적이긴 했어도, 반가운 마음은 전혀 다른 종류였으니까.
하지만 엘릭은 묵묵히 복도를 달리기만 할 뿐, 그쪽으로 시선도 주지 않았다.
『듣고 있군.』
메피스토는 그런 엘릭을 빤히 쳐다보다가 곧 피식 웃었다.
『다른 놈들도 듣고 있나?』
엘릭은 여전히 아무 답변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메피스토는 이제 알고 있었다.
자신이 던지는 말들은 다른 6대 망령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모두 잠든 척, 기억이 없는 척하고 있었지만, 다른 어느 누구보다 메피스토를 지켜보고 있을 게 분명했다. 메피스토, 그가 6대 망령들에게 깊은 관심을 보이는 것처럼.
『재미있군, 아주 재미있어….』
메피스토가 속뜻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동안.
탁!
엘릭은 어느새 미로 같던 복도를 모두 지나 동혈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쾅! 콰콰쾅!
콰르르르-
우르르릉!
그리고 동시에 동굴이 이대로 무너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거친 격전을 볼 수 있었다.
마왕이 용을 몰아치고 있었다.
쿠오오오!
마왕이 허공에다 가볍게 손짓을 할 때마다 잔뜩 응축된 마기가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마기는 칼바람이 되고, 창날이 되었다. 용의 피륙을 가르고, 헤집고, 꿰뚫어서 계속 궁지로 몰아갔으니.
용이 고통에 울부짖었지만, 마왕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압박을 가했다. 용의 머리에 올라타 손으로 내려치고, 또 내려쳤다.
쾅, 쾅! 그런 소리가 날 때마다 용은 마치 어느 구멍 속에 욱여넣어지는 것처럼 되어 단숨에 육신이 너덜너덜해졌다. 비늘이 튀어 오르고, 부서진 살점이 아래로 쏟아졌다. 이미 둥지는 온통 피바다가 되어 있었다.
“…이거로군.”
그러다 마왕이 손날을 바짝 세우면서 용의 길쭉한 목덜미를 갈랐다.
그 안쪽.
심장이라기에는 보석처럼 붉게 반짝이고, 보석이라고 하기에는 거칠게 뛰고 있는 심장이 보였다.
드래곤 하트.
용의 마력과 생명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마력기관이 드러났다.
꾸우우우…!
용이 안 된다며 길게 울부짖었다. 마왕을 떨쳐내기 위해 이리저리 몸뚱이를 뒤척였지만, 어느새 땅밑에서부터 올라온 마기의 사슬이 몸뚱이를 칭칭 감아 구속하고 있었다.
마왕이 송곳니를 훤히 드러내며 차갑게 웃었다.
그러고는 드래곤 하트를 가져가기 위해 손을 뻗으려는데, 엘릭이 나타났다.
“【꿰뚫어라】.”
피잉-
얼음창이 섬광이 되어 허공을 꿰뚫었다. 아주 조용하면서도 쏜살같이. 목표는 마왕의 관자놀이. 읽지 못한다면 즉사하고 말 위치였다.
마왕은 귀찮은 것이 나타났다는 생각에 파리를 내쫓듯이 그쪽으로 손을 뻗어 공격을 파훼시키려 했지만.
“…!”
그는 뒤늦게 얼음창에 실린 힘이 절대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얼굴을 뒤로 젖혔다.
이미 피하기에는 늦은 상태였다.
촤아악!
결국 섬광은 아슬아슬하게 그의 볼을 할퀴고 지나가고.
콰아앙!
얼음창이 뒤쪽에 있던 천장에 틀어박혔다.
창이 부서지면서 사방으로 흩어진 얼음 조각과 가루가 환한 빛을 뿌렸다. 마족들을 처음 사냥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파사의 기운이 소용돌이치면서 마왕이 곳곳에 남겨뒀던 마기들이 단숨에 정화되었다.
주륵!
마왕은 뺨을 타고 흐르는 핏물을 손등으로 훔치다가, 인상을 차갑게 굳혔다.
그러고는 시선을 입구 쪽으로 돌렸다.
그곳에.
엘릭이 차갑게 눈을 번뜩이면서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츠츠츠-
그의 손에 새로운 얼음창이 잡혔다.
그의 발끝에서는 그림자가 거칠게 꿀렁이고 있었다. 모든 인장이 극한으로 발동하면서 휼의 사념이 얼마든지 날뛸 수 있다며 그를 졸라대는 중이었다.
【메르… 빙… 거…!】
엘릭을 알아본 용의 울음소리가 잔잔하게 울리는 가운데.
“안 되겠군.”
마왕 레다는 드래곤 하트를 꺼내려던 손길을 거두고, 대신에 마기로 이뤄진 날개를 활짝 펼쳤다. 오른쪽 날개 끝, 아자젤로부터 받은 인장이 환하게 빛났다. 왼쪽 날갯죽지, 그만의 고유 인장이 칙칙한 색을 냈다.
유명(幽冥).
‘깊숙하고 어둡다’는 뜻만큼이나 강렬한 마기가 마치 촉수처럼 배배 꼬인 채로 엘릭에게 달려들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