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용의 창시자
“용의 주인?”
“용? 그게 무슨 소리요?”
바투가 용혈에 취했다는 말만 들었던 세일러는 처음 듣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고.
헤르만 역시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에 적잖게 당혹해하는 눈치였다.
자고로 현시대에 살아가는 이들에게 있어서 용이란, 마법사가 아니고서야 옛날 옛적 동화에서나 들을 수 있는 단어였으니까.
세일러는 그런 헤르만에게 보르푸르 족이 가진 전설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설명해주었다.
스스로를 용의 자손이라 믿는 보르푸르 족은 오랫동안 수호룡의 둥지를 성지로 삼아 지켜왔노라고.
헤르만은 그제야 말의 맥락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럼 그 용의 주인이라는 게…?”
사르나이는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아요.”
“가뜩이나 잘 달리고 있는 호랑이에게 날개까지 달아주는 격이 되겠군.”
헤르만은 순간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정황상 여기서 말하는 용의 주인이라는 것이 누구인지 뻔했다.
엘릭 메르빙거.
“용의 힘을 우리더러 가져가라는 말이 이런 뜻이었구나.”
세일러가 던진 질문에 사르나이는 다시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창천의 신은 지켜보고 인도하는 분이세요.”
“지켜보고 인도한다?”
“예. 신명대로 세상을 뒤덮은 하늘처럼 포근하고 만물을 무심히 살펴보시기만 하실 뿐이시죠. 그냥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창천이니까요.”
세일러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신이 가진 신명(神名)은 그 신이 가진 속성과 신위를 의미한다.
그 속에 담긴 개념적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
그것이 신앙으로 가는 지름길이니.
사르나이가 모신다는 창천의 신도 일반적으로 알려진 하늘처럼 이해하면 될 듯싶었다.
“하지만 그분께서도 이따금 변덕을 부리실 때가 있으셔서… 뭔가를 간절히 바라는 자들에게 자신의 눈을 빌려주시는 경우가 왕왕 있어요. 그리고 그들을 그곳으로 인도하였죠.”
“음.”
“허!”
일반인들은 전혀 이해할 수도, 닿을 수도 없을 신화적인 이야기. 세일러와 헤르만은 그 속에 흠뻑 젖어 들었다.
“그런 와중에 용이 간절히 인도를 바랐고, 신께서는 그것을 들어주겠노라고 허락하시었어요. 신탁은 그래서 내려온 것이랍니다.”
“음?”
“자, 잠깐! 그 말은 용이 살아있다는 말로 들리오만?”
헤르만은 적잖게 당황한 눈치가 되었지만, 사르나이는 그것이 문제가 되느냐는 투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수호룡은 살아 계세요. 비록 옛 위엄과 능력은 대부분 잃어버리셨지만. 새로운 주인이 나타나길 바라는 간절한 소망이, 그분을 기다려 무언가를 전해 주어야 한다는 의무가, 진즉에 이 땅을 떠났어야 할 그분을 이곳에 강제로 얽매이게 만들어버렸어요.”
“그것을 안타깝게 여긴 창천의 신이 소망을 들어주기로 했다는 거로군?”
“저도 정확한 내막은 알지 못해요. 그저 제가 모시는 분과 옛 용왕 간에 어떤 맹약이 이뤄져 있었다는 것 외에는. 문제는 바투가….”
“바투가 도중에 끼었다?”
“바투는 수호룡께 피를 받았어요. 그의 용맹함을 높이 산 수호룡께서 당신의 피를 나누어 줄 테니 약속된 주인을 찾아오라 명하신 거였죠.”
세일러가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듣지 않았군.”
“…네.”
“아니, 오히려 용의 주인을 죽이려고 하는 건가? 그럼 제국으로 건너가려 한 이유도?”
사르나이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일러는 혀를 찼다.
이제야 얼추 이야기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것 같았다.
바투는 수호룡으로부터 힘을 받았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수호룡이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터전을 지켜준 보르푸르 족에게 감사하여 내려준 축복이었을 뿐.
그러면서 한 가지 부탁을 했을 것이다. 창천의 신은 곧 올 것이라 말하였지만, 오랫동안 오지 않았던 인도자를 찾아와달라고.
바투는 그러겠노라고 약속했지만, 그의 성격상 그것을 제대로 이행할 생각 따윈 추호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부족을 통합하고, 제국으로 넘어갔다.
용의 주인을 데려가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를 죽여, 혼자만이 용의 힘을 취하기 위해서였다.
문제는 바투가 엘릭을 그냥 지나쳐버렸다는 점이었다.
적사자군이 파놓은 함정에서 부딪쳤을 때. 바투와 엘릭은 서로 같은 공간에 있었으면서도 부딪치지 않았다. 만약 바투가 엘릭을 알아봤다면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사르나이가 여기에 대해 엘릭에게 언질만 줬어도. 바투가 눈앞에서 놓치는 일 따윈 없었을 것이다.
여하튼.
그로 인해 엘릭과 별의 종군은 난파선에 올라탄 것처럼 적진 한가운데를 표류하게 되었으니.
자연스레 세일러를 따라 사르나이가 있는 성지로 오게 된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라 할 수 있었다.
전부 사르나이가 창천의 눈을 빌려 안배한 인도인 것이다.
그래서 전부 의도했던 대로 일이 마무리가 되나 싶었는데.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어요.”
“생각지도 못한 불청객이 개입했군?”
사르나이는 고개를 끄덕였고, 세일러와 헤르만은 그것이야말로 이제 자신들이 잡아야 할 대상이라는 것을 알았다.
마족.
그리고리가 성지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일단 그 용의 주인인지 뭔지 하는 칭호부터 후계자님에게 제대로 씌워주고 나서 생각해봐야겠어.”
헤르만은 여전히 수호룡의 인도가 뭔지, 창천의 신이 내린 신탁이 뭔지, 이해하기 힘들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상황을 아주 간단하게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엘릭에게 유리한 것을 쥐여주자.
그럼 모두에게 좋지 않겠나?
“도착했군.”
바로 그때, 숲을 따라 알싸한 향기가 느껴졌다.
칙칙하고, 피부가 따끔거리는 느낌.
인간에게는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힘이었다.
마기였다.
“전원, 거창!”
처처처척!
헤르만의 외침에 따라, 기사단이 일제히 랜스를 높이 들었다.
출발하기 직전. 엘릭이 직접 일일이 마법 문자를 새겨주었던 랜스.
투창 시, 저절로 폭발하도록 설계된 일회용 아티팩트였다.
반짝!
창날이, 햇살에 부딪히며 날카로운 이빨을 훤히 드러냈다.
* * *
쾅!
콰앙…!
우르르르-
마족 위노나는 ‘성지’에서부터 느껴지는 막강한 위력에 혀를 찼다.
“역시… 레다 님은 대단하시군.”
주교 레다.
그리고리 내에서도 단 다섯 자리… 아니, 이제는 네 자리만 남아있는 주교직은 본디 아자젤을 받아들이도록 설계된 ‘그릇’에만 주어진 명예로운 자리였다.
그리고 그런 만큼 주교직에 앉은 이들은 아자젤을 따라 독보적인 힘을 자랑했으니.
그 때문에 조직 내에서 최상위 서열을 맡은 대제사장이라 할지라도, 주교들에게만큼은 함부로 하지 못하는 게 사실이었다.
실제로 레다는 그런 사실을 입증이라도 하듯, 자신의 힘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용의 둥지를 이루고 있는 거대한 협곡에 뒤덮여 있는데도 불구하고, 격전으로 인한 여진이 여기까지 느껴질 정도였으니.
어떨 때는 금세 땅이 아래로 꺼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격하기까지 했다.
특히 협곡에서 불어오는 바람에는 짙은 마기가 실려 있었으니.
이미 계급이 떨어지는 몇몇 마족들은 안색이 창백하게 바랜 지 오래였다.
저러다 옆에서 누군가 툭 건드리면 졸도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위노다는 간부 서열에 해당하는데도 불구하고, 저들을 도와줄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제 코가 석 자인데 대체 누굴 도와준단 말인가?
그저 한시라도 빨리 용 사냥이 끝났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성역을 지킨다는 놈들도 곧 사실을 눈치챌 텐데. 흠!”
아니, 이미 알았을 것이 분명하다.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이 둥지를 찾기 위해 조직 차원에서 답사가 수시로 이뤄진 데다, 이만한 인력이 움직였는데 눈에 띄지 않기를 바란다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저들에게 ‘창천의 눈’을 가진 신녀가 있다는 사실은 애당초 비밀도 아니지 않은가?
물론, 위노다가 보르푸르 족의 눈치를 보는 건 절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번에 12개의 산악 부족들을 통합한 바투와 그리고리 간에는 상호 불간섭 조약이 맺어진 상태.
그런데 그곳에 찍힌 도장의 인주가 마르기도 전에 이런 일을 저질렀단 사실을 바투가 알게 된다면?
이제야 겨우 30여 년 전의 치욕을 벗어던지고, 본격적으로 제국 공략에 나서려는 이때 괜히 발목만 붙잡힐 수 있었다.
‘뭐, 안 되면 나중에 따로 싹 정리해버리면 그만이겠지.’
그렇기에 위노다는 때에 따라서는 이 근방을 싹 정리해버릴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살인멸구.
자고로 죽여서 입을 막는 것만큼 확실한 것도 없으니.
반항 따윈 걱정 없었다.
지금 그들이 가진 전력만 해도 그깟 작은 마을 따위쯤은 쉽게 짓밟아 버릴 수준이었으니.
‘그 뒤에는 사라졌다는 메르빙거 놈도 찾아야 하고…. 아주 바쁘군. 바빠.’
주교 레다와 자신들이 부여받은 임무는 용 사냥과 그 후방의 정리.
아자젤이 강림하는데 가장 필요한 마력의 부족분을 채우기 위해 용을 사냥하고, 산악 지대 어딘가에 숨어들었다는 메르빙거도 찾아서 반드시 그 씨를 말려야만 한다.
하나 남은 메르빙거가 주교 유다를 죽였다는 사실은 이미 그리고리 내에서도 익히 알려진 사실.
대제사장이 그릇이 하나 깨졌다며 길길이 날뛴 것도 이미 조직 내에서 모르는 마족이 없었다.
그러니 현재는 용 사냥뿐만 아니라, 메르빙거 사냥도 조직에서 최우선 과제로 삼은 상태였다.
결국 이 일을 한꺼번에 맡게 된 위노다로서는 계속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위노다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생각보다 사냥이 길어지시는데….’
수색대가 보고하기로, 이곳에 남은 용은 이미 원래의 권능을 다 잃은 지 오래라 주교급이 나서면 금세 사냥이 가능할 것이라고 했건만.
이미 예상 시간을 한참 초과한 지 오래였다.
원래대로라면 즉각 지원군을 둥지 안으로 투입해야 할 테지만… 문제는 레다가 절대 그런 걸 용납하는 성격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어떻게 한다?’
위노다의 고심이 살짝 깊어지던 그때.
“저, 위노다 님.”
그는 갑자기 수하의 부름에 시선을 그쪽으로 돌렸다.
“왜 그러지?”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뭐가 말이냐?”
위노다는 안색이 딱딱하게 굳은 수하를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녀석은 레다 휘하 마군에서 몇 안 되는 지낭 역할을 맡는 참모였다.
“공기가… 너무 조용합니다.”
“음?”
위노다는 눈을 크게 떴다.
확실히 뭔가 이상했다.
풀벌레 소리 따윈 그들이 움직일 때부터 느껴지지 않긴 했다. 마기는 일반적인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법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느낌’이라는 것이 있었다.
너무 깊디깊은 적막.
마치 폭풍이 불기 전의 고요한 밤을 보는 것 같은….
두두두…!
그러던 그때, 적막 너머로 땅이 울리는 소리가 미약하게 들렸다.
혹시 용의 둥지에서 울리는 여진인가 했지만, 아니었다.
진원지의 방향이 달랐다.
이건 마치 말이 떼로 달리는 것 같은 소리였다.
“기습이다! 모두 방어 진형을 갖추…!”
위노다가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수하들도 황급히 움직이려던 바로 그때.
쉬쉬쉬쉭-
하늘을 따라 투창이 일제히 이쪽으로 쏟아지는 게 보였다.
족히 수백 자루는 되어 보이는 투창.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촤촤촤촤!
퍼퍼퍼펑-
이쪽에 다다를 때쯤, 투창 하나하나가 작은 폭발과 함께 일제히 열 개 이상의 파편으로 분리되었으니!
아주 작고 날카롭기 짝이 없는 수천수만 개의 창날 파편이, 소나기처럼 단숨에 마족들을 뒤덮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