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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201화 (200/405)

201화

용의 창시자

두두두!

성지로 향하는 길.

먼지구름을 자욱하게 일으키며 내달리는 별의 종군 뒤로, 블랙 스컬을 상징하는 칼 꽂힌 해골 문양의 깃발이 흔들리고 있었다.

“멋진데?”

블랙 스컬 단장, 카로트가 저 멀리 앞서서 달리는 엘릭을 보며 던진 말에 헤이즈는 눈살을 찌푸렸다.

“멋지긴 뭘요. 저는 보는 내내 조마조마해 죽겠는데.”

엘릭과 쿠란시빌 자작이 부딪치는 내내.

헤이즈는 몇 번이나 끼어들까 말까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슬렛지해머를 매만지는 손에 힘이 몇 번이나 들어갔다가 풀렸으니까.

하지만 결국 그녀는 나서지 않았다.

다행히 엘릭이 쿠란시빌 자작을 압도했던 데다가, 그녀 역시 메르빙거의 일원으로서 가주인 엘릭의 권위를 지켜주려 애썼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대단한 건 대단한 거지. 저만한 나이에 저렇게 조직을 휘어잡는 위엄을 갖춘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카로트는 눈을 가늘게 좁히면서 엘릭의 등을 응시했다.

그 역시 어린 시절 고아로 자라면서, 세일러로부터 검을 배우면서, 그리고 수많은 용병단을 전전하고 친구들을 모아 용병단을 만들면서, 수많은 종류의 사람들을 보아왔고, 그중에 뛰어난 리더라 할 만한 자들도 많이 보아왔다.

엘릭은 그중에서도 단연 상위에 꼽힐 만한 자였다.

아직 젊어서 그런지 미숙하고 과격한 면이 없잖아 있는 건 사실이었지만.

오히려 그런 면모가 젊은 인재들에게는 더더욱 영웅적인 풍모로 다가왔다.

‘나도 한 십 년만 더 젊었으면 혹했을 것 같은데?’

이미 블랙 스컬 내에서도 이번 사건을 계기로 엘릭을 보는 시선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헤이즈로부터 워낙에 ‘철없는’ 동생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까닭에 선입견이 없을 수가 없었는데.

이번에 완전히 그 선입견이 벗겨지고, ‘오, 제법인데?’하며 호의적인 시선을 던지는 이들이 꽤 많아졌던 것이다.

헤이즈는 자신이 늘 ‘형제’이자 ‘자매’라고 부르는 동료들이 친동생을 그렇게 높이 평가해준다는 사실이 내심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는 게 사실이었다.

‘엘릭….’

헤이즈는 엘릭과 나이 차이가 제법 많이 난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 시절에 겪어야 했던 가문의 몰락 과정에 대해서 엘릭보다 더 많이 기억하고 있고, 그 이면에 숨겨진 내용에 대해서도 꽤 많이 알고 있었다.

당시에 황실이 지금보다 얼마나 더 추악했는지.

프란츠 백작가가 얼마나 탐욕스러웠는지.

메르빙거의 우산이 더 이상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여 등졌던 곳이 얼마나 많았는지.

그것을 모두 소상히 지켜보았고, 그 가운데 어린 엘릭을 보호해야만 했다.

그래서 노파심이 저절로 드는 게 사실이었다.

앞으로 더 많은 추악한 일들을 보고, 겪으며, 넘어야 할 텐데.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을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외유내강(外柔內剛).

겉보기에는 엘릭의 성격이 유들유들하다고 해도, 그 속은 아주 단단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런 동생이 너무 아픈 길로는 가지 않기를 바라는 건 욕심인 걸까?

“앞으로가 더 관건인 거 알지?”

“그래서 더 걱정이에요. 워낙에 사고뭉치인 아이라….”

“흐흐. 마음에도 없는 걱정 하시네.”

하지만 조마조마하기만 한 헤이즈와 달리, 카로트는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마족 사냥이라…. 이번 전쟁, 어쩌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재미있을지도 모르겠는데.”

‘아버지’ 세일러의 구원(舊怨)이 적사자군에 있다 하여 참석한 전쟁이었지만.

카로트는 어쩌면 더 흥미로운 것들을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요즘 들어서 그만 싸돌아다니고 슬슬 정착하고 싶다는 의견도 많았었는데. 나쁘지 않을지도.’

헤이즈가 알면 용병 소굴로 만들 생각이냐며 기겁할 만한 생각을 잘도 하면서.

카로트는 말의 고삐에 힘을 바짝 주었다.

“이럇!”

* * *

한편.

블랙 스컬과 마찬가지로, 엘릭에 대한 평가가 바뀐 곳이 한 군데 더 있었다.

“다들 봤겠지?”

“….”

“….”

“….”

카나타. 청사자군 바일 가문의 청양 기사단장이 던진 말에 수하 기사들은 하나같이 입을 꾹 다물었다.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가주님께서 내리신 결정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 이번에도 여실히 드러났다.”

청양 기사단을 비롯해서 바일 가문 내에는 암암리에 엘릭에 대한 불만이 적잖게 퍼져 있었던 게 사실이었다.

바일 가문이 그동안 지녔던 수치를 온 세상에 까발린 것으로도 모자라, 푸른 매의 공동 전인이 되면서 응당 자신들에게로 되돌아갔어야 할 청사자 후계자 자리도 가로챘다고 생각했으니까.

사자의 자리는 검을 든 자로서, 무도를 걷는 자로서 모두가 바라마지 않는 자리.

그것을 마법사가 가져간다는 게 도저히 그들의 상식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몇몇은 아예 집단 항명을 하여 헤르만의 결정을 바꾸도록 하는 게 낫지 않겠냐는 극단적인 의견을 내놓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때마다 구심점이 될 카나타는 반대 의사를 내놓았다.

쓸데없는 소리 말라고.

가주님의 결정에 대해서 절대 이의를 제기하지 말라고.

그리고.

오늘, 카나타의 말이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엘릭이 무(武)에 있어서도 천부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었으니까.

아니, 단순한 재능이 아니었다.

개인적인 무론(武論)도 어느 정도 갖춰놓은 것으로 보였다.

쿠란시빌 자작을 제압하는 내내. 동작 하나하나에 푸른 매가 가르친 무술들의 정수가 담겨있지 않은 것이 없었고, 발전시키거나 응용시키지 않은 것이 없었다.

당시에 푸른 매가 기분이 좋은 나머지 도무지 입을 다물 줄 몰랐던 건 비밀도 아니었다.

그리고.

카나타, 자신 역시 엘릭과 기량 승부를 펼친다고 했을 때 도저히 승리를 장담할 자신이 없었다.

무술 기량만 견주자면 대등.

마법을 허용하면… 필패.

그것이 카나타가 내린 결론이었다.

그 역시 소드마스터에 오른 4체인의 고수인데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대등하다고 생각한 것도 위험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엘릭이 당시에 어떤 존재를 빙의시켰는지를 모르기에 내린 결론이었다.

그러니 어느 정도 착각이라 할 수도 있었지만.

그 역시 엘릭이 가진 기술의 일종이기 때문에 뛰어난 건 사실이었다.

“기사의 덕목은 뭐라고 하였지?”

카나타가 옆에 있던 부관에게 묻자, 부관이 말을 달리면서도 허리를 쭈뼛 세우면서 우렁차게 대답했다.

“기사도입니다!”

“그렇다면 기사도의 주요 교리는?”

“주군과 황실에 대한 충성, 자신의 기량을 갈고닦는 수양, 힘없는 백성들을 지키는 정의입니다.”

“다시는 잊지 말도록.”

그 말은 부관에게 향했지만, 기사단 전체를 향한 경고라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우리는 주군과 황실, 그리고 백성을 따른다. 그것이 기사로서 반드시 갖춰야 할 덕목일지니. 지난날 가주님을 의심하여 가문을 흔들어 놓은 것으로도 모자라, 이번에 또 우리들의 그릇된 판단으로 그런 사태를 만들어버릴 뻔했다는 것을 잊지 마라.”

“….”

“….”

“….”

“가문에 대해, 앞날에 대해 걱정하는 것은 좋다. 주군께서 잘못된 길을 가고자 하실 때에도 그분의 진노가 두려우니 무조건 침묵하라는 뜻이 아니다. 그래도 한 번쯤은 주군께서 왜 그런 결정을 내리셨는지, 우리가 그동안 너무 편협하고 폐쇄적이지는 않았는지, 그 모든 것들을 되돌아보라는 의미다.”

기사들은 서로 눈치를 주고받기에 바빴다.

카나타의 목소리 한 자 한 자에 힘이 실리고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뭘 해야겠나?”

“실수를 덜어내야 합니다.”

“그러려면?”

“승리해야 합니다.”

“어떻게?”

“누구보다 열심히 뛰고, 누구보다 열심히 검을 휘두르면 됩니다. 그리하여 가주님의 결정이 절대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가 온 세상에 입증해 보이면 됩니다.”

헤르만은 여태껏 자신의 결정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몇 번씩이나 입증해 보였다.

그렇다면 이제 그들이 헤르만의 의지이자 검이 되어 헤르만의 결정을 세상에 내보일 차례였다.

그러려면.

이제, 엘릭을 인정하고, 그의 사람이 되어야만 했다.

그의 깃발이 되어 흩날리고, 그의 검이 되어 적을 쳐부숴야 했다.

카나타는 기사들을 돌아보았다.

깊게 눌러 쓴 투구 아래. 그들의 두 눈이 형형히 빛나고 있었다.

이십여 년 전. 바일 가문이 아직 상가(商家)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주변으로부터 한창 인정도 받지 못하던 시절.

그때, 어떻게든 헤르만의 영광과 위엄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 보이겠다면서 앞다퉈 나가던 기사단의 모습이 그곳에 있었다.

당시에는 규모도 지금보다 현저히 작았고, 카나타도 일개 평기사에 불과했지만.

어쩐지 카나타는 당시 그 시절로 되돌아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묘했다.

“이번 전쟁에서는 우리가 반드시 일등 공신이 되어야만 한다.”

“예!”

“예!”

카나타의 당부는 바일 가문의 모든 기사들에게 있어 절대적인 명령처럼 내려앉았으니.

“모든 전공이며 업적이 한낱 용병단에게 밀릴 수는 없잖은가?”

블랙 스컬에게 밀릴 수는 없잖으냐는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청사자의 깃발을 흩날리러.”

그들은 힘차게 발을 몰았다.

청사자의 깃발이 나부꼈다.

회사자보다도. 그리고 앞으로 맞이할 적사자보다도 더 크게 하늘을 빼곡하게 채우기 위해서.

두두두두!

* * *

“음? 무, 뭐야? 얘네들 갑자기 왜 이래?”

헤르만은 갑자기 등이 따갑다 싶어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뒤로 돌려 자신의 기사단을 보다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하나같이 강렬한 기세를 발산하고 있었으니까.

전장에 도착하려면 멀었기에 아직까지 수하들의 사기를 고취 시킬 어떤 제스처도 취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갑자기 저들끼리 의욕이 불붙어서는 투기를 맹렬하게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허허! 뭘 그리 놀라나? 다들 열심히 뛰어다니겠다면 응원을 해줘야 하는 판국인데. 덕분에 우리 아이들도 지금 불이 아주 제대로 붙었어.”

청사자군이 기세를 단단히 드러내자, 옆에서 나란히 달리고 있던 회사자군, 블랙 스컬 쪽도 얘들이 ‘왜 이러나?’ 싶은 얼굴로 쳐다보다가 덩달아 더 크게 기세를 드러냈다.

그러니 청사자군도 ‘이것들 봐라?’라는 얼굴로 다시 의욕을 앞세우고, 회사자군도 또 여기에 맞받아치니.

제국인들에게 뒤지고 싶지 않은 보르푸르 족 전사들의 투기까지 더해져.

이제는 말을 모는 내내 숲 자락의 대기가 다 떨릴 정도였다.

사기가 바닥에 떨어지는 것보다 위에 있는 것이 훨씬 좋긴 하다지만.

너무 과하면 오히려 사고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걱정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세일러는 그게 뭐 어떠냐는 식이었다.

그만큼 젊음의 혈기가 주는 힘은 아주 컸으니까.

“그보다 성지, 용의 둥지를 차지하고 있다는 마족들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지.”

세일러의 말에 헤르만이 고개를 끄덕였고.

옆에서 세일러의 말 안장에 앉아있던 사르나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몇 달 전에 신탁이 있었어요.”

“신탁?”

“예. 제가 모시는 분으로부터 내려온 신탁이요.”

세일러의 눈이 반짝였다. 헤르만도 이미 사르나이가 ‘창천의 신’이라는 신의 사도라는 것을 이미 들었기 때문에 적잖게 놀란 눈치였다.

그만큼 신이 직접 이 땅에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으니까.

“무슨 내용이었지?”

“천년 만에 용의 주인이… 나타날 거란 내용이었어요.”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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