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용의 창시자
“…!”
“…!”
“…!”
좌중은 모두 충격에 젖고 말았다.
쿠란시빌 자작이 누구던가!
메르빙거의 전통적인 우방이었던 트워크 자작가의 가주로서, 메르빙거의 우산을 박차고 나온 이후로도 항상 승승장구했던 간웅(奸雄)이었다.
그 때문에 황실과 감찰국에서도 그를 포섭하기 위해 전방위로 애쓰기도 했다.
그런데 그랬던 자가 엘릭에게 무참히 깨진 것만 해도 충분히 비현실적이었건만.
거기다 이제는 목숨까지 잃었으니 충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
특히 쿠란시빌 자작의 패배에도 꿈쩍할 수 없었던 트워크 자작가의 병사들은 적잖게 당혹해한 눈치였다.
대세를 거스를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엘릭의 편에 서긴 했다지만.
설마 진짜 자작을 죽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으니까!
‘무, 뭐야…?’
‘저, 정말 죽이다니…!’
귀족 예법이라 하여, 아무리 큰 죄를 저질렀어도, 권력과 재산은 빼앗을망정 목숨까지 앗아가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언제 그 자신이 똑같은 입장이 될지 모르는 데다가, 가문 간의 분쟁으로 비화 될 위험성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일반 병사들이 봤을 때는 목숨을 걸고 전쟁에 임하는 자신들과 다르게, 귀족 나리들의 아니꼬운 거드름에 불과할 뿐이었지만.
그래도 그런 귀족 세계의 불문율을 잘 알기 때문에 ‘설마’하는 생각을 했던 것인데.
하지만 엘릭은 절대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오히려 그게 당연하다는 듯 무심한 얼굴로 쿠란시빌 자작의 시체를 내려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엘릭은 고개를 들어 좌중을 훑어보았다.
침묵에 잠긴 병사들은 혹시 엘릭과 눈이라도 마주칠까 싶어 어깨를 움찔하며 황급히 시선을 옆으로 돌리기 바빴다.
트워크 자작가의 장교며 병사들은 분위기에 완전히 압도되어 경직되어 있기만 할 뿐이었다.
그건 프란츠 백작가의 병사들도 마찬가지였으니.
혹여 불똥이 자신들에게도 똑같이 튈까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특히 엘릭에게 호되게 당한 기억이 있던 로데오는 자라목이 되어 고개를 떨어뜨려야만 했다.
그 자신이 알던 옛날의 엘릭은 정말 없었다.
그저 메르빙거의 가주만 있을 뿐.
그러다 엘릭의 시선이 캘리거 백작에게 고정되었다.
“….”
“….”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하지만 엘릭이 던지는 시선의 의미는 아주 간단했다.
-너는 어떻게 할 거지?
쿠란시빌 자작처럼 저항할 테면 얼마든지 저항해보라는 자신감의 발로였다.
한순간, 캘리거 백작의 머릿속에도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어떻게 하지? 지금이라도 군사반란을 일으켜야 하나?’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도, 제라이츠 황태자에게 접촉하려던 것은 이미 들킨 상황.
결국 주도권은 엘릭에게 있었다.
엘릭이 그 서찰을 크롬헬 황자에게 넘기기만 해도, 자신의 정치적 입지는 완전히 박살 나고 말 테니까.
이를테면, 저 서찰은 자신에게 채워진 개 목줄이나 마찬가지인 셈이었다.
반항할 것이냐, 아니면 스스로 개 목줄을 찰 것이냐?
‘이놈이 이런 강수를 둘 줄 알았더라면 진즉에 더 빨리 치고 나갈 것인데…!’
엘릭이 설마 내분을 각오하면서까지 쿠란시빌 자작을 직접 치려 들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에 생긴 결과였다.
그렇게. 결국 캘리거 백작이 내린 선택은.
“…우리는 이번 일과는 무관하오. 찬성공작께서 말씀하신 서찰이 무엇인지는 나 역시 모르는 일이고.”
모든 혐의를 죽은 쿠란시빌 자작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이었다.
어차피 저 서찰에는 이곳의 상황이 적나라하게 적시되어 있긴 해도, 그가 직접 썼다는 증거는 없었다.
결국 캘리거 백작은 스스로의 목에 목줄을 차기로 결정한 셈이었다.
그는 여기서 엘릭에게 저항하여 이길 자신이 없었다.
그만큼 엘릭이 보여준 신위는 압도적인 것이었다.
아니, 그런 것을 떠나서라도, 청사자와 회사자가 이곳에 있는 판국에 엘릭을 다치게 할 수도 없다. 결국 제압을 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래서야 자신이 불리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런가?”
“그… 렇소.”
“아쉽군.”
“…!”
캘리거 백작은 주먹을 꽉 쥐었다.
부르르!
주먹이 분노로 잘게 떨렸다.
엘릭은 그런 그를 노골적으로 무시하면서 몸을 반대로 돌리며 소리쳤다.
“군사 반란을 일으킨 자작의 모든 권한과 가산을 몰수한다. 원칙대로라면 이를 모두 황실과 의회에 보고하여 처리에 대해 논의를 해야 할 것이나, 지금은 전시 상황이니 임의로 사령관인 본인이 관리하도록 한다.”
“복명!”
“복명!”
“또한, 자작과 연관되어 있을지 모른다는 혐의가 있는 백작에 대해서는, 모든 혐의가 입증될 때까지 주어진 권한의 발동을 전부 중단시키고 신병을 연금토록 한다. 그동안 백작의 권한은 참모부에서 지목한 이가 대리 행사토록 한다.”
한 마디로 캘리거 백작의 가병도 모두 빼앗아 엘릭의 입맛대로 다루겠단 뜻이었다.
눈을 뜬 채로 코가 베인 격이라, 캘리거 백작은 다시 한번 더 분노로 몸을 떨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 그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기에 그저 또 언제 있을지 모를 다음을 기약해야 할 뿐이었다.
인터레시아로 향하는 반지만을 계속 만지작거려야만 했다.
그 때문에 그는 미처 보지 못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
웬 까마귀 한 마리가 자신을 굽어보고 있다는 사실을.
* * *
“수고했다, 아테.”
엘릭은 현장을 나오면서 부관의 어깨를 두들겼다.
아테는 과찬이라는 듯이 묵묵히 고개만 숙일 뿐이었다.
사실 이번 사태 수습의 일등 공신은 아테였다.
오랫동안 프란츠 백작가와 트워크 자작가의 주요 병사들과 관계를 맺어오면서 그들을 실질적으로 감시해왔으니까.
모든 계획이 군사인 이사벨의 머리에서 나오긴 했어도, 직접 일을 실행한 건 바로 아테였다.
거기다 엘릭은 길리티 텐즈로부터 배운 환안(幻眼)을 이용, 테이밍한 동물들을 수시로 두 귀족가 진영에 붙여두기도 했었다.
“캘리거 백작은 저대로 계속 두실 생각이십니까?”
아테는 여전히 황망한 분위기인 프란츠 백작가 진영을 힐끔 엿보면서 물었다.
피식.
엘릭이 가볍게 웃었다. 한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그럴 리가 없잖아?”
아테가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가 그동안 봤던 엘릭은 절대 불온의 싹을 남겨두는 사람이 아니었다.
“눈먼 화살은 어디서 날아들어도 이상하지 않은 법이지.”
엘릭의 웃음이 의미심장하게 변했다.
한순간, 그의 눈동자가 보랏빛으로 일렁였다.
그는 현재 시선의 일부를 근방에 풀어둔 어느 까마귀와 공유하는 중이었다.
캘리거 백작이 불안한 얼굴로 반지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게 보였다. 아들인 로데오에게 어떤 언질을 던져주고 있으면서도, 어쩐지 반지에서 손을 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반지. 그 표면에 그려진 무늬가 마도경식에 그려진 일부 무늬와도 비슷해 보이는 건, 엘릭의 단순한 착각일까?
“내 사람을 건드렸는데 이 정도로 끝낸다고? 흐! 흐흐흐!”
“….”
엘릭이 음침하게 웃던 그때.
뚝!
갑자기 아테가 걸음을 멈췄다. 엘릭은 그가 갑자기 왜 그러나 싶어 웃음을 잠깐 멈추고 그를 봤다.
아테는 여전히 아무 말도 없었다. 평소에는 크게 드러내어 감정 표현을 하는 이가 아니었지만, 지금은 어쩐지 동공이 살짝 흔들리는 것 같았다.
“…저도, 가주님의 사람입니까?”
“이건 또 뭔 뚱딴지같은 소리야?”
“대답이 듣고 싶습니다.”
“당연히 내 사람이지. 뭔 이런 당연한 소리를 해?”
“….”
“너도 발 벗고 나서서 브라이언을 돕고 내 일을 도왔잖아. 그럼 당연히 나도 가주로서 널 품어야 하는 거 아냐?”
아테는 입술을 꽉 다물었다.
무언가를 머뭇거리는 모습.
엘릭은 다시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해한다는 듯이, 입술 사이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
“너도 숨기고 있는 거, 나중에 말해줘.”
“…!”
“나 먼저 간다.”
엘릭은 그 말만 남기고 휙 떠나버렸다.
그 모습에.
아테는 말없이 한참 동안 우두커니 서 있어야만 했다.
* * *
-전 병력을 소집한다.
엘릭이 내린 명령은 아주 짧았다.
하지만 그 내용은 확실했다.
출전(出戰).
드디어 고대하던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브라이언의 부상과 쿠란시빌 자작의 징벌로 군영이 한창 소란스러운 이때, 모든 관심은 단박에 출전 준비로 집중되었다.
그 과정에서 프란츠 백작가와 트워크 자작가에 대한 지휘권 교체도 신속하게 이뤄졌다.
장교 급 인사들은 대부분 배제되어 캘리거 백작과 함께 연금되었고, 가병들은 일제히 분산되어 별의 종군에 포함되었다.
누가 보더라도 메르빙거에서 두 귀족가에 대해 강제 병합을 이루고 있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반발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미 엘릭이 보여주었던 위엄에 잔뜩 눌려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만큼 엘릭의 권위가 조금이라도 흔들린다면, 자연스레 붕괴할 수밖에 없는 위험성을 다분히 안고 있는 셈이기도 했다.
그러나 엘릭은 별반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어차피 이들을 억지로 삼키기로 결정한 이상, 이쯤은 충분히 감내해야만 했으니까.
더군다나 프란츠 백작가와 트워크 자작가는 원래 메르빙거의 권속이 아니었던가.
진즉에 되찾았어야 했을 것을, 이제야 겨우 찾아왔을 뿐이었다.
여하튼.
이로써 별의 종군의 병력은 단박에 5천 명으로까지 불어나 종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비대한 체급을 자랑했으니.
그 모든 병사가 엘릭의 진두지휘 아래에 움직이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그리고.
출전 명령이 떨어졌다.
-우리의 공략 대상은 마족이다.
병사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천 년을 넘게 이어온 메르빙거의 숙적은 바로 인외, 마족일지니.
적사자군이 그들과 결탁했다는 사실은 이미 병사들 사이에도 널리 알려진바. 엘릭의 창이 그쪽으로 향하는 게 절대 이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근방에 마족이 있다는 사실이 그들을 더욱 흥분케 만들었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단련했던 실력이 얼마나 실전에서 먹히는지를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으니까.
“목책을 열어라!”
“목책을 열어라!”
“삼각 대형을 이룬다. 1대는 선봉을, 2대와 3대는 1대의 뒤를 받친다.”
“출전한다.”
“출전한다!”
둥, 둥, 둥…!
전고(戰鼓)가 거칠게 울리고, 여태껏 성벽처럼 군영을 에워싸던 목책의 문이 활짝 열렸다.
이 일대에서는 보기 힘든 평야가 드러났다.
마치 그들의 앞날을 알리듯, 넓게 탁 트여 있어서 보는 이들의 마음도 다 트일 정도였다.
하지만 그만큼 심장도 거칠게 뛰었다.
선봉에 선 엘릭이 멍령을 내렸다. 점박이가 크게 투레질을 하면서 앞장서서 달리기 시작하자, 그 뒤를 따라 전군이 일제히 내달리기 시작했다.
두두두두!
별의 종군이 달리고, 헤르만과 바일 가문의 청사자군(靑獅子軍)이 달렸다. 세일러의 블랙 스컬과 회사자군(灰獅子軍)도 이에 뒤질세라 나란히 뛰었다. 그 속에는 성지를 지키려는 사르나이와 부족 전사들도 같이 섞여 있었다.
와아아아!
함성이 뒤따랐다.
천 년을 넘게 이어오며 잠깐 멈췄다가, 이제야 겨우 다시 쓰이게 된 메르빙거의 전설이 드디어 첫걸음을 내딛는 소리였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