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용의 창시자
쿠란시빌 자작은 확신했다.
‘지금 여기서 엘릭, 저놈에게 명분을 쥐여 줘버리게 되면 주도권은 영영 잡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서는 외려 내가 가진 것들마저도 같이 빼앗기게 돼!’
엘릭이 군법을 들먹이면서 쿠란시빌 자작을 억류하고, 그의 권한을 모두 빼앗아오려고 할 경우.
쿠란시빌 자작은 그저 몸만 이동하고 있을 뿐, 유폐 당한 신세나 다름없게 된다.
그렇게 되면 가병들도 하나둘씩 고스란히 엘릭의 손에 떨어지게 되겠지.
포악한 성격이지만, 음험하고 간교하기로 유명한 쿠란시빌 자작이 여태 무리수를 둔 것도 사실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본군에서 동떨어진 상태가 된 이때. 실력 없는 지휘관이라면 서서히 수하들에게 명망을 잃기 마련이건만, 엘릭은 오히려 신망을 얻으면서 군의 결속력을 다지고 있었다.
이대로 있다간 가병들까지 모두 빼앗길 판국이었다. 캘리거 백작이 기회를 엿보면 된다고 말했지만, 그보다 먼저 전부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초조함이 있었다.
그것은 쿠란시빌 자작, 그가 애당초 그런 식으로 힘을 거머쥐었기 때문이리라.
별의 마도사가 스러지고, 메르빙거를 이루던 주요 전력의 대부분이 대격전에서 돌아오지 못했을 때.
쿠란시빌 자작은 머리를 잃고 갈팡질팡하는 가신과 가병 중 상당수를 자신의 휘하로 끌어들이면서 독립을 선언했다.
한창 혼란스럽던 시기에, 그가 가장 먼저 메르빙거의 문을 박차고 나선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는 엘릭 메르빙거가 라센트의 영웅이라고 불리기 시작한 이후로, 알게 모르게 가슴 한편에 조바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우스던 메르빙거의 손자가 자신의 목을 옥죄려 할지도 모른다는 망상.
별의 마도사가 남긴 망령들이 자신의 심장을 노릴지도 모른다는 저주.
그래서 캘리거 백작이 처음 손을 잡자고 했을 때, 그가 싫으면서도 흔쾌히 승낙했던 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메르빙거가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싹이 나무가 되어버리기 전에 짓밟아버리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녀석은 어떻게 짓밟을 수 있는 싹이 아니었다.
이미 거목(巨木)이었지.
그것도 그 하나쯤은 쉽게 덮을 수 있을 정도로 울창해진 거목!
파아아앙!
쿠란시빌 자작은 엘릭과 충돌하자마자 다시 한번 인상을 딱딱하게 굳혀야만 했다.
단단하다.
가장 먼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가 시간이 갈수록 말도 안 되는 속도의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지금 이렇게 부딪쳐보니 불과 얼마 전과 비교해도 그는 더욱 성장했다.
벽을 하나 넘었다고 해야 할까?
정확한 써클은 알 수 없지만, 모르긴 몰라도 하나쯤은 더 생긴 것 같았다.
적사자의 네 자루 칼 중 하나를 부러뜨렸다더니.
요새 하나를 혼자서 점령했다더니, 정말 과장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쿠란시빌 트워크 자작. 황실이 인정한 지휘관의 명령권을 무시하고, 정당한 군법 회의를 거부하는 것에 이어 이제는 군사 반란까지 획책하려는 건가?”
엘릭은 어느새 손에 잡힌 얼음창을 아래로 늘어뜨리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야말로 서릿발과 같은 기세.
실제로 그를 중심으로 냉풍이 회오리 모양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점차 옆으로 퍼져나갔다. 당장 눈보라가 휘몰아칠 것처럼 살갗이 아팠다.
“다시 묻겠다. 군사 반란이라도 일으키려는 거냐?”
쿠란시빌 자작은 끝까지 법적 절차를 고집하는 엘릭을 보면서 더욱더 안달이 났다. 초조해졌다.
어차피 제라이츠 황태자와 접선하려던 것도 실패로 돌아간 이상. 가만히 앉아서 조금씩 군권을 빼앗기나, 빌미가 잡혀서 빼앗기나 결과는 매한가지다.
그렇다면 우선 엘릭의 신병을 확보하고, 명분을 자신들 쪽으로 유리하게 조작할 필요가 있었다.
“【불의 환란지대】.”
그래서 쿠란시빌 자작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평소 미리 메모라이즈 해둔 마법 중에서 가장 잘 애용하는 것부터 시전했다.
화아아악!
콰르르-
쿠란시빌 자작의 주변으로 검고 붉은 불길이 동심원을 그리면서 크게 치솟았다.
화력이 얼마나 거세던지, 마치 수십의 정병들이 불길 속에서 일제히 날이 꼿꼿한 병장기를 세워두기라도 한 것처럼 뾰족하고 아프기까지 했다.
과거, 프란츠 백작가가 메르빙거의 ‘장벽’이라 불렸다면, 트워크 자작가는 ‘창칼’을 상징했으니.
그것은 트워크 자작가가 보유한 마법이 하나같이 강한 공격형 마법이기 때문이었다.
쿠란시빌 자작부터가 이미 육망성을 제외하면, 우위를 다투는 실력자가 그리 많지 않은 워메이지였다.
“본 가는 이제는 기억하는 이들도 거의 없는 옛 전설 속에서 시조를 도와 메르빙거의 초석을 세웠다고 알려진 4개의 계절 중 ‘여름’의 정통을 이은 곳.”
쿠란시빌 자작은 한 손에 자신의 얼굴만큼이나 큰 붉은 수정구슬을 들고 있었다.
그의 모든 마법을 발동시키는 매직 스태프의 일종이었다. 거기서 수많은 불이 일렁이고 있었다.
엘릭은 한순간 그것이 아주 오래된 ‘유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가 말하는 내용 중 일부가 귀에 들어왔다.
여름의 정통을 이었다?
아무래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 사계의 정통은 주변 곳곳에 희미한 흔적으로나마 이어졌던 모양이었다.
“시조의 가르침도 남지 않아 정통을 잊었다고 할 수 있을 메르빙거와 비교 자체를 할 수 없을지니. 지금부터 ‘여름’의 후계자이자, 조모님으로부터 메르빙거의 피를 이어받은 내가, 삿된 길을 걸어가고 있는 그대를 치죄하겠노라.”
쿠란시빌 자작은 몇 마디 말로 이번 싸움을 ‘군사 반란’이 아닌 ‘가문 내 정쟁(政爭)’으로 바꿔버렸으니.
엘릭은 이런 상황에서도 용의주도하게 어떻게든 명분을 챙기려는 녀석의 행태에 헛웃음을 흘리면서도.
한편으로는 생각지도 못한 호승심을 가질 수 있었다.
“치죄?”
스스로 ‘여름’의 후계자를 자처할 수 있다면.
“해봐.”
정말 그 흔적이 온전히 남아있는지 확인해볼 수 있지 않겠는가!
“해볼 수 있으면.”
화아아악!
쿠란시빌 자작이 수정구슬을 높이 들었다. 그러자 불길이 아주 크게 해일처럼 일어나면서 단박에 엘릭에게로 덮쳐들었다.
파아앗-
엘릭은 땅을 박찼다. 빛살이 되어 불의 해일을 거스르고자 했다.
권능 중 ‘북풍’이 일부 가동되면서 마력회로 속에 깊이 잠들어있던 망령들이 일부 깨어났다.
“【깃들라】.”
츠츠츠-
그동안 수련을 하면서 권능을 워낙에 많이 다뤄본 덕분인지, 이제는 빙의를 시도하는 것에도 그리 많은 마력이 소모되지 않았다.
거기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망령들도 그 안에 계급이 아주 세세하게 나뉘어 있었다.
생전의 업적과 실력을 바탕으로 매겨진 그 계급도에서도 가장 상위에 놓인 이들은 따로 있었으니.
그들은 다른 망령들과는 달랐다.
병사처럼 명령을 가만히 듣고 따르기만 하는 이들과 달리.
그들은 가만히 엘릭을 지켜보기만 했고, 명령을 잘 듣지도 않았다.
마치 ‘개인 의사’라도 지닌 것처럼 보였다.
오히려 때로는 다른 망령들을 지휘하기도 했다.
그때. 엘릭은 알 수 있었다.
저들은 오토 한이 부리던 단순한 가병이 아니라는 것을.
그와 함께 했지만, 동등한 위치에서 어깨를 나란히 했던 가신이자 동료들이었다는 것을.
그래서 엘릭은 그들을 이렇게 불렀다.
오토 한의 여섯 장군.
‘겨울 6장(將)’이라고.
* * *
겨울 6장을 처음 만났을 때.
엘릭은 여러 생각을 가져야 했다.
다른 망령들은 모두 충성을 끌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시련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결투에서 이겨 실력을 증명해 보인 것이다.
하지만 겨울 6장은 달랐다.
그들은 싸워보자는 엘릭의 도발에도 좀처럼 잘 넘어오지 않았다.
심상 세계 속에서. 마치 별도로 마련된 얼음 왕좌에 앉아 그를 가만히 지켜보기만 할 뿐.
자신들을 의자에서 일어나게 하려면 이제 새로운 자격을 보여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 자격은 무엇일까?
긴 고민 끝에 엘릭이 내린 판단은 간단했다.
병사들에게서 가주로서의 ‘실력’을 입증했다면, 장군들에게서는 가주로서의 ‘그릇’을 보여야 하지 않을까?
메르빙거를 자신이 제대로 이끌 수 있을 거라는 그릇을 말이다.
그리고 아마도 여섯 명이 원하는 바는 각자가 전부 다 다를 터였다.
이것도 시련이라면 시련이라 할 수 있으리라.
문제는 저들이 내린 시험이 정확하게 무엇인지를 파악하기가 어렵다는 점에 있었다.
다행히 엘릭의 그런 고민은 생각보다 쉽게 해결될 수 있었다.
여섯 얼음 왕좌에서 가장 끄트머리에 앉은 존재가 일어났던 것이다.
아마 서열상 역순으로 그들에게서 일일이 인정을 받아야 하는 것 같았다.
다른 일반 망령들과 달리 푸른 불꽃으로 이뤄진 유령은 몸에 탄탄한 갑주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한 손에는 수 미터도 넘는 엄청난 크기의 깃발을 들고 있었으니.
거기에는 메르빙거 가를 상징하는 문장과 오토 한이 남긴 동계의 인장이 같이 그려져 있었다.
-‘백룡의 기(旗)’, 나하트람.
망령은 자신의 이름을 그렇게 밝혔다.
겨울의 현자 오토 한이 언제나 군병을 이끌며 적들을 칠 때면 대열의 앞에 서서 메르빙거의 깃발을 크게 흔들었다는 기수(旗手).
그가 깃발을 흔들면 수많은 마족의 목이 줄줄이 떨어졌다. 그렇기에 마족들은 되도록 그의 깃발을 마주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가 흔드는 깃발은 아주 높고 크게 펄럭이기 때문에 아주 먼 곳에서도 자연스레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나하트람은 엘릭에게 따로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에 엘릭은 그가 풍기는 사념을 천천히 곱씹을 수 있었다.
나하트람은 말했다. 자신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장의 선두에 설 줄 알아야 한다고.
가주라고 해서 안전한 후방에 빠져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두에 서서 병사와 가신들을 독려하고 그들과 함께 어울릴 줄 알아야 한다고.
너에게는 그럴 자신이 있냐고 말이다.
거기서 엘릭은 대답했다.
이미 그러고 있노라고.
지금도 누구보다 가장 앞서서 달리고 있고, 누구보다 먼저 칼을 휘두르고 있노라고.
여태껏 보고 있었으면서도 몰랐냐고 오히려 되물었다.
이에 나하트람은 잠깐 고민을 하다가, 자신이 들고 있던 깃대를 엘릭의 손에 쥐여주었다.
인정한다는 뜻이 아니었다.
엘릭의 말이 사실이라면, 진짜 이 깃발을 들고 전장에서 크게 휘둘러보라는 의미였다.
또한, 단순히 흔든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통해 메르빙거가 얼마나 위대한지를 적들에게 인식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즉 적들에게 공포가, 천적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에 아군에게는 승리의 상징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지치기만 하는 전장에서, 아군이 유일하게 기댈 수 있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상징물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깃대는 등을 기댈 수 있는 나무가 되고, 깃발은 그들이 쉴 수 있는 큰 그림자를 만들어줘야만 했다.
엘릭은 깃발을 낚아채면서 당연히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지금.
파아아아!
엘릭은 바로 그 깃발을 흔들 기회를 얻게 되었다.
적은 쿠란시빌 자작이었다. 원래 아군이었지만, 지금은 적이 되어버린 자.
그렇다면 자신은 지금부터 쿠란시빌 자작의 공포가 되어야 했고, 천적이 되어야만 했다.
반대로 아군은 자신을 지켜보는 모든 가병들이었다. 아테, 브라이언, 별의 종군, 모두였다.
그들에게 ‘우리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심어줘야만 했다. 그들이 기댈 수 있고 누울 수 있어야 했다.
깃발. 그 자체가 되어야만 했다.
백룡의 기, 나하트람이 엘릭에게 빙의되었다.
손에 쥐고 있는 것은 얼음창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 엘릭의 눈에 그것은 거대한 깃발의 깃대처럼 보였다.
콰아아앙!
얼음창을 앞으로 쭉 내질렀다.
겉보기엔 아주 단순한 찌르기처럼 보였지만, 위력은 아주 대단했다.
엘릭을 단숨에 집어삼킬 것처럼 굴던 불의 해일에 아주 커다란 바람구멍이 생겨나고 말았으니까.
그 너머.
쿠란시빌 자작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는 것이 보였다.
“‘여름’의 후계자라고 했나?”
그런 녀석을 보면서.
엘릭인지, 나하트람인지, 헷갈리는 존재가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하면서 으르렁거렸다.
“웃기는군. 그녀의 발치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 입 하나가 뚫렸다고 함부로 지껄여대는구나.”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