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용의 창시자
캘리거 백작이 더 이상 엘릭의 위세가 커지는 것을 방관해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했을 때.
쿠란시빌 자작에게 제안한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
-황태자 전하께 이 사실을 고하도록 하지. ‘라센트의 영웅이자, 별의 마도사의 후손. 야만족과의 결탁.’ 이만큼 커다란 스캔들도 또 어디 있을까?
-황태자? 4황자가 아니고?
-4황자께서는 엘릭 메르빙거를 곁에 두고자 하시는 분이시지. 그런 분을 어떻게 믿나?
캘리거 백작은 오랫동안 4황자인 크롬헬을 지지해왔고, 그만큼 그들 파벌에서 큰 입지를 구축해왔지만, 당시만큼은 별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물론, 쿠란시빌 자작은 그것이 허세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프란츠 백작가가 크롬헬 황자에게 약점이 잡혀 꼼짝도 못 한다는 사실은 이미 정계에서 모르는 이가 거의 없었으니까.
하지만 프란츠 백작가가 가진 저력이 워낙에 대단하고, 캘리거 백작이 가진 위명 또한 드높기 때문에 아무도 그것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캘리거 백작이 제라이츠 황태자에게 엘릭과 관련된 스캔들 건을 넘겨준다고 한다.
쿠란시빌 자작은 눈을 가늘게 좁힐 수밖에 없었다.
-그게 아니라, 눈엣가시도 제거하고, 4황자 파벌에서도 독보적으로 입지를 확실히 세우려 함이겠지.
-어쨌거나. 할 텐가, 하지 않을 텐가?
캘리거 백작은 아마 익명으로 제라이츠 황태자에게 접촉할 것이다. 그리고 스캔들이 터졌을 때, 자신은 사령관인 엘릭 메르빙거의 결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끌려갔다고 정계에다 둘러댈 테지. 어느 정도 정상 참작도 될 것이다.
그리고 역적이 되어버린 엘릭 메르빙거를 치워버리고 나면, 그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메르빙거의 남은 유산을 모두 독식할 수 있을 것이다.
몰락한 명문이라고는 하나, 메르빙거가 누대에 걸쳐 쌓은 명성은 절대 사라지는 게 아니었으니.
몇 대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프란츠 백작가에 메르빙거의 피도 어느 정도 섞여 있을 테니, 적통을 주장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쿠란시빌 자작은 거기서 자신이 빠져서는 절대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 역시 조모님이 메르빙거 출신이시니 메르빙거의 적통을 주장할 권리는 충분했다.
그렇게.
캘리거 백작과 쿠란시빌 자작은 ‘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저 멀리 제국 영토로 도망친 본군과 연락이 닿는 때를.
엘릭이 아무리 그들의 심기를 몇 번이나 거슬려도, 꾹 참아왔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 아침 자에 드디어 이뤄졌다고 한다.
쿠란시빌 자작이 화가 날 수밖에 없는 대목이었다.
“그럼 여태 그걸 왜 나에게는 사실을 공유해주지 않은 거지?”
“정리가 끝나면 말해주려 했다. 네놈의 그 급한 성격이 일을 그르칠 수도 있었으니까.”
캘리거 백작은 도리어 콧방귀를 끼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그러기도 전에 이미 일을 망치려 드는군. 엘릭 메르빙거, 그놈이 방심하고 있을 때 목덜미를 쳐야 하는데. 쯧!”
쿠란시빌 자작은 인상을 찡그렸다. 그는 항상 캘리거 백작의 이런 면이 싫었다.
이 세상에서 자신 혼자만 잘난 것처럼 구는 오만함.
그러면서 쿠란시빌 자작을 은근히 깔보는 시선.
주먹을 꽉 쥐었다.
당장 저 면상을 후려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그랬다간 정말 모든 게 끝장이기에 참았다.
캘리거 백작도 쿠란시빌 자작이 그답지 않게 화를 삭이는 것이 보이자,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여하튼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라. 너의 걱정과 달리 엘릭 메르빙거가 길길이 날뛸 수는 있어도, 너에게 어떻게 직접 손은 쓰지 못할 테니까.”
“그놈 성격을 모르나?”
“알지. 너무 잘 알지. 내 아들의 팔을 잘랐던 놈인데. 그래도 사람 좋은 모습이 강했던 제 조부에게서 독한 모습만 남은 놈이지 않나.”
“그런데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랬다간 군영이 박살 날 테니까!”
캘리거 백작은 팔짱을 끼면서 한쪽 입술을 비틀었다.
“엘릭 메르빙거는 드디어 가문의 기틀이 될 만한 것을 만들었다. 추종자 집단을 가신으로 만들었지. 그런데 그 상황에서 우리와 직접 충돌한다고? 세력 기반을 왕창 잃을 셈인가?”
가뜩이나 적진 한가운데에 갇혀 탈출을 시도하려면 병력 손실이 클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 않나.
그런데 그 전에 자중지란을 일으킨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캘리거 백작도 자신만만하게 큰소리를 떵떵 칠 수 있었다.
그리고 엘릭 메르빙거를 서서히 고사시킬 수 있노라고 자신하고 있었고.
하지만.
그는 아직 잘 몰랐다.
그것이 어디까지나 ‘평범한’ 상식선에서나 통용되는 이야기라는 것을.
엘릭은 그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건이 터진 건 바로 그때였다.
쾅!
갑자기 두 사람이 있는 지휘 막사의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가 다급하게 안으로 뛰어왔다.
“아, 아버지!”
캘리거 백작의 아들, 로데오였다.
그동안 팔이 잘린 트라우마로 엘릭과 직접 마주치기를 두려워해 쥐 죽은 듯이 조용하게 지내던 그의 안색이 반쯤 시퍼렇게 질려 있었다.
“무슨 일이냐!”
“바, 밖에 나가보셔야 할 것 가, 같습니다! 자, 자작님께서도요!”
“왜? 야만족 놈들이 칼이라도 들었느냐?”
캘리거 백작은 자신의 수염을 손끝으로 매만지면서 물었다.
이곳 마을의 사람들이 들고 일어날 것은 이미 상정해둔 일.
그리고 결론은 ‘별반 피해가 크지 않을 것 같다’였다.
지난 한 달 동안 저들에 대해서는 몰래 철저하게 조사를 해둔 상태였으니까.
백작가의 가병만 들이쳐도 쉽게 무너질 전력이었다.
저들이 먼저 달려든다면 프란츠 백작가로서는 그만큼 명분을 획득하고, 노획품까지 얻을 수 있으니 더 바라는 상황이기도 했다.
하지만.
“야만족이 아닙니다!”
“그럼?”
“엘릭! 엘릭입니다!”
“뭐?”
여유롭던 캘리거 백작의 얼굴이 그제야 깨졌다.
바로 그 순간.
콰콰쾅!
밖에서 갑자기 거친 폭음이 울렸다.
짙은 마력향마저 느껴졌다.
전투가 벌어져 공격 마법이 전개되었을 때에 일어나는 현상들.
무언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사실에 캘리거 백작이 바쁘게 막사를 빠져나갔다. 쿠란시빌 자작과 로데오도 뒤늦게 따라나섰다.
“저, 저깁니다!”
로데오가 가리킨 방향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고정되었다.
프란츠 백작가와 트워크 자작가의 군영 주변으로, 별의 종군이 완전무장을 한 채 에워싸고 있었다.
소란을 듣고, 두 귀족가의 가병들이 허겁지겁 밖으로 나오다가 소스라치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들 사이로 먼지구름이 풀풀 날리는 곳이 있었다.
여전히 마력향이 짙게 배어나는 곳. 쓰러진 막사 사이로, 엘릭이 차갑게 눈을 뜨면서 한 손으로 누군가의 멱살을 잡아 위로 들어 올렸다.
“켁, 켁! 사, 살려…!”
엘릭의 손에 붙잡힌 병사는 발이 지면에서 한 치 이상 떨어진 채로 아등바등했다.
그는 숨이 막힌 나머지 안색이 창백했다. 엘릭이 내뿜는 기세에 폐와 심장이 짓눌려 도저히 정신을 차리질 못했다.
이번 사달의 원인을 제공했던 바로 그 병사였다.
놈을 보는 엘릭의 시선은 마치 툰드라 지대의 눈보라처럼 너무나도 차가웠다.
“엘릭 메르빙거! 이게 대체 무슨 짓인가!”
쿠란시빌 자작이 겨우 가라앉혔던 노기를 터뜨리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엘릭의 손에 잡힌 병사는 그냥 소모해버릴 수 있는 단순한 병사가 아니었다. 자작가에 오랫동안 복무해왔던 정병이자 충신이었다.
엘릭의 시선이 병사에게서 쿠란시빌 자작에게로 옮겨졌다.
“아테.”
“예. 하명하십시오.”
하지만 엘릭은 쿠란시빌 자작이 아닌 옆에 있던 가신을 불렀다.
“내가 분명히 이곳에 있는 동안, 마을 사람들에게 문제를 일으키는 놈은 어떻게 한다고 했지?”
“중죄로 따져 묻겠다 말씀하셨습니다.”
“제국 군법에서 사령관을 대리하여 관리 및 감독하는 독전관을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행위는 어떤 처분을 받지?”
“상황에 따라 해석이 달라집니다만, 적진 한가운데일 경우 사령관의 명을 거스른 것으로 간주하여 즉결 처분됩니다.”
“그렇군.”
엘릭과 아테는 마치 아침 인사라도 나누는 것처럼 별 대수롭지 않게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나눴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내용을 깨달은 병사들의 안색은 시퍼렇게 질렸고.
콰드득!
엘릭은 손에 주고 있던 힘을 더 세게 실었다.
목뼈가 돌아가는 끔찍한 소리가 군영 내에 퍼졌다.
문제를 일으켰던 병사가 혀를 길게 쭉 내뺀 채로 절명했다.
털썩.
시체가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이놈!”
쿠란시빌 자작의 노호성이 벼락처럼 터지고.
“영관의 자격으로 참가했지만, 역시나 군령으로 상하 관계가 확실하게 정해진 귀족이 사령관의 명령에 불복한다. 이는 어떻게 처분되지?”
엘릭은 담담하게 쿠란시빌 자작의 눈빛을 맞받아쳤다.
그는 평상시 잘 짓고 다니던 비웃음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화가 잔뜩 났단 뜻이었다.
“기무처에 정식 항의 서한을 넣을 수 있습니다. 그럼 기무처에서 판정회의가 따로 열려 심사가 이뤄지게 됩니다.”
“그게 힘들 경우엔?”
“관습법에 따릅니다.”
“관습법에 따르면 귀족의 의무는 제국과 황실에 충성하고, 군에 충실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렇지 않나?”
“그렇습니다.”
“그렇다는데. 자작, 어떻게 생각하나?”
엘릭은 이제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다 못해 몸을 격하게 떨고 있는 쿠란시빌 자작을 보면서 한쪽 입술 끝을 비틀었다.
노골적인 조롱.
덤빌 테면 덤벼보라는 의미였다.
“독전관인 브라이언이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여 죽은 이 병사를 군법 회의에 회부하려고 할 때. 쿠란시빌 트워크 자작, 그대가 무력으로 행사를 방해하였다고 들었다. 이유를 묻겠다. 그대가 방해한 이유와 법적 근거를 대라. 정상 참작하겠다.”
엘릭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절대 감정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또박또박하게 법적 근거를 대면서 자신이 정상적인 절차를 밟고 있다는 것을 모든 병사에게 주지시켰다.
캘리거 백작에게는 그것이 더욱 무섭게 느껴졌다.
‘명분을 빼앗겼다! 병사들이 나서질 못해!’
엘릭이 감정적으로 브라이언의 복수를 하겠다고 나섰다면 백작가와 자작가 병사들도 적의를 드러냈겠지만, 지금은 도저히 그럴 틈이 없었다.
별의 종군이 그냥 들이친 게 아니라는 의미였다.
“천한 것이 감히 내 권속을 건드리려는 것을 막았을 뿐이다. 그것에 대한 근거라니! 내가! 트워크 자작가의 수장인 내가 바로 그 근거다! 아무도 여기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못해!”
캘리거 백작은 손으로 얼굴을 덮고 말았다.
‘저 멍청한 놈이…!’
거기서 감정적으로 대응하고, 억지를 부려서야 누가 들어주겠냔 말이다.
캘리거 백작은 이대로 두 손 놓고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쿠란시빌 자작이 실각하는 것은 그 역시 꿈에도 바라마지 않는 일이었지만, 지금은 절대 아니었다.
그래서 그와는 달리 예를 갖추면서 앞으로 성큼 나섰다.
“지금 사령관께서 하신 말에 이의를 제기할…!”
“캘리거 백작은 가만히 있으라. 감히 그대가 끼어들 곳이 아니다. 또한, 이후에 그대에게도 따져 물을 것인 있을 저.”
캘리거 백작은 자신을 무시하는 어투에 눈을 차갑게 빛냈지만, 곧 엘릭이 품에서 꺼내 흔든 서찰에 얼굴에 경악이 어리고 말았다.
자신이 제라이츠 황태자에게 전달하라고 했던 바로 그 서찰이었다!
‘저, 저게 왜…!’
캘리거 백작은 한순간 등골이 쭈뼛서는 것을 느끼고 말았다.
저것을 확보했다는 말은 그동안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이 전부 엘릭의 손바닥 위에서 읽히고 있었단 뜻이 아닌가?
어쩌면 자신이 약점 잡힌 것이 저것 말고도 더 있을지 모르겠단 노파심에 함부로 나설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기색은 쿠란시빌 자작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으니.
그도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자신이 덫에 단단히 걸렸다는 사실을 모를 수가 없었다.
명분도 뺏기고, 캘리거 백작도 발이 묶였다. 반전의 패라고 생각했던 황태자와의 접촉도 엉망이 되었다.
여기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어차피 단 하나.
군사 반란.
“엘릭 메르빙거어어어!”
쾅!
지면을 으스러져라 밟으면서 엘릭에게 달려들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