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용의 창시자
“주, 주군…!”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엘릭이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의무실을 찾아갔을 때.
가장 먼저 보게 된 것은 파리한 기색으로 병석에 누워있는 브라이언의 모습이었다.
아테를 비롯한 가병들이 그에게 인사하기 위해서 자세를 갖추려 했다. 브라이언도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걸 다급히 뛰어가 그를 일어나지 못하게 막았다.
브라이언은 엘릭과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면목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면목이 있고 없고는 내가 결정해.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브라이언은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대신 아테가 나서서 말했다.
“트워크 자작가의 병사들이 가주께서 내리신 명령을 어기고 마을 사람들을 희롱하던 중에….”
브라이언은 아테에게 그만하라며 계속 눈짓을 주었지만, 아테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칫 괜한 분란이 일어날 것을 경계하는 태도였지만.
아테는 오히려 그럴 테면 그러라는 식이었다.
여태껏 무뚝뚝하고 별반 말도 없어서 출중한 실력에도 불구하고 간혹 존재감마저 희미하게 느껴졌던 그이건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누구보다 강렬하게 제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만큼 브라이언이 다친 것에, 그리고 쿠란시빌 자작이 벌인 짓에 화가 났다는 뜻일 테지.
그리고 자초지종 설명이 계속 이어질수록, 엘릭의 얼굴도 점점 굳어졌다.
『갈림길이로군.』
거기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메피스토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큰 것을 먼저 볼지, 아니면 작은 것을 먼저 볼지. 사명인가, 사기인가? 여기서 네가 내리는 결정에 따라 앞으로 많은 게 달라질 것이다.』
사명.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마왕급 마족이 활개를 치고 있다. 심지어 용의 둥지를 점령해 아자젤의 부활을 꿈꾸는 위험한 자다. 그것을 저지하는 것이 바로 메르빙거의 사명이었다.
그러니 그것을 완수하기 위해서 일단 현재의 내분은 봉합시키고 군대를 몰아쳐서 그들을 막아야만 한다.
만약 브라이언의 편을 들어줄 경우, 가뜩이나 갈등의 조짐이 보였던 군영은 크게 흔들리게 된다.
자칫 내분이 일어날 수도 있는 일.
사명을 집행할 여유 따윈 없는 것이다.
반면에 후자, 사기에 집중한다면 이야기는 180도 완전히 달라진다.
전자를 택할 경우, 가문 내 불만이 쌓이게 될 테지만, 이때는 오히려 결과에 따라 엘릭에 대해 더 큰 충성과 조직 내 결속력을 갖게 될 테니까.
그러니 메피스토가 물은 것이다.
이 갈림길에서 네가 우선순위로 두는 것은 무엇이냐고.
그리고.
엘릭의 대답은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새는 거 모르십니까? 가문도 제대로 못 일구면서 사명은 어떻게 이루겠어요? 저는 이제 홑몸이 아닙니다. 메르빙거의 가주입니다.]
대답하는 엘릭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메르빙거의 가주라.
메피스토는 그 말을 작게 중얼거리면서 가볍게 웃었다.
『그래. 어쩌면 네 판단이 옳은 것일지도 모르지.』
흐흐.
그런데 어쩐지 그 웃음이 어딘지 모르게 씁쓸해 보이는 건 엘릭만의 착각일까?
“…만약 그때 세일러 님이 도와주지 않으셨다면, 브라이언에게 큰일이 났을지도 모릅니다.”
쿠란시빌 자작은 감히 자신에게 대드는 브라이언을 용서할 수 없다면서 손속을 독하게 썼다.
브라이언도 그동안 단련한 기술로 어떻게든 저항해보려 했지만, 애당초 7써클을 넘어선 그를 당해내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결국 크게 넝마가 되어버린 채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트워크 자작가와 별의 종군 사이에도 충돌이 벌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고 했다.
바로 그럴 때 나타나서 도와준 사람이 세일러 홈즈였다.
-회사자라 하여도 이번 일에는 개입하지 마시오. 이건 두 가문 간에 벌어진 일이니 외부인은 참견하지 말라, 이 말이오!
-허허. 미안하지만 나도 메르빙거와는 완전한 남남이 아니라서 말이지. 내가 늘그막에 거둔 마지막 제자가, 딸이, 메르빙거거든.
-…그러니 굳이 끼어들겠다, 이 말씀이시오?
-필요하다면 홈즈 가문도 끼어들도록 하지. 어떠신가?
쿠란시빌 자작이 아무리 안하무인이라고 해도, 회사자와 직접 충돌하기는 어려운 일.
결국 자작은 병사들을 데리고 자신의 병영으로 돌아가 버렸다고 했다.
엘릭의 시선이 자연스레 세일러에게 돌아갔다.
브라이언이 다쳤다는 말에 다급히 뛰어오느라, 그가 옆에 있는지도 여태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세일러의 옆에는 보르푸르 족의 여인이 서 있었다.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여인.
망령의 시야에 동화되었을 때 봤던 그 사람이었다.
‘무슨 신력이지?’
그런데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맹인 여인을 감도는 신비로운 분위기가 정확하게 무엇인지 제대로 판단이 서질 않았다.
『사도(使徒)로군.』
사도.
신의 간택을 받아 그의 교리를 세상에 널리 전파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는 자들.
이 땅에 내려온 신의 화신이라고도 불린다.
제국에서도 신교 동맹의 본단이 아니면 보기가 극히 힘들다는 인물이, 전혀 뜻하지 않은 곳에 있는 것이다.
『이런 기운이라면… 창천의 신인가?』
메피스토는 흥미롭다는 투로 맹인 여인을 위아래로 빠르게 훑었다.
질서와 조화를 추구하는 신교 동맹은 평상시 마족을 크게 적대시하는 편이었지만, 어쩐지 메피스토는 그런 게 전혀 보이질 않았다.
오히려 재미난다는 투.
특히 맹인 여인은 분명히 안대로 눈을 가리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어쩐지 엘릭을 뚫어져라 주시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좀 더 위에서.’
그를 향하는 그 시선은 실제 그녀의 육체적인 눈이 있는 곳보다 한참 위, 천장에서부터 오는 것만 같았다.
엘릭 뿐만 아니라, 메피스토를 포함한 막사 전체를 내려다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낯선 감각이 맹인 여인으로부터 기인했다는 사실을, 즉 창천의 신이 그녀에게 내려준 권능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 수 있었다.
마치 하늘이 만물을 품고, 관조하듯이.
그녀도 하늘의 시선을 빌려 엘릭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이건 좀 기분 나쁜데.’
엘릭은 어쩐지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을 낱낱이 파헤치려는 듯한 느낌을 받아서 불쾌하기만 했다.
그래서 그는 맹인 여인, 사르나이에 대한 첫인상이 그리 좋지 않았다.
남들은 그녀를 어려워하고 신비롭다 여겨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하는지 몰라도, 적어도 엘릭만큼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엘릭은 사르나이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세일러를 보면서 고개를 숙였다.
그 때문에 그는 미처 보지 못했다.
위에서 그를 직시하던 사르나이의 <창천의 시선>에 살짝 이질감이 감돌았다는 것을.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세일러는 쓰게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닐세. 내가 좀 더 서둘렀다면 이런 불상사도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불상사는 저들이 만든 것이지, 세일러 님이 만드신 게 아니잖습니까? 자책하지 마십시오.”
“자네, 설마…?”
세일러는 엘릭의 말투에 숨겨진 의미를 읽고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차마 그를 말릴 수는 없었다.
언제나 여유와 장난기가 가득한 엘릭이었지만.
지금은 전혀 그런 기색을 찾아볼 수조차 없었으니까.
오히려 노기를 띠기는커녕 담담하게 자리 잡은 두 눈이 더욱더 매섭게만 느껴졌다.
‘별의 마도사…!’
그 모습이, 어쩐지 세일러는 30여 년 전에 전장에서 우연히 보았던 우스던이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언제나 사람들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고 웃음이 많던 그가, 언제나 마족과의 전쟁에서 크게 다친 채로 돌아오는 이들을 보면 이런 표정을 짓곤 했으니까.
그리고.
그런 뒤에는 항상 거대한 후폭풍이 몰아치곤 했다.
“아테.”
아니나 다를까.
가신을 부르는 엘릭의 목소리에는 차가운 분노가 강렬하게 일렁였다.
“예.”
아테가 고개를 숙였다.
“예전부터 내가 내린 지시는? 어떻게 되었지?”
“완벽하지는 않습니다만, 동조한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지금 그들을 전부 안아야겠다. 그들에게 연락 넣어.”
“복명.”
“그리고 전 병력을 소집한다.”
아테는 목적지가 어딘지 묻지 않았다.
그들의 칼날을 겨눌 방향이 어딘지는 불에 보듯 뻔했으니까.
아테가 고개를 숙이면서 빠르게 막사를 빠져나가고, 엘릭은 표정이 살짝 굳은 세일러에게 말없이 목례를 취하면서 아테를 따라나서려 했다.
그때, 갑자기 여태껏 말없이 그를 지켜보고만 있던 사르나이가 나서서 엘릭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엘릭의 날카로운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이게 무슨 짓이냐는 투.
그 때문에 의무실에 있던 별의 종군과 보르푸르 족 전사들, 모두가 바짝 긴장해야만 했다.
표정만 봐서는 엘릭이 그녀에게 나오라면서 손이라도 쓸 기세였으니.
“성지에 마(魔)가 침범하였어요.”
“압니다.”
일순, 보르푸르 족 전사들의 표정이 급변하게 변했다.
그들의 목숨보다 더 중요한 성지에 어떤 이상이 생겼다는 말만큼 큰 충격은 없을 테니.
하지만 그것을 말하는 사르나이의 표정은 이상하게 너무 평온해 보였다.
“그곳에는 당신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도 있을 텐데요. 그렇지 않나요?”
엘릭은 어쩐지 이 신비로운 여인이 저 권능으로 자신이 용의 둥지에서 겪었던 일들을 지켜봤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을 다 ‘예견’하고 있었을지도.
‘설마 우리를 이곳 마을로 끌어들인 게 우연이 아닌 건가?’
하나부터 열까지, 엘릭은 어쩐지 사르나이에게 따져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그녀와 어울릴 시간이 없었다.
“저에겐 이게 더 중요합니다.”
엘릭은 그렇게 말하면서 사르나이를 무시하고 의무실을 빠져나왔다.
그런 그가 지나친 자리를 보면서.
사르나이는 작게 중얼거렸다.
“어쩌면 용께서 오랫동안 기다리신 분께서는 신께서 예견하신 분과는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네요.”
* * *
“쳐야겠다.”
쿠란시빌 자작이 다짜고짜 프란츠 백작가의 지휘 막사를 찾아왔을 때.
캘리거 백작은 이게 무슨 짓이냐며 인상을 쓰다 말고 눈을 크게 떠야만 했다.
쿠란시빌 자작의 왼쪽 뺨에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상처가 깊게 남아있었으니까.
그것이, 조금 전에 수하로부터 보고 받았던 ‘작은 분란’에서 생긴 것임을 즉각 알 수 있었다.
그러니 쿠란시빌 자작의 밑도 끝도 없는 말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고.
탁!
캘리거 백작은 보고 있던 책자를 도로 덮으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안 돼.”
“넌 여태껏 기다리라고만 했다. 마치 금방 엘릭 메르빙거의 목을 칠 수 있을 것처럼. 하지만 여태껏 한 게 뭐가 있지?”
“아직 준비가 덜 끝났으니까. 때가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려.”
“그놈의 때! 때! 벌써 한 달이 지났다! 뭘 더 기다리라고만 하는 거냐!”
쿠란시빌은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강하게 분노를 드러냈다.
그럴수록 뺨에 난 상처가 다시 욱씬거리는 것만 같았다.
엘릭 메르빙거도 아닌, 한낱 가신 따위에 입은 상처.
그것이 그의 자존심에 자꾸만 깊은 상처를 내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쯧!’
캘리거 백작은 속으로 혀를 차야만 했다.
쿠란시빌 자작이 포악하긴 해도, 이리처럼 기회를 노릴 줄 아는 눈치를 갖고 있을 줄로만 알았는데. 지금은 아닌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그래서 더 그런 건가?’
그만큼 엘릭에게 당할지도 모르겠다고 판단이 든 것일 테지.
이제야 겨우 수확의 결실이 거의 맞아갈 준비를 하고 있건만.
놈이 자꾸 쓸데없는 짓을 저질러 일만 그르치게 만들고 있었다.
하긴. 이러니 그동안 그와 맞지 않았던 것일 테지만.
그래도 아직은 쿠란시빌 자작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어떻게든 놈을 뜯어말려야만 했다.
“오늘 아침, 드디어 황태자 전하와 겨우 연락이 닿을 수 있었다.”
순간, 씩씩대던 쿠란시빌 자작의 눈이 빛났다.
캘리거 백작의 입술이 음험하게 비틀렸다.
“엘릭 메르빙거가 반역 도당과, 그리고 야만족과 결탁했다는 증거를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이 말이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