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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195화 (194/405)

195화

용의 창시자

‘용의 창시자?’

용의 주인.

그 말들이 엘릭의 뇌리에 강하게 박혔다.

또다시, 마도경식에서 봤던 내용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한 손에는 용을 부리고, 다른 한 손으로 거인을 다루던… 시조의 모습.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어 생김새도, 나이도, 심지어 성별도 짐작할 수 없지만.

그 누구보다 화려하게 빛나고, 밝게 웃고 있던 사람.

그런데 이 용의 말이 맞다면, 그 광경이 절대 거짓말이 아닌 셈이었다.

용의 창시자라니!

그동안 사람들이 알기로 용이란 존재들은 별도로 ‘지고종(地高種)’이라고 불릴 정도로 위대하다 칭송받던 종족이었다.

마법을 창시하여 인간이 그것을 모방할 수 있도록 도와준 이들이란 신화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마탑의 몇몇 학파 중에는 아예 용을 신과 같은 격으로 논하는 이들도 있을 정도였으니.

그런데.

그런 용이 오히려 메르빙거가 위대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메르빙거를 기다렸다고도 말한다.

‘이 용이 말하는 그분이란 보석룡을 말하는 걸까? 아니면 다른…? 그게 뭐가 됐다고 해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건 대체…!’

엘릭은 혼란스러운 생각을 정리하면서 물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면서 생각해낸 첫 질문이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난…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 걸까.

【난… 그저 기… 다리는 게 고작… 일 뿐 존재…. 그저 그분이… 말씀하신… 걸… 보고 싶어… 서… 억지로 이곳에… 숨을 붙들… 어 놓는 게 고작인… 그런… 망자.】

【하… 지만… 그게 좀 더… 빨리 보고 싶어… 용혈…을… 나의 그림자를… 땅 아래에 보냈던… 존재….】

용의 말에는 두서가 없었다. 논리정연한 말을 제대로 할 수 있을 정도로 정신이 온전하지는 못하다는 뜻.

하지만 그는 지난 세월 동안 가슴에 겹겹이 쌓인 것들을 털어놓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그는 이렇게 갑갑한 곳에 오랫동안 갇혀서 이야기를 나눌 대상이 필요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다… 이제 그… 런… 드디어… 그 끝을… 볼 영광을… 얻게 될 존재… 다. 아아… 용왕이시어… 당신의 은총에… 그저… 감사할 따름 입니… 다. 난 그저…!】

‘계속 혼자 말하게 놔두면 안 되겠어.’

엘릭은 용의 말을 도중에 끊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눈치였다.

이성이 흐려지고 있었다.

그래서 엘릭이 다음 질문을 던지려는데.

쿵!

갑자기 용이 누워있던 몸뚱이를 힘겹게 일으켰다.

그러자 금세 공동의 천장에 허리가 닿으면서 동굴이 거칠게 흔들렸다. 돌가루가 우수수 쏟아졌다.

【하지… 만… 아직 확실해진 건… 아무것… 도 없다… 네가 정말… 그분… 이 말하던 이… 가 맞는지… 시험…‧ 봐야겠다…!】

시험.

그 말에 혹시 무슨 마법이라도 전개되는 걸까 싶어서 잔뜩 긴장하는데.

“그 시험. 내가 가져가도록 하지.”

별안간 뒤쪽에서 메아리가 울렸다.

아주 나지막하지만, 듣는 것만으로도 망령이 부르르 떨릴 정도로 강렬한 마기를 담은 목소리.

엘릭은 재빨리 시야를 뒤쪽으로 돌렸다.

저벅.

저벅.

나지막한 걸음으로 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190센티미터쯤 될까? 아니, 그보다 좀 더 큰 것 같았다.

엄청난 장신에 호리호리한 체구를 가지고 있어서 마치 허수아비처럼 보였다.

툭 치면 옆으로 쓰러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병색이 깊어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정작 하얀 피부와 대비되는 검은 마기가 소용돌이를 치면서 뻗쳐 나오자, 어딘지 모르게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

‘그리고리!’

엘릭은 그것이 단박에 누군지 알아챌 수 있었다.

미로처럼 복잡하기만 한 이 둥지를 어떻게든 개척하려던 마족들이 여럿 있지 않던가. 그런데 기어코 미로의 출구를 찾는 데 성공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용의 난장에 쉽게 죽어 나갔던 마족과는 격이 달랐다.

저것은 아자젤의 힘을 일부 다룰 줄 아는 놈이었다.

그릇.

엘릭이 상대했던 유다와 본질적으로는 같은 놈인 것이다.

하지만 반편이에 불과했던 유다와는 종류가 달랐다.

그보다 훨씬 강한 격이었다.

즉 훨씬 더 많은 아자젤의 힘을 몸에 담았다는 뜻이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

마왕(魔王).

그렇게 불릴 수 있는 존재라는 뜻이었으니!

“드디어 찾았구나, 수호룡.”

화아아!

광포(狂暴).

악다구니를 퍼부어대는 갈까마귀의 인장이 거무스름하게 빛나 상의 너머로 비치고 있었다.

“그대를 찾기 위해서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고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는지 아는가?”

휘휘휘!

쿠르르…!

크아아아!

녀석이 만들어내는 광기의 소용돌이 때문일까?

동굴이 거칠게 흔들리면서 용이 내뿜던 마력이 마구잡이로 흩뜨려지고 있었다.

여태 용을 가두고 있던 감옥이면서도, 그의 소중한 보금자리였던 둥지가 서서히 마기에 물들며 소형 마계화, 마역(魔域)으로 변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것이 겨우 억누르고 있었던 용의 본성을 자극했던 건지, 결국 본성이 다시 튀어나오면서 이성을 잡아먹었다.

용이 날개를 활짝 펼치면서 포효를 내질렀다.

대기가 거칠게 떨리고, 동굴이 이대로 무너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크게 들썩였다. 그럴수록 위태롭게 버티고 있던 동굴에는 서서히 균열이 퍼져나갔다.

자칫 잘못했다간 무너지는 동굴에 그대로 생매장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마족은 그런 것을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이런 섭하군. 그래도 환대는 해주지 않아도 인사는 받아줄 줄 알았는데. 천 년이 넘도록 아무도 찾지 않았던 그대를 유일하게 찾아준 것이 우리이지 않은가?”

그리고리가 그동안 동부 변경 지대에 오랫동안 몸을 숨기고 있었던 이유.

그것은 바로 이 둥지를 찾기 위해서였으니.

용의 심장, 드래곤 하트를 얻을 수 있다면 아자젤의 부활도 그만큼 빨라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생각보다 상태가 많이 심각해서 우리의 신께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일단 해봐야겠지.”

마족은 그렇게 웃으면서 손을 갈고리처럼 살짝 구부렸다. 그러자 다섯 손끝에서부터 마기가 잔뜩 응축된 손톱이 길게 자라났다.

파아앗!

마족이 용에게 몸을 날리자, 용도 아가리를 크게 벌리면서 거친 숨결을 토해냈다.

오랜 세월 동안 아무리 권능을 많이 잃었다고는 해도, 용으로서의 자격까지 완전히 잃은 것은 아니었으니.

동굴 벽 따위는 그냥 녹여버릴 정도로 고열의 숨결이 마족을 삼킬 듯 보였지만.

촤아악!

마족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허공에서 손을 가볍게 흔들어 숨결을 모두 옆으로 치워내고, 단박에 용에게 쇄도해 반대쪽 손톱을 옆으로 내그었다.

마치 종이를 가볍게 찢는 듯한 소리가 났다. 하지만 공간이 크게 갈라진 다섯 개의 틈 사이로, 용의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으니.

크어어어!

용의 길쭉한 목덜미에 남은 다섯 개의 상처가 어찌나 깊었는지, 안쪽의 뼈까지 훤히 노출될 정도였다.

쿠릉, 쿠르릉!

콰콰콰콰-

용은 그런 아픔을 떨쳐내려는 듯, 더욱더 본능의 날을 세우면서 어떻게든 마족을 잡고자 했다.

난장이 시작되었다.

“하하하하! 세상에 마지막 남은 용이라더니! 생각보다 너무 허약한 것 아닌가!”

하지만 마족으로서는 마법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무작정 육탄 돌격만 감행하는 용 따위 전혀 무서울 것이 없었고.

엄청난 폭음과 굉음 속에서도 녀석의 광소는 너무나 선명하게 들릴 정도였다.

그러다.

휙!

마족이 용을 앞에 두고도, 갑자기 시선을 뒤쪽으로 돌렸다.

그곳에.

엘릭의 망령이 있었다.

녀석은 정확하게 엘릭을 보고 있었다.

씨익!

녀석은 별다른 인사나 말 따윈 건네지 않았다.

그저 송곳니가 훤히 드러나도록 웃기만 할 뿐.

하지만 붉은 입술 사이로 비치는 하얀 이가 잔혹하리만치 섬뜩했다.

그리고.

촤아악!

어디선가 불어온 칼바람이 망령을 크게 베어버렸다. 망령이 그 자리에서 찢기고 말았다. 검은 얼룩이 시야를 가렸다.

툭!

엘릭의 시야 공유가 끊어졌다.

* * *

엘릭이 간신히 두통을 가라앉히고 정신을 수습할 수 있었던 건, 그로부터 시간이 한참 흐른 뒤였다.

망령과 너무 깊게 동화되어 있다 보니, 시야 공유가 강제로 끊기면서 받은 패널티가 작지 않았던 것이다.

『맨 마지막에 그리고리가 나타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군. 으으! 그건 마음에 안 드는데.』

메피스토는 어느새 둥지에서 돌아와 한창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저대로 내버려 둘 거냐? 우리의 노다지를 저놈들이 날름하려는데?

정확하게는 그리고리가 오래전부터 점찍었던 것을 그가 가로채려던 것이었지만.

언제나 그렇지만, 메피스토는 모든 것을 자기 유리한 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당연히 안 돼죠.”

문제는 그건 엘릭도 같은 생각이라는 점이었다.

엘릭 역시 용의 둥지를 이대로 그리고리에 빼앗길 생각 따윈 추호도 없었다.

용은 자신을 기다렸다고 했다.

시험을 해봐야겠다는 말도 했다.

그건 용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줄 수도 있단 뜻.

그런 걸 놓칠 수 없잖은가?

아니, 용의 기연은 차치한다해도, 그리고리 놈들이 잘되게 내버려 두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문제는 분명히 그놈 혼자만 오지는 않았을 거란 건데.’

엘릭은 별의 종군을 움직여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한 달 넘게 푹 쉬면서 체력도 많이 비축하고, 단기간의 훈련치고 실력도 많이 바짝 끌어올렸다.

놈들을 치고, 용의 둥지를 탈환하리라.

그리고.

‘그대로 그리고리의 본단까지 진격한다.’

이 순간, 엘릭은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에 대해서도 목표를 완전히 세울 수 있었다.

반란군을 구성하는 세 개의 기둥 중 하나가 바로 그리고리였으니.

그것을 뿌리째 뽑아버려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그런다면 반란군도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리고 그건 메르빙거의 당대 가주로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가문의 사명이기도 했다.

드디어.

별의 종군이 재활약을 할 때였다.

* * *

하지만.

엘릭의 그런 결정은 곧바로 이어지지 못했다.

“뭐?”

전혀 예기치도 못한 내분이 벌어지고 말았으니까.

“다시 말해봐.”

보고를 올린 병사는 자신이 잘못한 게 아닌데도 불구하고, 안절부절못하다가 곧 두 눈을 질끈 감으면서 원통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브라이언 님이 크게 다치셨습니다. 그 때문에 병석에 누워 계십니다.”

그 순간.

『너, 눈이…?』

메피스토는 한순간 엘릭을 보고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곧 나설 때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엘릭의 두 눈이 흉흉하게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딘지 모르게 마족을 상대하던 용의 눈빛과 사뭇 비슷해 보였다.

들끓는 본성과 마력이 뒤섞인 눈.

그리고 광폭하게 모든 것을 찍어누르는 눈.

“누구냐.”

그 때문일까?

엘릭의 목소리도 어딘지 모르게 강렬한 마력의 파동이 섞여 있어 살이 절로 떨릴 정도였다.

“대체 누가, 그딴 짓을 저지른 거지?”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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