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권능 해석
부족원들과도 잘 어울리는 별의 종군과 달리, 프란츠 백작가와 트워크 자작가 사람들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귀족으로서의 품위를 지켜야 한다. 혹은 제국인으로서의 자긍심을 지켜야 한다. 그러한 사고관이 확고하게 머릿속에 박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역적 도당들과 저렇게 어울릴 수가…!”
“제국에 대한 충의는커녕 기본적인 개념도, 교양도 없군.”
“이래서 천것들이란.”
프란츠 백작가와 트워크 자작가의 사람들은 옷도 제대로 입지 않고, 얼굴에는 뜻을 알 수 없는 기이한 문신을 해대는 보르푸르 족을 말 그대로 ‘야만족’ 취급하기 바빴다.
지금은 비록 그들의 도움을 받을지언정, 저들 모두가 언젠가는 토벌해야 할 짐승만도 못한 것들이었다.
그러한 입장 차는 태도에서도 극명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고.
“꺄아아악!”
기어코 사건으로 발생하고 말았다.
당시 친해진 부족원 몇몇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브라이언과 아테는 어느 여인의 비명을 듣고, 다급히 그쪽으로 움직였다.
들린 곳은 우물가 쪽.
보통 부족의 아낙네들이 물을 기르거나, 빨래하기 위해 모이는 장소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는 붉어진 얼굴을 감싼 채 바닥에 주저앉은 보르푸르 족 여인과 그녀를 내려다보면서 씩씩대는 트워크 자작가 병사 두 명이 있었다.
두 병사 중 한 명은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는지 씩씩 대기 바빴고, 다른 한 명은 자꾸만 주변으로 사람이 모여드는 것에 눈치를 보면서 그만하라고 동료를 뜯어말리기 바빴다.
이미 주변은 소란을 듣고 황급히 달려온 전사와 병사들이 우물가를 삥 에워싸고 있었다.
트워크 자작가와 보르푸르 족, 두 무리는 하나같이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며 대치했다.
일촉즉발의 상황.
이대로 두면 금방 폭발할 것 같았다.
“무슨 일이지?”
브라이언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인파를 가르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대충이나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유추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일단 사태 수습부터 해야만 했다.
“형제여.”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보르푸르 족의 전사였다.
쿠나나. 마을에서도 제법 직급이 높은 상급 전사였다.
브라이언, 아테와는 이미 많은 교류를 가지면서 가장 친해졌다고도 할 수 있는 인물.
“저들이. 우리. 딸. 괴롭혔다.”
쿠나나는 짧은 어휘를 마구 섞어가면서 어떻게든 사건을 설명하려 애썼다.
원래는 제국어를 거의 할 줄 몰랐지만, 브라이언과 친해지면서 생긴 변화였다.
그만큼 저들도 자신들과 친해지려 애썼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이런 사고를 치고 말았으니.
다행히 쿠나나의 짧은 어휘로도 의미를 알아듣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이들의 말이, 사실인가?”
브라이언이 인상을 찡그리면서 두 병사를 노려봤다.
거센 기백에 두 병사는 순간 움찔거렸지만.
곧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병사가 용기를 갖고 한쪽 입술을 비틀었다.
“후후! 우리 브라이언 나리, 아주 좋겠수? 야만족 놈들한테 형제 소리도 다 듣고. 그렇게 놈들 뒤나 빨아주니 어디 기분은 좋으신가 보오?”
명백히 비꼬는 언사.
하지만 브라이언은 대꾸 대신에 병사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차가운 말투로 물었다.
“자네, 술 마셨나?”
한순간, 병사가 적잖게 당혹해하는 얼굴이 되고 말았다.
“그, 그게 뭐? 자, 잘못되기라도 하였소?”
“잘못되었지. 술을 담그려면 곡식 소모가 아주 크니까. 가뜩이나 군량미가 부족한 마당이어서 금주(禁酒)를 시행한 지도 벌써 한 달은 되었을 텐데?”
“그, 그건…!”
“그게 아니면 마을의 저장고를 훔쳤다는 뜻일 테고. 그건 도둑질에 해당하는군.”
브라이언의 시선이 피해자인 여인에게로 돌아갔다.
부족원들의 부축을 받는 그녀는 여전히 충격에 젖어 몸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 아테가 다급히 다가가서 손수건을 건네주며 사과 인사를 건네는 모습이 보였다.
“거기다 분명히 우리는 조용히 떠날 사람들이니 마을 사람들을 함부로 건드리지 말라고도 했을 텐데… 그걸 그새 어겨?”
츠츠츠-
브라이언이 내뿜는 기백은 어느새 주변에 잔뜩 퍼지고 있었다.
프란츠 백작가와 트워크 자작가의 병사들은 적잖게 당혹해하는 눈치가 되고 말았다.
움찔!
몇몇은 기백에 눌려 뒤로 주춤 물러서기도 했다.
그들 중 그 누구도 브라이언이 이렇게 강렬한 마력향을 풍길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으니.
지난 한 달 사이. 엘릭에게 특훈을 배우고, 타고난 전사인 보르푸르 족과 교류를 하면서 그가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아주 짧은 기간이어도, 그동안 브라이언이 얻었던 심득(心得)은 지난 평생에 걸쳐 얻은 것과 비교해도 절대 적지 않았던 것이다.
“그, 그럼 날 무, 뭐 어떻게 하기라도 하, 하겠다는 거요? 트워크 자작가의 벼, 병사인 날?”
병사는 어깨가 잔뜩 짓눌리고,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지만.
어떻게든 저항이라도 해보겠다는 식으로 크게 반발했다.
“트워크 자작가의 소속이고 아니고가 중요한 게 아니지.”
브라이언은 성큼 앞으로 나섰다.
병사는 그만큼 주춤 물러섰다. 트워크 자작가 병사들이 황급히 앞으로 나섰다.
“이곳에 있는 한 그대는 별의 종군에 복무하고 있다. 사령관은 엘릭 메르빙거 님이며, 전장에 있는 한 그분의 명령은 군령이나 마찬가지다. 그것을 어겼다는 건 군율을 어겼단 뜻이니.”
브라이언의 두 눈이 차갑게 빛났다.
그는 허리춤에 걸려 있던 검의 손잡이로 손을 가져갔다.
“군법 재판에 널 회부하겠다. 다만, 본군과 거리가 떨어져 있으니 약식으로 처리한다.”
“…!”
“막아!”
“누굴 건드리려고!”
트워크 자작가 병사들이 황급히 몰려오면서 브라이언의 앞을 가로막았다.
“별의 종군! 지엄한 군법을 거부하려는 반란자들을 진압하라!”
그것을 보고 있던 아테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뒤에서 조용히 대기하고 있던 별의 종군이 황급히 사람들이 둘러싼 원 안으로 밀려 들어오면서 트워크 자작가와 대치했다.
살벌한 기세가 흘렀다.
부족원들은 자연스레 별의 종군 측에 섰다. 프란츠 백작가의 병사들은 중간에서 눈치를 보다가 트워크 자작가 쪽에 붙었다.
“범죄자를 처벌하겠다는데, 그 앞길을 막겠다는 건가?”
“우리는 어디까지나 우리네 식구를 지키려는 것일 뿐이오. 역적 도당인 야만족을 보호하려는 파렴치한인 당신들과 달리.”
트워크 자작가 측의 장교가 그렇게 대꾸하고 나섰다.
절대 자기네 병사를 내어주지 않을 거란 확고한 의지가 보였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물러설 브라이언이 아니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분란이 두렵다고 하여 트워크 자작가 측의 편을 들어주게 된다면 보르푸르 족과 겨우 쌓은 신뢰가 한순간에 무너진다는 것을.
그리고 앞으로 군을 이끄는 주도권도 저쪽에 빼앗길 게 분명했다.
절대 그렇게 내버려 둬서는 안 되었다.
“안 되겠군.”
브라이언이 굳은 얼굴로 별의 종군에게 반란자들을 진압하고, 죄인을 끌어내라고 명령하려던 그때.
“이게 무슨 소란이냐-!”
별안간 뒤쪽에서 트워크 자작가의 가주, 쿠란시빌 자작의 호통 소리가 들렸다.
고오오!
쿠란시빌 자작은 살벌한 기세를 토해내면서 성큼성큼 걸어왔다.
브라이언의 기백 따윈 단숨에 찢어버리고, 도리어 별의 종군을 단숨에 뒤덮을 정도로 강렬한 살기였지만.
브라이언을 비롯한 별의 종군은 누구 하나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만큼 의지가 단단한 정병이 되었다는 뜻.
하지만 그것이 쿠란시빌 자작의 자존심에 흠집을 냈다.
엘릭 메르빙거에 이어서 한낱 버러지들 따위가 자신의 존엄을 해치려 하고 있었으니.
“죄인을 군법 재판에 회부하기 위해 신병을 확보하려던 중이었습니다.”
“죄인?”
“보다시피 사안이 중합니다.”
“한낱 야만족의 계집 하나를 희롱했다고 해서 내 권속을 건드리려 해? 보자 보자 하니, 네놈의 오만이 뼛속 깊숙한 곳까지 배어 있구나.”
“오만한 태도를 보이시는 것은 자작님이신 듯합니다만.”
“뭐?”
“저는 사령관님의 군령에 따를 뿐입니다.”
“이놈이, 그래도-!”
쿠란시빌 자작은 말 한마디를 지지 않고 바락바락 대드는 브라이언을 보면서 눈에 불똥이 튀었다.
결국 참다 못한 그가 브라이언 쪽으로 손을 내뻗었다.
콰콰콰-
강렬한 마력풍이 폭풍처럼 사방으로 휘몰아치면서.
거대한 해일이 브라이언을 비롯한 일행들을 덮쳐나갔다.
그 앞에서.
브라이언은 마치 표류하는 난파선처럼 위태롭게 보였다.
그래도 두 눈빛만큼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 * *
【다시… 묻겠다….】
【넌… 누구냐…. 누구이기에 그 분의… 심장을… 갖고 있는 것이냐…?】
말 한마디, 한마디가 망령과 연결된 엘릭의 심령을 흔들어 놓았다.
심지어 상당한 거리에 떨어져 있는 엘릭의 심장에 낙인처럼 글자들이 강렬하게 박힐 정도였다.
대기를 진동시키고, 그 너머에 있는 법칙까지 흩뜨리는 힘.
엘릭도 아주 잘 아는 힘이었다.
용언(龍言).
언령 마법을 몇 단계나 위로 거치고 올라가야 겨우 다다를 수 있다는 용의 말이… 엘릭에게 닿고 있었다.
【그분의… 심장은… 지고한 것. 그것을 어찌 인간인… 네가 갖고 있는… 거지…?】
‘어떻게 살아있는 거지?’
아직까지 생존한 용이 있을 줄이야.
물론, 지금 동굴에서 숨만 얕게 쌕쌕 내쉬는 모습으로 미루어볼 때 정상이라고 보기에는 힘들었다.
흔히 용을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함께 연상되는 막강한 권능도, 강렬한 마력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그저 흉폭한 성질을 띤 거대한 짐승처럼 보이기만 할 뿐이었다.
이렇게 용언을 구사하는 것도 상당히 힘들어 보이는 기색이었으니까.
아마도 대부분의 힘을 소실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런 것을 다 떠나서라도, 멸종했다고 알려진 용이 이렇게 남아있다는 것은 충분히 놀라운 일이었다.
심지어 그를 수호룡으로 삼고 있던 보르푸르 족도 모르는 눈치였으니.
만약 이 사실이 바깥세상에 알려진다면 아주 떠들썩해질 테지.
‘문제는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지만.’
저 용은 진즉에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과거에 지녔던 절대적인 권능 중 간신히 남은 편린에 기대어 숨을 겨우 붙이고 있었으니.
엘릭은 저런 경우를 아주 많이 봤다.
미련.
이 세상을 떠나기에는 해결하지 못한 무언가가 남아있다는 뜻이었다.
‘뭐라고 대답하지?’
엘릭은 아주 잠깐 동안 고민했다.
이 용이 말하는 ‘그분의 심장’이라는 것은 분명히 보석룡의 드래곤 하트를 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메피스토와 공멸한 걸, 내가 날름 주워 먹었다고 하기에는 좀 찝찝한데.’
용이 얼마나 자존심이 강하고, 마족을 증오하는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만약 드래곤 하트와 데몬 쥬얼이 하나로 섞인 걸 가지고 있다는 말을 했다간… 뭐라고 나올지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그런… 거군….】
아직 엘릭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어쩐지 용은 무언가 납득한 것 같은 목소리를 내면서 말했다.
【너… 는… 메르빙거… 로… 구나….】
【그분이 말씀하셨던….】
【멸망하는 우리 일족을… 다시 일으켜… 줄… 아주 먼 옛날에도 그러하였듯이… 우리의 주인이 되어… 주실.】
【용의 창시자.】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