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권능 해석
용혈.
용의 피.
그것은 보르푸르 족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전설이었다.
아주 머나먼 과거. 보르푸르 족이 아직 지금의 이름을 갖추기도 이전. 부족의 탈을 쓰지도 못한 채 그저 산속 깊숙한 곳을 누비고 다니며 수렵과 채집으로 근근이 연명하던 시절.
산의 위대한 지배자였던 용, 아로와나는 그들이 야생과 세계라는 위협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도와준 우산이었다.
그리고 불을 나누어주고, 언어를 가르쳐준 고마운 ‘신’이기도 했으니.
보르푸르 족은 그런 아로와나를 수호룡으로 여기고, 그를 위해 용맹을 바치며 그의 위업을 널리 떨치는 것을 부족의 사명으로 여겨왔다.
그리고 그런 전통은 아로와나가 자취를 감추고, 둥지가 부족의 성지로만 남은 지금까지 내려왔으니.
어린 시절의 바투도 그런 전설을 진실이라 믿는 존재 중 한 명이었다.
-저는 아로와나 님의 힘을 이을 거예요! 그분의 선택을 받아서 멋진 용전사(Dragoon)가 될 거라구요!
용전사는 아로와나와 관련된 또 다른 전설이었다.
언젠가 용의 피를 물려받은 위대한 전사가 나타나 부족을 영광과 번영의 길로 이끈다는 전설.
고아 출신이었던 바투는 언제나 강함에 대한 동경심이 강했고, 강해질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다.
부족에 우연히 흘러들어온 세일러와의 인연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부족 내에서도 가장 강하다는 대전사가 그에게 패배하자, 다짜고짜 검을 가르쳐 달라고 떼를 썼던 것.
-왜 검을 들려고 하냐구요?
-그래. 이유를 묻는 것이다.
-그야 당연한 거 아닌가요?
-강해져야 아무도 덤비지 못하잖아요. 사르나이도 지킬 수 있고!
세일러도 단번에 바투의 재능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아차렸기에 욕심이 났던 바.
하지만 그 열의가 오히려 언젠가 바투를 잡아먹는 게 아닐까 싶어 시험해보고자 그런 질문을 던졌다.
단순히 자신을 여태 괴롭혔던 이들에게 복수를 하려 한다는 이유 따위를 들이대었다면 그 자리에서 진즉에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바투의 대답은 그러지 않았다.
강해지면 아무도 덤빌 수 없다.
그리고 눈이 불편한 사르나이를 지켜줄 수 있다.
이런 현실적인 이유를 먼저 들었기에 세일러도 양손을 들고 말았다.
그 역시 처음 검을 쥐게 되었던 이유가 바로 이런 것 때문이었으니까.
-세일러… 미안하다. 지켜주지 못해서.
세일러는 언젠가 자신을 보며 쓴웃음을 지으며 눈을 감으셨던 양부를 떠올리면서, 사르나이를 다시 바라보았다.
이십 년 만에 재회하게 된 사르나이는 이제 그때의 어린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어버렸다.
그래도 옛 모습은 여전히 곳곳에 남아있었다.
상대를 배려하는 착한 심성, 나긋나긋한 말투, 그리고 눈을 감고 있으면서도 모든 걸 꿰뚫어 보는 듯한 혜안….
“언젠가 성지로 뛰어들겠다고 그렇게 큰소리를 뻥뻥 치더니 결국 거기서 힘을 얻은 모양이구나.”
수호룡이 살았다고 알려진 둥지는 보르푸르 족에게 있어 절대 접근해서는 안 될 금역(禁域)이었다.
그만큼 신성한 장소이기도 했지만, 반대로 한번 발을 들였다가 돌아온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이기도 했다.
“유일하게 성지로 들어갔다가 나온 사람이 바투였어요.”
“그럴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이 바로 너였고?”
사르나이는 말없이 웃었다.
하지만 세일러는 알고 있었다.
사르나이가 눈에다 두른 하얀 천, 저 아래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무수히 많은 광경이 명멸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가 선천적으로 타고난 이능(異能)은 천리안(千里眼)이었다.
하늘 아래 비치는 모든 광경을 굽어다 볼 수 있었다. 벌어지고, 벌어‘졌’고, 또한 앞으로 벌어‘질’ 일들.
과거, 현재, 미래…. 시간의 순차적인 흐름이나 장소의 유무 따윈 관계없이 모든 것이 뒤죽박죽으로 섞인 채 많은 걸 비춰주었다.
일찍이 사르나이의 재능을 눈치채고 그녀를 이용하려던 사람이 많았다.
창천의 눈(眼).
그녀를 아는 사람들은 그 힘을 가리켜 그렇게 불렀다.
하늘,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창천의 신이 자신과 가장 닮은 어여쁜 인간에게 쥐여주는 특별한 눈이라고.
하지만 사르나이는 그 ‘어여쁘다’는 표현이 너무 싫었다.
자신은 바라지도 않았던 이 눈 때문에 사르나이는 억울하게 가족들을 잃어야만 했다. 아니, 마을이 통째로 불타고 말았다. 겨우겨우 같이 빠져나왔던 바투가 그날 이후로 강해지겠다며 다짐했다.
어찌 보면 그녀에게 있어 저주라 할 수 있는 힘. 하지만 지금은 바투에게 있어 가장 큰 응원군이 되어준 셈이었다.
용혈을 얻을 수 있게 도와주고, 부족을 휘어잡을 수 있게 해주었으니까.
신녀(神女).
그것이 현재 보르푸르 족 내에서 그녀가 가진 직책이었다.
“우리를 불러들인 것과도 관계가 있겠구나.”
사르나이의 걸음이 잠깐 멈칫거렸다.
“…알고, 계셨나요?”
“나는 창천의 눈처럼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지는 않단다. 하지만 이만큼 나이를 먹으면서 이리저리 듣고 본 게 많아 저절로 판단력이라는 게 생겼지.”
세일러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사르나이의 고개가 아래로 툭 떨어졌다.
“죄송해요.”
세일러의 말에 동의하는 셈이었다. 즉, 별의 종군에게 터전을 내어준 데에는 그들도 그만한 목적이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세일러는 별로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너는 한때 나를 아버지라 불렀다. 그런데 자식이란 건 말이다. 부모에게 때로는 응석을 부릴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이란다. 너무 혼자서 잘 커버리면, 부모로서는 고마우면서도 씁쓸해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거든.”
허허허. 그러니 맘껏 응석 부리려무나. 뒤이어 붙은 한 마디가 사르나이의 가슴에 너무 깊게 와닿았다.
결국 사르나이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바투를… 막아주세요.”
“어떻게?”
“그는 지금 피에 너무 취했어요.”
“음?”
이번에는 세일러의 걸음이 멈췄다.
뭔가 심상치 않은 말이라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그는 앞으로도 계속 강해질 거예요. 그때에는 아무도 그를 막을 수 없어요.”
“자세히 말해보려무나.”
“바투가 용혈을 취하고, 부족장이 되는데 얼마나 걸리셨다고 생각하세요?”
“글쎄. 십 년쯤?”
“5년이에요.”
“뭐?”
세일러의 눈이 커졌다.
5년. 바투는 헤르만의 한쪽 눈을 가져갈 정도로 강했다. 산악 민족 중에서도 보르푸르 족을 손꼽히는 부족으로 만들기도 했다. 그런데 그것을 단 5년 만에 해냈다고?
세일러가 아는 한 가장 빠른 성장 속도를 가진 것은 엘릭이었다. 하지만 어쩌면 그와 견주어도 부족하지 않을, 아니, 어쩌면 더 빠를지도 모른 성장 속도를 가진 셈이었다.
“용혈은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효과가 뛰어났어요. 문제는 그 때문에….”
“바투가 힘에 취했다?”
“취했을 뿐만 아니라, 용이 갖춘 성향까지 갖추게 해줘요. 용의 이성, 용의 지능, 용의 판단력, 용의 사고력… 시간이 지날수록 진짜 바투는 점차 사라지고, 용이 되어버린 바투만 남을지도 몰라요.”
사르나이는 숨을 크게 골랐다가, 천천히 말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용혈의 각성 속도는 점차 더 빨라지고 있어요.”
“흠.”
“게다가 바투가 자신의 피를 일부 자신의 수족들에게도 나눠주기까지 했구요.”
“그건 그것대로 문제구나.”
세일러는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침묵에 잠기고 말았다.
일전에 잠깐 그들과 부딪쳤을 때, 자신이 알고 있던 보르푸르 족보다 유독 성장세가 두드러진다 했더니 그런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
“….”
우두커니 서 있는 두 사람 사이에 아주 잠깐이나마 깊은 침묵이 흘렀다.
사르나이가 두른 안대 사이로, 눈물 한줄기가 흘러내렸다.
“그이를, 구해주세요.”
“….”
“부디 용의 마수에서 구해주세요, 아버지.”
마수(魔手).
그 표현이 세일러의 가슴에 와닿았다.
수호룡이 이들 부족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생각해본다면, 신성 모독이라 할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사르나이는 진정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알았다. 일단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마. 아들이 잘못된 길로 빠지고 있다면 그걸 구해주는 것도 아비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겠지. 그러니 너무 걱정마라, 딸아.”
아버지. 딸. 비록 하늘이 맺어준 천연은 아니었지만, 사람 간에 맺어진 인연인 두 부녀는 더 말을 잇지 않아도 마음속의 무언가가 단단히 결속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될까?”
사르나이는 말하기를 머뭇거리다 무거운 말투로 말했다.
“용의 힘. 아버지께서 가져가 주세요.”
저 말을 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까.
바투가 어떤 심정으로 용혈을 얻고자 노력했는지를 잘 알기에 더욱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하지만 사르나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용혈에 취하다가 결국 잡아먹힐 바투가 아니었다.
신녀 같은 지고한 자리도 아니었다.
그저 마음 편하게 바투와 지낼 수 있는 보금자리. 그것 하나면 충분했다.
세일러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너희들이 모신다는 그 수호룡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줄…!”
세일러가 방법을 찾기 위해 아로와나라는 용에 대해 자세히 물어보려던 바로 그때.
“꺄아아악!”
갑자기 마을 쪽에서부터 비명이 울렸다.
세일러와 사르나이의 얼굴이 황급히 그쪽으로 향했다.
무슨 일이라도 벌어진 게 틀림없었다.
* * *
사건이 벌어지게 된 계기는 지난 한 달 동안 별의 종군 내에 발생했던 갈등의 불씨에서 시작되었다.
“이건 우측으로 돌리는 게 어때? 대신에 마력은 좌측으로 돌리고.”
“회전력을 심어주자는 건가?”
“맞아.”
“괜찮은 방법이군. 나중에 따로 가주님께 여쭤봐야겠어.”
브라이언은 창을 꽉 쥐면서 고심에 잠긴 친구, 아테를 보면서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별의 종군에 가담하게 되면서 만나게 된 친구.
비록 인연을 맺은 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이제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해온 죽마고우처럼 가깝게 느껴지는 존재였다.
너무 말이 없고 과묵해서 이따금 답답할 때도 많았지만.
그래도 마법에 대한 열정이나, 가문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고찰이 엿보여서 쉽게 가까워질 수 있었다.
지금도 보라.
스스럼없이 이제 엘릭에게 ‘가주님’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지 않나.
그렇기에 따로 표현하지 않아도, 아테 역시 자신과 같은 생각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것치고는 이 친구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긴 하지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브라이언은 아테가 가진 사연을 잘 모른다는 점이었다.
본인이 숨기고 싶어 하기에 자세히 캐묻지는 않았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다 여겼으므로.
자신도 마찬가지이거니와,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 남들에게 말 못 할 속사정을 품고 있지 않던가?
언젠가 마음이 더 크게 열리면 다 털어놓지 않을까 하고 기대할 뿐이었다.
그러던 그때.
“창?”
“멋지다. 그거.”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던 중에 갑자기 보르푸르 족의 사람들이 나타나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근방에서 사냥이라도 하고 왔던 건지, 등에 죽은 멧돼지를 들쳐멘 그들은 손짓, 발짓을 해 가면서 그들에게 뭐라 말을 걸고 있었다.
아주 어눌한 제국어. 하지만 자세히 들어보니 알아듣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평상시 지척에 있으면서도, 저쪽에서 요구한 대로 서로 없는 사람처럼 여기고 있었건만.
아무래도 무기술을 수련하는 것을 우연히 보고 호기심이 생긴 모양이었다.
제국인에 대한 분노를 보이기 이전에 그들도 똑같은 전사라는 뜻이겠지.
‘어떻게 할까?’
브라이언은 그런 의문을 담아 아테를 바라봤다.
평상시 다른 사람과 대화하길 별로 좋아하지 않는 아테이니, 만약 부담스럽다면 그냥 보내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런데.
“너희. 창술. 더 멋졌다. 화려하고.”
아테가 부족원들에게 그들의 언어로 말을 걸었다. 짤막한 단어들을 나열한 것이긴 했지만, 듣고 있던 브라이언이 놀랄 정도로 발음이 제법 괜찮았다.
부족원들도 살짝 놀란 눈치가 되더니, 곧 웃음으로 화답하면서 다시 말을 걸어왔다.
상대의 언어로 접근하면 그만큼 심리적 거리감도 가까워지는 법.
브라이언과 아테, 그리고 부족원들은 금세 같이 둘러앉아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비록 언어 소통의 장벽은 여전히 높았지만, 그보다 서로 친해지고자 하는 마음이 더 컸기 때문에 그리 문제는 되지 않았다.
특히 서로가 가진 무기술이나 마법, 주술 따위가 주로 대화의 주제가 되다 보니 금세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그들 간에 있었던 아주 작은 대화는 시간이 차츰 지나면서도 계속 이어지다, 곧 교류로 이어졌다.
여러 무리가 뒤섞였다.
별의 종군은 그날 엘릭에게 배웠던 무기술을 부족원들에게 일부 가르쳐주기도 하고, 부족원들은 자신들이 터득한 실전 경험들을 별의 종군에게 공유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그러한 광경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무리도 있기 마련이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