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권능 해석
[이건…?]
『묵직하지, 아주?』
엘릭의 의념을 실은 망령이 머리를 위아래로 흔들 수밖에 없었다.
마력풍은 자칫 잘못했다간 그냥 휩쓸리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찢겨나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너무나 강렬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 속에 마기는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라고 해야 할까?
미미하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정말 소소한 양에 지나지 않았다.
아직 그리고리가 이곳을 탐사만 했을 뿐, 제대로 본격적으로 개척하지는 않았다는 뜻.
하지만 엘릭은 선뜻 망령을 그 안으로 보내기가 망설여졌다.
자칫 잘못 들어갔다가 망령이 훼손이라도 되었다간, 동조율을 극대화하고 있는 자신의 자아에도 치명타가 가해지기 때문이었다.
『안 가려고?』
그러나 고민은 잠시.
메피스토가 ‘쫄았냐?’는 식으로 히죽 웃는 꼴을 보고 있으려니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그가 도발한다고 해서 그냥 무작정 망령을 밀어 넣을 수는 없는 노릇.
‘잘 될진 모르겠지만….’
엘릭은 있는 힘껏 동조율을 극대화했다.
‘심안!’
그 순간, 세상이 흑백의 색채로 뒤덮였다.
수많은 결들이 드러나는 가운데. 마력풍을 따라 실타래처럼 뭉쳐진 결이 이리저리 어지럽게 돌아다니는 것이 보였다.
망령은 결의 흐름을 피해서 안으로 쏙 들어갔다.
메피스토가 가볍게 웃음소리를 내면서 뒤따라 들어와 다시 앞장서기 시작했다.
그는 아직 물리적 간섭력이 그리 심하지 않은 건지, 마력풍의 향연에도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일단 입구와 통로 쪽만 본다면 일반적인 용의 둥지와는 크게 다르지 않다.』
엘릭은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메피스토의 말마따나, 동굴이 가진 특징은 다를지 몰라도, 전체적인 분위기나 언뜻언뜻 남아있는 마법진의 체계는 보석룡의 둥지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용아병이 언제 나타날지 모르니 조심해야겠는데.’
용아병과의 싸움에서 너무 크게 고생했던 기억이 있어서 그런지, 엘릭은 이동하는 내내 여러모로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생각보다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마법진이…‧ 전부 고장 났어. 용언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질 않아.’
보석룡의 둥지에서는 천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는데도 불구하고, 상당수의 마법진이 살아남아 유기체처럼 돌아가고 있었건만.
이곳의 마법진은 상당수가 망가져 있었다.
살아남은 건 고작해야 10% 안팎?
하지만 그마저도 기능의 상당수가 유실되어서 원전 마법이 어떤 것이었는지 유추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거세기만 한 마력풍의 원인은 그로 인한 부작용이었다.
『아마 이곳의 주인은 그리 나이가 많은 놈이 아니었을 거다. 마법 체계가 그렇게 깊질 못해.』
[얼마나 되었을까요?]
『글쎄. 한 3천 년쯤? 비교적 젊은 놈이었던 것 같군.』
[…?]
엘릭은 질린 기색이 되었다.
그만큼 나이를 먹은 용이 나이가 어리다고?
『고룡(古龍) 소리를 들으려면 5천 년쯤은 묵어야지. 그래도 정작 고룡들 사이에서는 막내 생활을 면치 못하겠지만. 고작 천 년 정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이따위로 망가질 가드 시스템밖에 남기지 못한 녀석이 우스울 뿐이다.』
3천 년 묵은 용을 ‘젊다’고 표현한다. 그렇다면 대체 메피스토는 얼마나 나이를 먹은 걸까?
‘하긴. 그러니 그만큼 고대와 선사 시대는 많은 게 베일에 가려져 있지만.’
진화학적으로 추측하기로, 현 인류가 대륙에 출몰하기 시작한 것은 4만 년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진짜 ‘역사’라고 할만한 시대는 그리 얼마 되지 않았으니.
어쩌면 그 전부터 대륙의 주인이었던 용과 마족의 입장에서는 모든 게 우스울지도 몰랐다.
『그러니 인간이 신기한 것이다. 끽해야 백 년도 못 살고, 역사도 2천 년을 넘지 못한 것들이 이만큼이나 마법을 가까이하고 있으니.』
메피소트의 혼잣말은 어딘지 모르게 씁쓸함도 느껴지고 있었다.
* * *
용의 둥지는 미로(迷路), 그 자체였다.
아주 비좁고 작은 복도가 개미굴처럼 이리저리 난잡하게 꼬여 있으니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이거 잘못했다간 영영 길 잃겠는데요?]
『흐. 안쪽으로 더 깊게 들어가 보면 그리고리 놈들 중 상당수가 진즉에 갇혀서 아사한 흔적이 많이 보이더군.』
엘릭은 질린 기색을 표했다.
아무리 하급 마족이라고는 해도, 어느 정도 마법을 쓸 수 있을 텐데 갇힐 정도라면 대체 길이 얼마나 복잡하게 꼬여 있다는 건지.
[아주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당연하지 않으냐. 본 왕의 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 놈들이 한 놈이라도 줄어들었는데 어찌 기쁘지 않을 수가 있으랴?』
[단순히 그것만은 아니신 것 같은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나. 파하하!』
‘꿀꺽했네. 꿀꺽했어.’
어쩐지 자율 행동의 반경이 갈수록 커진다 싶더라니.
이런 곳에서 인장을 주워 먹고 있을 줄이야.
착실하게 힘을 되찾고 있으니 그만큼 기쁜 모양이었다.
『그보다 이곳은 아주 복잡하다. 길은 어떻게 찾을 생각이냐?』
메피스토는 팔짱을 끼면서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시험이라도 해보겠다는 뜻.
엘릭은 가볍게 콧방귀를 꼈다.
[제가 여기서 아사한 머저리들과 같습니까?]
어차피 미로는 청연의 미궁에서도 신물이 나도록 겪어보지 않았던가.
그러니 길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심안이 그려내는 방향대로 움직이거나, 그것으로 부족하다 싶으면 마력을 뭉쳐서 갈림길 한가운데에다가 던져두면 되었다.
그럼 통로를 따라 순환하는 마력풍에 마력이 바람이 빠져나가는 방향으로 흐트러질 테니까. 반대 방향으로 이동하면 그만이었다.
『이제는 일일이 잡아주지 않아도 척척 잘 해내는군.』
메피스토는 마치 다 자란 제자를 기특하게 바라보는 스승이라도 되는 것처럼 지껄여댔다.
괜히 저기다 말을 섞었다간 말장난만 길어져 집중이 흐트러질 게 뻔히 보였기 때문에 엘릭은 굳이 대꾸하지 않고 길을 찾는 데에 주력을 기울였다.
말로 해서야 간단해 보이는 방법일지 몰라도, 그 많은 작업은 절대 쉬운 게 아니었으니까.
그러다 얼마나 들어갔을까.
엘릭은 도중에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건.’
끝없이 길게 이어지는 복도. 벽면 곳곳에 상처가 가득했다.
‘난장(亂場)…?’
흔히 몬스터가 광증에 젖어 마구잡이로 날뛰는 것을 가리켜 ‘난장’이라고 부른다.
족히 수 미터는 그냥 넘을 덩치 큰 무언가가 땅바닥 여기저기에다 발자국을 남겼고, 벽면에는 발톱 자국과 꼬리가 휩쓸고 지나간 듯한 흔적이 어지럽게 남아있었다.
특히 천장 쪽에는 시커먼 그을음이 남아 종유석 따위가 녹은 흔적도 있었으니.
어떤 몬스터가 이곳에 갇혀서 이리저리 날뛰기라도 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얼마 되지 않았어.’
끽해야 한 달? 짧으면 보름 정도?
엘릭은 가지고 있는 지식을 총동원해서 이 난장판을 만든 몬스터가 무엇인지 유추하고자 했다.
발자국의 크기와 꼬리의 흔적을 추적해 몬스터의 크기를 짐작하고.
바닥 여기저기에 흩어진 비늘 따위의 단서를 모아 종류를 예측했다.
‘이건 단순히 광증으로 인한 난장이 아니야. 무언가와 싸운 흔적이야. 상대는 최소 열… 아니 열다섯.’
엘릭의 머릿속으로 차례대로 시뮬레이션이 돌아갔다.
‘마족이다. 마족이 이곳에 진입했고, 뭔가와 싸웠어. 그러고 나서 전멸해버렸고.’
몬스터는 난장이 끝난 뒤에 언제 그랬냐는 듯이 광증을 가라앉히고 다시 안쪽으로 유유히 들어가 사라졌다.
이 복도의 크기가 녀석에게는 몹시 협소한데도 불구하고.
마치 이곳이 제집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은…?’
그러다 엘릭은 문득 위화감이 들었다.
[잠깐만요. 메피.]
『왜?』
엘릭의 목소리는 딱딱했다.
그런데.
반대로 메피스토의 대답에는 어딘지 모르게 웃음기가 다분히 섞여 있었다.
거기서 엘릭은 직감적으로 알아챌 수 있었다.
메피스토가 여태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자신이 무언가를 깨닫기를.
[이거, 설마…?]
『굳이 여기서 설명을 길게 할 필요가 무에 있을까. 직접 네 눈으로 확인해보면 될 일이지.』
메피스토는 제대로 대답도 해주지 않고 다시 훌쩍 안으로 들어갔다. 엘릭도 잔뜩 긴장한 기색으로 복도를 다시 통과했고.
그 과정에서 복도를 따라 아주 많은 흔적을 볼 수 있었다.
몬스터는 비단 마족들이 찾아왔을 때만 난장을 부린 게 아니었다.
혼자 가만히 있다가도 광증에 젖어 한참 동안 날뛰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벽에다 머리를 이리저리 처박아서 통로를 거의 무너뜨리다시피 하기도 했고, 뼈가 드러나도록 꼬리로 바닥을 수없이 내리쳐서 피와 살점이 여기저기 흩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그럴수록.
엘릭은 위화감이 더욱더 구체화하는 것을 느껴야만 했으니.
‘보석룡의 둥지와 똑같아.’
메피스토가 만든 창에 꿰뚫려 있던 보석룡.
그것이 다시 언데드가 되어 잠깐 살아났을 때도 이와 비슷한 습성을 보이지 않았던가!
그러다 마지막 지점에 다다랐을 때.
『저기 있군.』
빛 한 점 드리우지 않은 짙은 어둠 속에서.
메피스토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엘릭은 볼 수 있었다.
샛노랗게 빛나며 천천히 뜨이는 세로 동공을.
용.
진짜 용이 바로 그곳에 있었다.
꾸우우웅…!
대기가 잔잔하게 떨리는 울림과 함께.
그것이 입을 열었다.
【넌… 누구… 냐…?】
【넌… 누구이기에 그분의… 마력… 을 품고… 있는 거지…?】
* * *
“아무 일 없으시겠지?”
헤이즈는 염려 가득한 얼굴로 뒤쪽을 슬쩍 보면서 미간을 좁혔다.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
산책로를 따라, 세일러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면서 야만족의 어느 맹인 여인과 나란히 길을 걷고 있었다.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과 달리, 별다른 이상은 느껴지지 않는 평범한 여인이었다.
하지만 신분은 절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얼굴에다 흉악한 문신을 새긴 보르푸르 족의 전사들이 길목 곳곳에 서서 흉흉하게 눈을 치켜뜨고 있었으니까.
특히 이쪽을 보는 시선에는 여차하면 바로 달려들 것 같은 흉흉함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적의(敵意).
상황이 그렇다 보니, 블랙 스컬에서도 도저히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보르푸르 족과 세일러의 관계가 좋다고는 하지만, 저딴 눈빛을 하는 저들을 무조건 신뢰할 수는 없는 노릇.
그래서 헤이즈를 비롯해 블랙 스컬의 주요 전력 몇몇이 산책로 외곽에서 대기하는 중이었다.
만약 저들이 허튼짓이라도 하면 즉각 뛰어들 수 있게.
하지만.
정작 걱정 가득한 헤이즈와 다르게, 블랙 스컬의 다른 용병들은 전혀 그런 기색이 보이질 않았다.
으하암. 늘어져라 하품을 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누군가는 품에서 책을 꺼내 조용히 독서에 잠겨 있기도 했다.
보기에도 섬뜩한 검붉은 중장갑을 입고 해이해져 있는 광경이라니. 보고 있는 사람이 다 어색해질 정도였다.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고?”
블랙 스컬의 단장, 카로트는 헛웃음을 흘렸다.
“난 세상 살면서 어디 그런 모습을 한 번 보기라도 했으면 좋겠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용병들이 모두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두 눈에는 ‘아버지’인 세일러 홈즈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었다.
어느 누구도 ‘아버지’와 인연을 맺은 이상, 그를 배반하거나 거스를 수 없을 거란 믿음.
설사 그런 일이 있더라도 슬기롭게 헤쳐나가실 수 있을 거란 믿음.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헤이즈도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여전히 불안한 시선으로 세일러를 바라봤다.
뭔가 자꾸만 찝찝한 마음이 들었으니까.
그리고.
바로 그때. 세일러는 맹인 여인, 사르나이와 한참 대화에 집중하고 있었다.
“바투… 원하던 대로 용혈(龍血, 용의 피)을 얻은 것 같던데. 맞느냐?”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