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권능 해석
“대체 무슨 말인지 제대로 설명해봐요.”
『후후! 본 왕이 말했던 것. 기억하느냐?』
“기억?”
엘릭은 메피스토가 또 무슨 말을 하나 싶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메피스토가 인상을 팍 찡그렸다.
『여기 야만족 놈들이 용족어를 쓰는 게 아무리 봐도 이상하다고 했던 것 말이다!』
“아, 그거요? 깜빡하고 있었어요.”
그동안 가디언들의 충성을 받아내고, 병사들에게 나누어 줄 상승 공부를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지 않았던가.
그 때문에 보르푸르 족이 가진 ‘비밀’이라는 것도 어느새 잊고 있었다.
사실 보르푸르 족이 과거에 용과 어떤 연관이 있었다고 해도, 용이 멸종된 지 천 년이 넘은 지금까지 어떤 관계가 유지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기도 했었고.
그래서 잊고 있었던 것인데.
아무래도 메피스토는 전혀 다른 생각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동안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니나 했더니 이거 캐내고 다니셨던 겁니까?”
『싸돌아다니다니! 본 왕의 탐구욕을 그런 하찮은 어휘로 폄하하지 말지어다! 본 왕이 그동안 이 야만족이 숨겨둔 비밀을 파헤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얼마나 많은 탐문을 벌였는지 알기나 하느냐?』
“아, 예이예이. 오죽하시겠습니까요, 예이.”
『고얀 것! 본 왕에 대한 존경심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가 없구나!』
엘릭이 한 달 가까이 병사들에게 붙들려 정신이 없는 동안.
메피스토는 자신과 놀아주지(?) 않는다며 아주 심심해 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유다를 잡고 난 뒤 힘이 어느 정도 회복된 덕분에 자율성이 상당히 높아졌다는 점이라고 해야 할까?
매일 아침만 되면 어디 다녀오겠다며 홱 하고 밖으로 나가버린 것도 전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물론, 여전히 엘릭에게서 떨어지는 데는 거리상 한계가 있고, 시간적 제약도 있어서 24시간이 되기 전에 돌아와야 했지만.
그래도 그 정도면 메피스토가 자유행동을 하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마음에 안 들어, 아주….』
메피스토는 간만에 적잖게 심통이 난 얼굴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엘릭은 그 모습을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야만 했다.
‘어린애도 아니고, 무슨. 맞장구라도 쳐줘야 하나?’
오랫동안 붙어 다녀서 그런지, 엘릭은 이제 메피스토의 어투만 봐도 그의 속마음을 어느 정도 알 것 같았다.
메피스토는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당장 자신의 위대함을 이야기하라고!
자신이 대체 그동안 어떤 업적을 세웠는지(?) 직접 물어봐 주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엘릭은 한순간 그냥 무시해버릴까 싶기도 했지만.
‘어차피 잠깐 쉴 생각이기도 했고. 그냥 물어봐?’
엘릭 역시 자신이 발견한 것 외에 새로운 용의 둥지를 찾았다는 사실이 궁금하기도 했기 때문에 못 이긴 척하고 물어봤다.
“그래서 그 숨겨둔 비밀이란 게 뭔데요?”
『됐다! 별 관심도 흥미도 없는 네놈에게 본 왕이 왜 말해준단 말이냐!』
“궁금하니까 물어본 거죠.”
『흥. 어디서 날로 먹으려고.』
“정말 말 안 해 줄 겁니까?”
『당연한 소리!』
“아, 네. 그럼 됐습니다. 알겠어요.”
『…?!』
엘릭이 더 매달려주기를 바라던 메피스토가 이번에는 당혹한 얼굴이 되고 말았다.
『험험! 그래도 본 왕은 마음이 대해와도 같이 넓은 바. 네놈이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것 같으면 말해줄 의향도….』
“됐어요. 생각해보니까 어차피 주인 있는 둥지일 텐데, 뭣 하러 신경 쓰겠어요? 곧 여기서도 떠나야 할 텐데. 괜히 시간만 잡아먹지.”
『아니, 그러니까…!』
“메피는 못 들었죠? 저희 이틀 뒤에 여기 떠납니다. 사실 예상보다 너무 오래 머물렀어요.”
『뭐? 그럼 둥지는?!』
“알게 뭡니까. 미련 남으면 메피가 직접 발굴이라도 하시던가요.”
『이이…!』
메피스토는 약이 올라 죽겠다는 듯,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로 발을 동동 굴렀다.
여기서 화를 내봤자 자신이 먼저 말하지 않겠다고 튕겼으니 그러기도 힘들고.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대단한 비밀을 혼자서 삭이고 있다가, 그냥 버려두자니 속병이 날 것 같았다.
‘누굴 이기려 들려고.’
엘릭은 자신에게 덤벼도 결국 말싸움에서 매번 지는 메피스토를 보면서 콧방귀를 꼈다.
그러다 메피스토가 흥분을 겨우 삭이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정말 가겠다고?』
“그렇다니까요? 몇 번을 말해야…!”
『그리고리 놈들도 그걸 탐내고 있는데?』
“…무슨 말이에요, 그건?”
그리고리. 그 단어에 엘릭도 더 이상 장난칠 수 없었다. 시선이 저절로 메피스토에게 향했다.
『흥! 역시 이 말에는 그냥 못 지나치는군. 하지만 맨입으로 그냥 말하…!』
“장난치지 말고, 제대로 말해봐요.”
엘릭의 말투가 다른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가라앉았다.
메피스토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투였지만, 그래도 이번 일은 그에게도 중요하기 때문에 천천히 말해주었다.
『넌 그런 생각 해 본 적 없느냐?』
“무슨 생각이요?”
『그리고리가 어째서 동부 변경 지대에다 본단을 설치한 건지?』
“…그 이유가 여기 있는 용의 둥지라는 뜻입니까?”
『지나친 비약인 것 같아도 정말 이곳에 제대로 된 용의 둥지가 있다면 이상할 건 없지. 안 그래?』
메피스토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엘릭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제라이츠 황태자와 감찰국은 오랫동안 그리고리의 뒤를 추격했다. 그리고 윈즈 변경주를 그들의 비호 세력으로 지목했다.
단순히 누명만 씌운 것은 아닐 것이다. 그랬다간 정치적 역풍을 맞을 우려만 있었으니까.
아마 그럴듯한 증거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리의 본단이 진짜 윈즈 변경주에 있다는 증거가.
그리고.
실제로 적사자군이 황실의 토벌군을 휘몰아칠 때, 그리고리의 마족들이 그들에게 합류한 것이 발견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을 가져야만 한다.
왜?
어째서 그리고리는 동부 변경 지대에 똬리를 틀었는가?
무법지대이니 단순히 몸을 숨기기가 쉬워서?
물론, 그것도 이유의 하나일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리의 목적이 아자젤의 부활에 있는 이상,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에는 깊은 계산이 있어야만 했다.
‘아자젤을 부활시키기 위해서는 그만큼 방대한 마력이 필요해. 북방에서 벌이던 인신 공양 따위로는 한계가 있을 테고…. 하지만 용이 남긴 마력이라면, 충분히 승산이 있겠지.’
물론, 일반적인 용의 둥지일 뿐이라면 그다지 큰 효과를 보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만약 보석룡의 둥지 때처럼 그리고리가 발견한 둥지에도 용의 사체가 남아있다면?
그때는 이야기가 달라지는 것이다.
엘릭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한 자신의 안일함에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조금만 더 생각을 깊게 했더라면 충분히 닿을 수도 있었을 추측이었건만.
‘너무 정신이 없었어. 그만큼 멀리 내다보지도 못했고.’
엘릭은 다시 한번 더 자신의 한계를 느껴야만 했다.
그리고 겉보기에는 가벼워 보여도, 아주 깊은 메피스토의 통찰력에 적잖게 놀라고 말았다.
“그래서 들쑤시고 다니신 거군요.”
『아자젤 놈들이 좋은 짓을 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안 그래?』
엘릭은 헛웃음을 흘렸다.
세상사에 무관심한 것처럼 굴지만, 아자젤을 엿 먹일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한다 싶었으니.
『야만족…‧ 그러니까 보르푸르? 하여간 이놈들이 자신을 가리키는 단어의 뜻은 ‘용의 자식’이다. 대대로 용의 터전을 지켜왔던 거지.』
“성지(聖地)… 그곳입니까?”
『그래.』
처음 이곳에 군영을 설치했을 때. 보르푸르 족이 내세운 조건 중 하나가 바로 자신들이 ‘성지’라고 여기는 곳에 발을 들이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들 일족이 머무는 터전의 뒤쪽, 협곡에서도 아주 깊은 곳으로 들어가야만 다다를 수 있다는 곳.
어차피 엘릭도 여기서 괜한 소란을 일으켜서 적의 추격을 받을 생각 따윈 없었기에 그쪽으로 신경도 쓰지 않았건만.
‘그리고리가 관심을 보인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엘릭은 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면서 눈을 빛냈다.
“그럼 거기가 그리고리의 본거지입니까?”
『그랬다면 진즉에 우리가 여기 있다는 게 들켰겠지.』
엘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그리고리도 저쪽을 발견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건지, 주변 탐색만 계속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는 건…!”
『놈들이 손을 쓰기 전에 이쪽에서 먼저 들이칠 수도 있단 뜻이 되겠지.』
엘릭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자젤의 부활에 있어 가장 필요한 것을 이쪽에서 도중에 가로챈다?
그것만큼 확실한 것도 없을 것이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이곳이 적진 한가운데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세일러와도 깊은 인연이 있는 곳.
정확히 어떤 인연이 있는지는 듣지 못했지만, 함부로 분란을 일으켰다간 큰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이걸 알게 되면 캘리거 백작이나 쿠란시빌 자작도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고.’
엘릭도 그동안 군영 내에 벌어지고 있는 갈등과 분열의 골을 모르는 게 아니었다.
‘그래도 잘만 엮으면 괜찮은 그림이 나올 것 같은데….’
아직은 제대로 된 그림이 나오질 않았다.
‘일단 둥지라는 곳부터 제대로 둘러보자.’
하지만 당장 자신이 자리를 뺄 수는 없는 노릇.
엘릭은 다른 수를 써야겠다는 생각에 손을 활짝 펼쳤다.
“【나와라】.”
츠츠츠-
손바닥 위로 잿빛 마력이 둥실 떠오르면서 자그마한 소용돌이를 그렸다.
권능 ‘북풍’의 일부를 개방하자, 그에게 완전한 충성을 바친 망령 중 일부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끼이이?
망령은 자신에게 시킬 일이라도 있냐는 듯 머리를 갸웃거렸다.
“【보여라】.”
다시 한번 더 언령을 발동하자, 한순간 엘릭은 망령과 연결된 붉은 실이 한층 더 두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모든 정신이 망령 쪽으로 확 하고 쏠렸다.
시야가 살짝 흐릿해진다 싶더니, 다시 초점이 잡혔다.
다만, 이전과 느낌이 전혀 달랐다. 비치는 시야도 전혀 달랐다. 엘릭, 자신의 얼굴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망령과의 연결고리를 강화해서 두 눈을 공유하게 된 것이다.
『하여간 별 희한한 짓을 다하는군.』
메피스토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것이 보였다.
엘릭의 의념을 실은 망령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고, 빤히 메피스토를 바라보기만 했다.
[….]
『…?』
[…?]
『…!』
메피스토는 왜 이러나 싶어 멀뚱히 보다가, 뒤늦게 속뜻을 눈치채고 인상을 구겼다.
앞장서라는 뜻이었으니까.
메피스토는 좀 전에 다녀온 길을 또 가야 한다는 사실에 귀찮은 얼굴이었지만, 곧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몸을 그쪽으로 움직였다.
망령도 허공으로 둥실 떠오르면서 막사를 빠져나와 메피스토의 뒤를 빠르게 쫓았다.
시야 아래로 수많은 광경이 스쳐 지나가는 와중.
‘세일러? 누구랑 있는 거지?’
한순간, 엘릭은 세일러가 맹인으로 보이는 어느 여자와 길을 걸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얼핏 볼 수 있었다.
보르푸르 족으로 보이는 여인은 어딘가 신비함을 품고 있었다.
분명 겉보기에는 지극히 평범한 인상이건만.
겉보기와는 달리 절대 범상치 않은 내력을 품고 있었다.
성스럽다?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으리라.
마법사의 마력이나 마족과는 전혀 다른 느낌.
신력(神力)이었다.
엘릭은 세일러가 만나고 있는 사람이 누군가 싶었지만, 나중에 물어봐야겠다 싶어 관심을 잠깐 뒤로 물렸다.
이 외에도 헤르만이 기사들을 단련시키는 것이 언뜻 보였고, 무슨 일인지 브라이언이 프란츠 백작가 쪽 병사들과 신경전을 벌이는 것도 보였다.
그렇게 수많은 광경을 뒤로 하고, 망령은 메피스토와 함께 부족 마을을 지나 협곡으로 들어갔다.
빛 한 점 들지 않을 정도로 어둑한 길을 지나고 또 지나다가.
『이곳이다.』
메피스토는 한 지점에 이르러 멈춰 섰다.
파아아!
엄청난 양의 마력풍(魔力風)이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동굴이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