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권능 해석
피식!
어디서 그런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이 새끼가…?”
엘릭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설마 가디언이 이런 반응을 보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으니까.
가디언이 진심으로 복종하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그도 알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북풍이라는 권능에 묶여있고, 오토 한이 남긴 유지 때문에 그의 명령에 따르는 것일 뿐.
그래도 여태 명령에 충실히 따르고 있어서 어느 정도는 진심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노골적으로 비웃음을 던질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뭘 발끈하고 그러나? 아주 당연한 것 같은데.』
하지만 메피스토는 재미있다며 웃음을 터뜨릴 뿐이었다.
엘릭이 짜증 어린 투로 그쪽을 노려보는데, 메피스토가 한쪽 입꼬리를 씩 말아 올렸다.
『말했을 텐데? 이놈들은 원래 한때 우리 마왕군마저도 골치 아프게 만들었던 녀석들이라고.』
“….”
『지금이야 영락에 영락을 거듭해서 그때의 위용이라고는 눈꼽 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꼬락서니가 되었다만, 그래도 자존심은 아주 강하게 남아있을 거다.』
엘릭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자신이 여기서 할 일은 하나이지 않은가.
“그럼 이놈들, 진심으로 제게 복종하게끔 만들어야겠네요.”
이번에는 대답이 없었다.
그저 말없이 웃기만 할 뿐.
하지만 엘릭은 그것이 정답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디언의 충성을 끌어낸다.
어쩌면 그건 메르빙거의 새로운 가주가 되려는 그에게 있어 지극히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이들은 가문의 옛 가신. 그렇다면 그들에게서 충성도 받아내지 못하고서야 어찌 가문을 다시 일으키겠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여기서 다시 문제가 생긴다.
가디언의 충성은 어떻게 끌어낼 수 있을까?
가신을 세우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별의 종군처럼 영웅적인 면모를 보여줌으로써 동경심을 갖게 하여 자발적으로 모이게 하거나.
네레스타 가문이 곧잘 그러듯이, 세상이라는 파도를 막아주는 든든한 방파제가 되어주거나.
혹은 감찰국처럼 대단한 이권을 쥐여주는 것도 방법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미 죽은 지 오래인 가디언들에게 위와 같은 방법들은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이미 산 자들만이 가질 법한 욕망이나 야욕 등의 감정이 거세된 지 오래일 테니.
그저 미련만 남아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
그 미련을 충족시켜주는 것.
“역시. 전사라면, 힘으로 굴종시키는 수밖에는 없겠네요.”
메르빙거의 가주로서 자격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그것만이 가디언의 충성을 끄집어낼 유일한 방법일지니.
그런다면 빙의에도 적극적으로 협조할 테고 결국 저들의 잠재력을 크게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다.
“【나와라】.”
엘릭이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러자 바닥에 자그마한 빙판이 깔리면서 길쭉한 고드름 같은 것이 올라와 손에 잡혔다.
얼음 창. 눈앞에 있는 녀석이 쓰는 주 무기가 바로 창이니. 똑같은 무기로 상대해서 꺾을 요량이었다.
순간, 유령 기사의 눈덩이에 맺힌 시퍼런 불길이 더 크게 일렁였다.
엘릭이 뭘 하려는 건지를 눈치챈 것이다.
그러자 한쪽 입술이 더 크게 비틀렸다.
감당할 수 있겠냐고 말하는 듯한 모습.
마치 주인이라고 해서 봐주는 일은 없을 거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오히려 엘릭이 바라는 바였다.
얼음 창을 들어 유령 기사에게 겨누면서 까닥거렸다.
“덤벼.”
전형적인 도발.
하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파앗-
유령 기사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창을 세게 움켜쥐면서 엘릭 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야말로 민첩하기 짝이 없는 움직임. 청랑을 어찌 그렇게 쉽게 처치해버렸는지를 몸소 보여주는 것 같았다.
콰콰쾅!
그렇게 충돌이 시작되고 폭발이 일었다.
땅거죽이 뒤집히고, 얼음 조각이 튀었다.
『반발하는 옛 가신과 그런 가신을 때려잡으려는 군주라.』
메피스토는 그런 두 사람을 보면서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그야말로 콩가루 가문이 따로 없구나.』
정말이지 재미난 싸움 구경이었다.
* * *
‘빠르다!’
엘릭이 유령 기사와 충돌하자마자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다.
유령 기사는 움직임을 쉽게 쫓을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아귀감을 잔뜩 벼리지 않았더라면 결코 움직임을 예측할 수 없었을 정도로.
녀석의 창날이 눈 깜짝할 새에 목덜미에 다다라 있었다. 얼음 창이 도중에 가로막지 않았더라면 위험했을 것이다.
끼리릭.
순간, 유령 기사의 머리통이 다시 옆으로 기울어졌다.
눈덩이의 푸른 불꽃이 살짝 커졌다.
의외라며 놀라는 듯하다.
그것이 엘릭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이 새끼가!’
차아아앙!
엘릭은 마력을 한껏 크게 돌렸다. 그러자 강체술의 묘리에 따라 근육에 한껏 힘이 들어갔다.
완력에서는 엘릭이 한 수 위였다. 유령 기사의 창이 옆으로 튕겨 나갔다.
그러자 훤히 드러나는 허점. 엘릭은 그 사이로 걸음을 옮기면서 잇달아 얼음 창을 찔러넣었다.
쉬쉬쉬쉭-
창날이 허공을 꿰뚫을 때마다, 창끝에서는 자그마한 회오리가 일어났다.
<다섯 개의 회오리>. 푸른 매에게서 배웠던 창술이, 그것도 숨겨진 비기가 드러나고 있었다.
유다를 상대했을 때보다 훨씬 깔끔하고 깊이 있는 동작들.
이미 한 차례 실전을 겪으면서 묘리를 깊게 터득했다는 증거였다.
웬만한 익스퍼트 급의 무도가들도 함부로 상대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하지만.
차차차창!
유령 기사는 아주 능숙하게 움직이면서 공세를 잇달아 튕겨냈다.
마치 당신과 자신의 격차는 이 정도라는 듯, 함부로 창을 휘두를 생각 따윈 하지 말라며 시위하듯이 호쾌한 움직임마저 보였다.
그러면서 거센 반격까지 선보이니.
콰릉, 콰르르릉!
창이 허공을 찢어놓을 때마다 마치 천둥이라도 울리는 것처럼 어마어마한 굉음까지 터졌다.
콰쾅! 콰콰콰-
쿠르르르!
엘릭은 심안으로 유령 기사의 창술 궤적을 어떻게든 쫓으려 했다.
하지만 허공에 뭉쳐있던 결은 어떻게 잘라내려 하면 어느새 풀려있고, 없다 싶으면 어느새 생성되어 그의 허점을 노렸다.
그럼 아귀감이 항상 외쳤다.
피하라고.
콰아아앙!
엘릭은 창을 막으려다 말고, 위험하다 싶어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널찍이 떨어뜨렸다.
그러자 그가 있던 자리로 유령 기사의 창이 틀어박히면서 땅거죽이 3미터도 넘게 치솟았다.
후두둑, 두둑!
돌가루와 모래가 비처럼 쏟아졌다.
창날이 직격한 자리엔 아주 깊은 크레이터가 파여 있었다.
『이번에는 위험했는데?』
[그건 나도 알고 있… 다구요!]
메피스토가 던진 핀잔을 제대로 대꾸할 겨를도 없이 다시 몸을 뒤로 내뺐다.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거센 충격파를 실은 창날이 날아오고 있었다. 미미하게나마 창끝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와류가 그려지고, 막강한 흡입력과 함께 생성된 회오리가 아주 작은 형태로 압축되어 초진동(超振動)을 일으키고 있었다.
<다섯 개의 회오리>가 비기는 물론, 숨겨진 오의까지 모두 터득하여 극의에 다다르게 된다면 이런 모양새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아니, 그런 게 분명했다.
‘날 놀리고 있어!’
유령 기사는 <다섯 개의 회오리>를 자기 방식대로 풀어내고 있었다.
엘릭과 빙의한 동안 필요한 구결을 모두 습득해둔 모양이었다. 그리고 살아생전에 터득한 성취가 아주 높았으니 그것을 낱낱이 해체하여 재창조의 수준으로 만들 수 있었던 거겠지.
원주인인 하만이 본다면 경악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언젠가 <보라매의 기상>을 해석하기 위해 깊이 단련해뒀던 자신의 독문절학이 너덜너덜해진 셈이니.
문제는 수준이 이쪽이 몇 수 위라는 점이었다.
그것이 엘릭으로서는 불쾌했다.
유령 기사가 무슨 생각으로 농락에 가까운 이런 짓거리를 하는지를 쉽게 알 수 있었으니까.
이런 것도 해내지 못하는 주제에 자신을 어떻게 복종시킬 수 있겠냐며 비웃는 것이다.
그냥 여태 그랬던 것처럼 가주의 권위는 계속 인정해줄 테니, 자발적인 충성은 꿈도 꾸지 말라는 투.
자신이, 그리고 자신‘들’이 충성을 바칠 대상은 오토 한이지, 그의 발 끄트머리에도 닿지 못한 당신 따위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자신들은 쉬이 고개를 숙이지 않을 거다, 뭐 그런 건가?’
심안으로 궤적을 쫓으려 해도 도저히 쉽지가 않았다.
막으려 치면 옆으로 돌아서 허점을 노려오고, 피하려고 하면 갑자기 폭사해서 움직임을 봉쇄해버리니.
그것은 분명히 <다섯 개의 회오리>이면서도 절대 <다섯 개의 회오리>가 아니었다.
결이 흩어지고 부서졌다. 뭉쳤다가 사라졌다.
녀석을 상대하는 데 있어서 심안은 도무지 쓸모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릇된 판단을 주어 위험하기만 했다.
빙의를 한다면 또 모를까, 현재 엘릭의 수준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가 어려운 영역이었기 때문에 생긴 결과였다.
츠츠츠-
점점 조급해지는 엘릭의 속내를 읽은 걸까. 그림자가 출렁였다.
도와줄까?
시니컬한 웃음.
메피스토는 이제 어느 정도 친구처럼 친숙해졌는데, 이 녀석은 전혀 그런 것이 없었다.
여전히 음험하고, 탐욕 가득한 속내가 느껴졌다.
‘됐으니까, 꺼져.’
너무하는군. 나는 어디까지나 충성스러운 심복으로서 주인을 도와 충성스럽지 못한 수하들을 징계하려는 것일 뿐인데 말이야.
흉살의 인장이 만들어진 이후. 휼의 사념체는 본격적으로 존재감이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만약 여기서 흉살의 인장을 사용한다면 유령 기사의 움직임도 어느 정도 쫓을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파괴력도 높아질 테니 제압도 가능하겠지.
‘꺼지라고.’
하지만 엘릭은 절대 녀석의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
그랬다간 유령 기사를 꺾더라도, 절대 자발적인 충성심은 끌어내지 못할 테니까.
오로지 창술로만 꺾어야만 했다.
흠! 재미없군.
쩝. 휼의 사념체는 그렇게 입맛 다시는 소리를 내면서 조용히 가라앉았다.
녀석은 단순히 유령 기사를 삼켜보고 싶었던 게 아닐까. 엘릭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파앗!
그때, 유령 기사의 창이 아래에서 위로 솟구쳤다.
목표는 엘릭의 미간.
“흡!”
엘릭은 숨을 한껏 들이켜면서 왼손을 위로 올려 아래쪽 창날을 솟구치게 했다.
그런데.
화아악!
갑자기 이쪽을 찔러오던 창날이 도중에 아래쪽으로 방향을 꺾었다.
전형적인 페이크 모션.
‘이런!’
그것을 막으려던 얼음 창은 결국 아무것도 없는 빈 허공을 가로지를 수밖에 없었고.
기어코 허점이 생겨버리자, 유령 기사는 재빨리 엘릭의 다리를 걸어버리고 말았다.
퍽!
우당탕.
엘릭은 균형을 잃고 바닥을 굴러야만 했다.
재빨리 다시 일어서려고 했지만, 그보다 먼저 창날이 그의 턱에 다다라 있었다.
유령 기사가 턱을 높게 치켜들며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만하기 짝이 없는 시선. 이러고도 주인이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냐고 말하는 듯했지만.
『거기서 끝낼 건 아니지?』
[그럴 리가요!]
엘릭은 얼굴을 뒤로 눕히면서 땅에 떨어졌던 얼음 창을 크게 휘둘렀다.
유령 기사는 그런 엘릭의 머리를 노리려다가 도중에 창의 궤적을 바꿔 얼음 창을 막으려 했다.
차아아앙!
거센 충돌음이 빚어지며 얼음 창의 일부가 부서졌다. 얼음 가루가 뿌옇게 튀면서 둘 사이를 가렸다.
유령 기사가 재빨리 창을 뒤로 빼려는데, 갑자기 또 다른 얼음 창이 사각지대에서 튀어나와 투구를 노렸다.
녀석은 황급히 창을 옆으로 틀어 그것을 가로막고자 했다. 하지만 그사이 반대편에서 얼음 가루가 갈라지면서 다른 얼음 창이 튀어나와 유령 기사의 목 뒷덜미에 다다랐다.
“일대일. 맞지?”
유령 기사의 목 뒷덜미에 닿아 있는 또 다른 얼음 창. 그것은 엘릭의 왼손에 쥐어져 있었다.
쌍창(雙槍). 기존의 얼음 창으로 페이크 모션을 취해 유령 기사를 속이고, 다른 얼음 창으로 승기를 잡은 것이다.
조금 전, 유령 기사가 엘릭에게 했던 것을 똑같이 고스란히 되돌려 받은 셈.
….
유령 기사는 어느새 진중한 눈빛으로 엘릭을 바라봐야만 했다.
그리고.
차차차창!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재차 격돌이 이어졌다.
이전과 달리, 더 이상 일방적인 싸움이 아니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