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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187화 (186/405)

187화

권능 해석

엘릭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용?

여기서 갑자기 그런 게 왜 언급되는 거지?

[용족어? 용언(龍言)을 말하는 겁니까?]

그래서 엘릭이 가장 먼저 떠올린 생각도 용언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말을 꺼내자마자 메피스토의 말뜻이 이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용언은 언령(言靈)의 일종이다.

그것도 거의 최고 등급에 해당하는 언령.

언령 마법을 주로 사용하는 자신도 아직 이 이상으로 발전시키고 있지 못하고 있건만, 일반인들이 용언을 사용한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저놈들이 무슨 드래코니안이나 드라군도 아니고, 어떻게 용언을 써? 그놈들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할 텐데.』

아니나 다를까. 메피스토는 뭔 어이없는 소리를 하냐는 투로 엘릭을 바라봤다.

엘릭은 계면쩍은 얼굴로 볼을 긁적여야만 했다.

다만, 이제는 메피스토의 말뜻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럼… 용들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단 말씀이세요?]

『비슷하다.』

[비슷하다니요?]

『진짜 용족어였다면 본 왕이 처음부터 알아챘겠지. 그런데도 이리 늦은 건 저것이 용족어의 열화판이기 때문이다.』

[열화판?]

『그래. 아마 저 언어의 원본은 용족어였을 거다. 용언과 가까워, 수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진리를 함유하여, 만상을 조금씩 변화시킬 수 있었던….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풍화되어서 지금의 형태로 남은 것 같다.』

엘릭의 눈이 빛났다.

세일러에게 듣기로 산악민족은 예부터 수많은 부족으로 갈라져 있어 서로 간에 교류가 그리 잦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부족 언어가 수백 개에서 수천 개에 달할 정도라나?

보르푸르 족은 최근에야 급부상하여 12부족으로 손꼽힌 것일 뿐.

원래 그들의 세력도 작았다는 것을 감안해 본다면.

‘부족의 시초가 용과 연관이 있나?’

뭔가 뜻하지 않은 곳에서 재미난 기연을 만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런 걸 대체 어떻게 알아요?]

『본 왕이 마지막까지 싸웠던 게 누구였나?』

[마지막… 용왕?]

『그래. 이 세상에 마지막 남은 용의 숨통을 직접 끊었던 것이 바로 본 왕이니라. 그뿐만 아니라, 본 왕이 직접 수많은 용의 날개를 뽑고 목을 꺾었지. 그런데 어찌 용족어에 대해서 모르랴?』

엘릭은 일리가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마정석은 원래 드래곤 하트와 데몬 주얼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것이니.

『아무튼 재미난 곳이로고. 그저 문명의 혜택에서 동떨어진 놈들인 줄로만 알았는데, 메르빙거 말고는 인간과 전혀 교류가 없던 용과 친분이 있다라. 딱히 용혈(龍血)을 타고난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지.』

협곡으로 들어가는 내내.

보르푸르 족에게 고정된 흥미 가득한 메피스토의 시선은 도저히 떼어지질 않았다.

* * *

“원래대로라면 제국의 병사들에게 땅을 내어주는 것은 부족을 배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나… 세일러 님의 부탁이 있으셨기에 들어드리는 것이오.”

“감사합니다.”

“북쪽에 쓰지 않는 땅이 있소. 그곳을 쓰시오. 그리고… 부디 조용히 머물다 가시오.”

자신을 촌장이라고 밝힌 노인은 제국어를 그런대로 유창하게 사용하면서 별의 종군이 군영을 설치하는 걸 허락했다.

하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젊은 청년들의 시선은 경계심에 가득 차 있었으니.

만약 허튼짓을 저지른다면 바로 너희들을 몰살시켜 버리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풍겼다.

물론, 별의 종군이 의탁을 요청한 곳은 보르푸르 족 내에서도 평화를 추구하며 참전을 거부한 씨족이 있는 곳이라, 규모가 아주 작아 별의 종군을 무력으로 어찌할 수 있는 수준은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이 우물에다 독이라도 탄다면 정말 큰 일인바.

엘릭과 이사벨은 병사들에게 절대 씨족 사람들을 건드리지 말라고, 아니, 이왕이면 접점을 가지지도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애당초 이곳과 인연이 있던 세일러가 아니었더라면 자리도 잡지 못했을 테니, 괜한 자극을 주고 싶지 않았다.

병사들도 같은 생각이었기에 별다른 동요는 없었다.

애당초 이곳은 전통적으로 산악민족의 영역으로 불리던 곳. 제국에서는 ‘변외(邊外)’라고 불리던 지역이었다.

이런 곳에서 사고를 쳐서 외딴 섬처럼 고립되었다가 전멸하고 싶은 생각 따윈 추호도 없었다.

반발이 있을까 잔뜩 경계했던 캘리거 백작과 쿠란시빌 자작 쪽의 동향이 너무 조용해서 의아하긴 했지만.

그래도 군영 설치는 그리 어렵지 않게 진행되었다.

식수를 조달하고, 식량으로 삼을 만한 것을 물색하는 등, 모두가 바쁘게 움직이던 그때.

엘릭은 이사벨에게 따로 부탁해서 홀로 군영에서 멀찍이 떨어지고 있었다.

자신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서였다.

『뭘 하려고?』

“수련이요.”

『수련?』

메피스토는 갑자기 그게 웬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얼굴로 엘릭을 바라봤다.

“뭐 좀 깨달은 게 있어서요.”

전쟁을 치르는 동안.

사그나드와 유다를 상대하면서 엘릭은 이래저래 터득한 게 아주 많았다.

그리고 지금 가진 힘으로 만족했다간, 이 위기를 극복하기 힘들지도 모르겠단 생각까지도.

이곳은 적진 한가운데였고, 세상에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초인(超人)들은 많아도 너무 많았다.

하루라도 바삐 더 강해질 필요가 있었다.

『설마 권능은 아니겠지?』

“맞는데요?”

『빌어먹을 재능충 새끼.』

메피스토는 이제 질린다는 얼굴이 되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저 말인즉슨 벌써 ‘북풍’과 ‘한설’의 응용법을 찾았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리고리도 탐낼 정도로 뛰어났던 것이 바로 겨울 현자의 힘이다.

당연히 그것을 제어하고 능숙하게 다루는 것만 하더라도, 보통 사람들이라면 한세월이 필요할 텐데.

대체 어디가 어떻게 생겨 먹었기에 벌써 그걸 제 입맛대로 고치겠다는 건지.

『그래서 뭐 어떻게 할 건데?』

“북풍을 좀 만져보려구요.”

『한설은 아니고?』

“한설은 쉬워요. 일단 구조 자체가 무작위로 겨울 폭풍을 날려서 주변을 싹 쓸어버리는 거잖아요? 그럼 그 영역을 원하는 방향으로 좁히면 좀 더 효율적으로 쓸 수 있을 겁니다.”

『필드용이라는거군.』

“빙고.”

한설은 일정한 범위를 삽시간에 절대영도의 얼음 지대로 만든다.

그 범위와 방향을 조절할 수 있다면, 마력을 엄청나게 잡아먹던 기존의 단점을 극복할 수 있었다.

『강화 방식은?』

“심상 결계를 구축하면 되지 않을까요?”

한 마디로 임의로 결계를 설치해서 범위를 고정하겠다는 의미였다. 그럼 겨울 폭풍도 결계 안쪽만 돌아다닐 테니까.

다만, 결계 구축은 상당한 준비 작업을 필요로 한다.

모든 것이 급박히 돌아가는 전장에서는 사용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바로 심상 결계.

심상(心想). 즉, 마음속에 그린 풍경을 바깥세상으로 끄집어내어 구현하는 방식을 사용한다면, 한설을 조절하는 데에 아주 유용할 것 같았다.

『그건 쉽고?』

물론, 말처럼 쉬운 건 절대 아니었다.

애당초 머릿속에 든 것을 고스란히 물리적 세계에 간섭하게 만든다는 것부터가 말도 안 되는 짓이었으니까.

일반 마법사는 꿈도 못 꿀 이야기였다.

“아직 고민 중이긴 해요. 그래도 어떻게 알고리즘만 잘 짜면 될 것 같던데요?”

엘릭에게는 남들이 가지지 못한 장기가 있었다.

심안.

그리고 아귀감.

결을 따와서 임의로 마력장을 생성하는 건 이미 지금도 하고 있는바. 아귀감을 따라 그 범위를 확장해 ‘고정’만 할 수 있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여긴 것이다.

『그래… 맘대로 해라. 북풍은?』

“그게 문제란 말이죠.”

엘릭은 사람들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장소를 발견하자마자, 평평한 바위에 앉아 미간을 좁혔다.

“동조율을 어떻게 끌어올리냐는 게 관건인데… 음!”

단순히 가디언을 소환하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라면, 사실 엘릭이 이렇게 걱정할 것도 없었다.

한설의 위력을 강화하면, 덩달아 가디언의 전력도 올라갈 테니.

하지만 엘릭은 가디언을 다른 방식으로도 사용하고 있었다.

빙의. 아주 짧기만 한 그 시간을 늘리고, 망령이 생전에 가지고 있던 힘을 더 많이 끌어오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나와라】.”

츠츠츠-

엘릭은 허공을 가볍게 짚어 유다를 상대했을 때 빙의시켰던 망령을 소환했다.

그림자가 일렁이면서 유령 기사가 위로 불쑥 올라왔다.

한 손에는 기다란 장창을 들고 있는 자.

풍기는 위압감이 적잖았다.

처척!

하지만 유령 기사는 살벌한 기세와는 달리, 엘릭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오토 한의 후계자인 엘릭을 주인으로 모시고 있다는 뜻. 절대적인 충성심이 물씬 풍겼다.

“야.”

유령 기사가 고개를 슬쩍 위로 들어 올렸다.

하명하실 것이 있다면 얼마든지 해달라는 투.

그런 녀석을 가만히 보면서 엘릭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너 이름이 뭐냐.”

…끼리릭?

유령 기사는 우두커니 한참 동안 가만히 있다가 머리통을 옆으로 기울였다.

무슨 뜻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투였다.

“이름이 뭐냐고.”

끼리릭.

유령 기사의 머리통이 다시 제자리를 되찾았다.

눈덩이에 자리 잡은 푸른 불꽃이 크게 흔들렸다.

“사는 곳은 어디였어?”

….

“연인은 있었고?”

….

“부모님은?”

….

“기억나는 게 하나도 없어?”

….

“젠장. 말을 못 하면 무슨 반응이라도 보이던가. 가만히 있으면 내가 뭘 어떻게 알아먹어?”

엘릭이 무슨 질문을 던지든 관계없이 유령 기사는 아무 대답도 없이 가만히 경직된 자세를 유지하고만 있을 뿐이었다.

엘릭은 분통을 터뜨렸다. 답답해 죽겠다는 듯.

메피스토가 봤을 때는 만담도 그런 만담도 없었지만.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이유를 물어볼 뿐이었다.

『대체 뭘 하는 것이냐?』

“이놈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뭘 아는 게 있으면 동조율이 올라갈까 싶어서 그런 거죠.”

엘릭은 망령이 가진 힘을 끌어 올리는 데에 한계가 있는 것이, 망령에 대해 깊게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어서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는 오토 한과 다르게 가디언들과 이렇다 할 접점이 없었다. 그저 오토 한이 선물처럼 내어준 것을 받기만 했을 뿐.

그러니 가디언들과 친분을 가질 수 있다면, 좀 더 동조율을 끌어올릴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멍청한 소리 하긴.』

메피스토는 그걸 더 어이없다는 투로 여길 뿐이었다.

“아, 왜요?”

『네놈이 쓸데없는 짓을 하니 그렇지.』

“무슨…!”

『자고로 충복이란, 가신이란, 그렇게 다루는 것이 아니다.』

엘릭은 메피스토가 또 쓸데없는 거로 딴죽을 거는 건가 싶어 짜증을 내려는데, 순간 그가 내뿜는 위압감에 자기도 모르게 주춤거리고 말았다.

단순히 팔짱을 끼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만마(萬魔)를 굴종시키던 대마왕으로서의 자세와 품위가 물씬 느껴졌다.

『너의 태도부터가 잘못되었다. 무릇, 군주란 존재는 만인의 위에 서야만 한다. 그들을 굴종시키고, 숭배케 하며, 경외를 느끼게 해야 한다. 부모처럼 눈높이를 맞춰주거나 낮은 자세를 취해서는 절대 아니 되는 것이다.』

“…!”

『너 역시 가문을 일구고, 누구보다 높이 일어서려는 존재가 아니냐. 그렇다면 그에 걸맞은 자세와 품위를 갖추어라. 높은 시선을 가지며 아래를 굽어보는 습관을 만들어라. 그래야만 세상만사가 한 폭으로 네 눈에 담길 것이니. 낮은 곳에서는 낮은 것밖에 보이지 않는 법이다.』

엘릭은 메피스토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을 맛봐야만 했다.

높은 시선을 가져라.

세상만사를 한 폭의 그림처럼 눈에 담아라.

이 두 말이 그의 가슴에 크게 와 닿은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엘릭이 가문의 어른들에게 배워야 했던 제왕학을, 이제야 메피스토에게 어렴풋이 배우고 있는 것이다.

“그럼 여기서 뭐라고 하문해야 하는 거죠?”

『그 해결책은 네가 만들어야지.』

메피스토의 입술이 살짝 비틀어졌다. 웃음기 가득한 미소였다.

엘릭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절대 날로 주지는 않겠다는 의미였으니까.

하지만.

엘릭은 어쩐지 자신이 여기서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알 것 같았다.

그래서 여전히 요지부동으로 있는 유령 기사를 돌아보면서 물었다.

“야.”

끼리릭?

유령 기사의 머리통이 다시 옆으로 기울어졌다.

“너는 진심으로 날 주인으로 생각하냐?”

….

잠시간의 침묵.

그리고.

끼리릭!

두 눈덩이 말고 아무것도 없던 유령 기사의 입가 부분에 실선이 살짝 그어지면서 크게 벌어졌다. 그것은 마치 진짜 입처럼 보였다.

한쪽 끄트머리가 크게 비틀렸다.

비웃음이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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