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패전 혹은 승전
‘사르나이. 그런 일이 있었으면서 어째서 내게는 한 마디도…!’
바투는 이를 악물었다.
최근 들어 그와 반려자 간의 관계가 옛날 같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제국이 조상의 터전을 짓밟았듯이, 이제는 자신들이 제국을 짓밟아 주어야 한다는 강경론자인 자신과 다르게.
사르나이는 언제나 화합과 화해를 이야기하는 평화주의자에 가까웠으니까.
당장 부족의 권력은 그가 틀어쥐고 있었기 때문에 상관없었지만.
‘대전사’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사르나이도 절대 그에게 뒤지지 않는 실력을 자랑했다.
그저 겉으로 그걸 크게 티를 내지 않았을 뿐.
그래도 바투는 언젠가 사르나이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리라 믿었다.
언제나 그래왔으니까.
그런데… 아무래도 이번에는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세일러 홈즈.
부모 형제도 없이, 부족으로부터도 버림을 받아 다 죽어가던 두 사람을 거두어줬던 아버지.
그들에게 꿈을 심어주었고, 힘을 쥐여 주었던 그가 그곳에 있었는데도 말을 해주지 않았다는 건. 대체 무슨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전투 중이었던 그를 괜히 혼란스럽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던 걸까, 그것도 아니면….
욱씬!
그 순간, 바투는 반밖에 남지 않은 왼팔이 욱씬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을 청사자라고 밝혔던 자가 베고 베고 지나간 자리.
주술사들이 다급히 달라붙어 치료해준 덕분에 덧나거나 하진 않았지만, 여전히 그날의 일을 떠올리면 환지통(幻肢痛)이 강하게 찾아왔다.
‘일단은… 지금 일에만 집중하자.’
바투는 분노를 억지로 삼켰다.
이유를 묻는 건 나중에라도 가능하다.
하지만 지금 일은 오로지 지금만 할 수 있다.
빠득!
이를 악물었다.
얼마나 세게 물었던지 이가 갈릴 정도였다.
* * *
회담장으로 가는 내내.
12족장들의 대화는 아주 시끄럽기 짝이 없었다.
“흐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할양을 주장하지?”
“어디긴 어디야! 윈즈 변경주는 그냥 깔아두고, 제국 동부 전체를 달라고 그래야지!”
“그럼 우리 차이나이푸 족은 카타란 영지인가? 거길 요구하지.”
“우린 찰스 백작령.”
“히히히히. 그럼 우린 보드란 자작령. 거기 선대 가주가 우리와 은원이 있어서 말이지. 가주는 물론, 가솔이며 영지민들의 목까지 전부 장대에다 걸어야겠어.”
“난 휴프 남작령으로 가는 길목을 요구하지. 알다시피 목장을 일궈야 할 것 같은데, 거기가 분지가 넓어서 초원으로 삼기 딱 좋더군.”
“음? 휴프 남작령은 자유도시가 있을 텐데. 거기 있는 놈들 전부 쳐죽이기라도 하려고?”
“자고로 도시란 제국이 발명한 것 중에서 가장 쓸데없는 것이지. 사람 많고, 건물 많고. 초목이 자랄 곳이 없어. 우둔한 놈들. 그런 귀한 땅을 고작 그따위로 쓰다니….”
족장들은 이미 그들이 제국을 전부 점령하기라도 한 듯한 오만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이 지난 며칠 동안 이뤄낸 성과가 아주 경이로운 지경이었던 것이다.
제국이 자랑하는 토벌군을 거의 궤멸시켰을 뿐만 아니라, 동부를 단숨에 가로지르면서 파죽지세로 성들을 여럿이나 연달아 격파했으니까.
성을 쌓고 밖으로 나갈 줄 모르는 제국은 허약하다.
반면에 길을 내고, 산을 터전으로 삼은 자신들은 강하다.
그것이 12족장들의 머릿속에 담긴 공통된 생각이었다.
지난날 동안 자신들이 터전을 벗어나지 못한 건, 그저 어디까지나 적사자라는 특별한 방벽에 가로막혀서 그런 것일 뿐.
하지만.
그 방벽이 해제되고, 자신들과 손을 잡으면서 길잡이가 된 이상, 그들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 터였다.
그리고 그러면 그럴수록.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는 바투의 두 눈은 싸늘하게 가라앉을 뿐이었다.
“자네는 어딜 가져갈 생각이지, 보르푸르 족장?”
그때, 누군가가 던진 질문에 모든 족장이 대화를 멈추고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나 같이 음험하기 짝이 없는 시선.
현재 족장들에게 가장 경계를 받는 존재가 있다면, 바로 바투였다.
그는 젊고 용맹하다. 그리고 강하며 호탕하다.
혈기가 한창 들끓는 젊은 전사들이 추종하기엔 딱 제격인 영웅상인 것이다.
그 때문에 늙은 족장들은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의 부족원들도 흔들리는 걸 몸소 느낄 정도였으니까. 행여 바투에게 권력을 빼앗기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운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만약 여기다 그가 커다란 영토까지 주장한다면?
바투의 활약이 가장 크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거부할 명분도 없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막아야 하리라.
보르푸르 족이 지금보다 더 커지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으니까.
‘우습군.’
바투로서는 추하기만 한 늙은이들의 속내가 빤히 보였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나와 우리 보르푸르 족은 어디까지나 옛 조상들이 겪어야만 했던 치욕과 불명예를 갚아주러 온 것일 뿐. 제국의 땅 따윈 아무런 관심도 없소. 그저 지금 있는 땅으로도 족하고, 만약 전쟁 후에 이주라도 할 생각이면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오.”
바투는 족장들의 눈빛이 달라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몇몇은 조소를 흘리기까지 했다.
그가 너무 젊은 나머지 현실도 모르고 영웅심에 심취했다고 느끼는 것일 테지.
‘마음대로 생각해라.’
바투는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렇게 웃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을 테니.’
그사이.
족장들은 드디어 약속 장소인 회담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안전을 위해 적사자군과 부족 연맹군, 두 군영 사이에 마련된 막사였다.
“아무 이상 없습니다. 들어가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래도 혹시 있을지 모를 암습에 대비해 부족 전사들이 거듭 안전 확인을 실시했고, 아무 이상이 없자 12족장들이 일제히 거들먹거리며 막사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이미 먼저 도착한 선객들이 있었다.
적사자 안드레 윈즈.
‘유령’, 나무탈의 네임리스.
그리고.
고혹적인 미소를 흘리고 있는 쌍둥이 마족, 라피스와 라줄리.
순간, 바투를 제외한 족장들은 모두 흠칫 바짝 움츠러들고 말았다.
막사 안에 깔린 공기가 너무 무거운 나머지 숨이 턱 하고 막혀왔던 것이다.
아무리 그들이 무기를 손에서 놓은 지 오래되었다지만, 그래도 명색이 산악지대에서 손에 꼽히던 전사들이었건만.
저들 네 사람이 내뿜는 기질은 이미 자신들을 완전히 압도하고 있었다.
‘안드레…!’
‘적사자가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였나?’
‘나무탈을 쓰고 있는 괘씸한 놈은 감사자의 머리통을 잘라버렸다던 그놈일 테고.’
‘마족 측 인사들은… 아름답군. 얼마 전에 맞았던 첩도 저 정도는 아닐 텐데.’
‘하지만 그만큼 강한 독과 뾰족한 가시를 품고 있는 독초로다.’
족장들은 머릿속에서 빠르게 주판을 두들겼다.
그리고 여기서 뻗대서는 안 되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병력의 수는 이쪽이 많을지 몰라도, 당장 이 자리에서 일이 벌어진다면 자신들만 죽은 목숨이었다.
“어서 오시오. 다들 먼 길을 오느라 고생이 많으시었소.”
적사자 안드레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차분하면서도 기품이 섞인 목소리.
기사라기보다는 학자에 가까울 것 같은 인상이었다.
그 때문에 여태 안드레와 충돌만 벌였을 뿐이지, 실제로 이렇게 대면한 것은 처음인 족장들은 속으로 적잖게 놀란 상태였다.
족장들은 서로 눈치를 주고받다가, 곧 각자에게 지정된 자리에 앉았다.
“흠! 흠흠! 고생이 많긴 했지.”
“암. 제국 놈들을 분쇄하는 게 어디 쉽긴 하던가.”
“그렇지.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렸는데 어찌 어렵지 않겠나.”
당연한 말이지만, 안드레와 족장들 사이에는 대화가 전혀 통하지 않았다.
하지만 때로는 말의 내용보다 얼굴에 떠오른 표정과 행동으로 그 의미가 더 쉽게 전달되는 법이다.
네임리스는 안드레를 가만히 응시했다. 무미건조한 눈빛이었지만, 뜻은 아주 간단했다.
‘전부 죽일까?’
안드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아직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네임리스는 팔짱을 끼면서 저들이 하는 꼴을 가만히 지켜봤다.
“모두 알겠지만, 이 자리를 주선하게 된 것은 전략적 동맹을 재확인하고자 하는 것이오. 지난 은원은 모두 접어두고, 제국의 야망을 분쇄할 때까지 힘을 합치자는 것에 대해 긴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이 드오….”
안드레가 말을 이어나갈 때마다 옆에 서 있던 통역관이 통역을 해주었다.
그럴 때마다 족장들의 눈이 수시로 번들거렸다.
안드레는 그들의 용맹과 의기를 한껏 띄워줄 뿐만 아니라, 전공의 대부분을 그들에게로 돌리고 있었다. 여태 산악민족들을 괴롭히던 적사자가 맞나 싶을 정도로, 자신을 깎아내리며 그들에게 바짝 자세를 숙이는 듯한 뉘앙스까지 풍겼다.
족장들도 처음에는 무슨 꿍꿍이가 있나 싶었지만.
시종들이 술을 가져오고 맛있는 음식을 나르면서 딱딱했던 분위기는 조금씩 해이해지기 시작했다.
“만약 그대들이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이 자리에 나는 있지도 못했을 것이오. 아마 머리가 잘린 채 황도의 성벽에 내걸려 백성들에게 비웃음거리나 되었겠지.”
족장들은 맞는 소리라며 맞장구를 쳐댔다.
확실히 그들이 알기로도 안드레는 그동안 위기에 내몰린 상태였으니까. 그대로 내버려 뒀다면 얼마 가지 않아 토벌되었을 운명이었다.
그렇기에 족장들은 자신들이 적사자를 살려준 은인이자 위대한 전사라고 착각하기 시작했다.
적사자군을 어느덧 아래로 여기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들이 마음껏 부릴 수 있는 하인. 혹은 하라는 대로 움직여야만 하는 개쯤으로.
“호호호. 이분들이 적사자께서 말씀하셨던 그 영웅분들이시군요.”
거기다 처음에 마족이라는 이유로 거리감을 두려 했던 라피스와 라줄리가 다가오자, 분위기는 서서히 열락에 젖었다.
“파하하! 그럼! 우리가 영웅이지, 영웅이고 말고! 그리고 앞으로 제국을 병탄할 정복자이기도 하니라!”
“어쩜. 처음 봤을 때부터 대단해 보이시더라니. 이 탄탄한 가슴 근육 좀 봐.”
“내 옆자리는 항상 비어 있노라.”
“어머. 혹시 대시인가요?”
“위대한 정복자 옆에는 항상 아름다운 여인이 앉아있으니.”
“그것 참….”
라피스는 어느새 당연하다는 듯이 자신의 허리와 둔부를 매만지던 족장의 얼굴을 어루만지면서 입술을 달싹였다.
“꼴불견이네요.”
우드득!
파카이 족장의 머리통이 뒤로 돌아갔다. 자신이 어떻게 죽었는지 전혀 모르는 얼굴을 한 채.
다른 족장들은 그걸 전혀 눈치채지도 못한 얼굴이었다.
술에 섞인 마비독과 열락이 주는 자극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콰득!
콰득!
“자네 많이 취했나, 왜 그렇게 머리를 떨어뜨리는…?”
퍽!
족장들의 머리가 차례대로 돌아갔다.
몇몇은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질 못하나 싶다가, 곧 시야가 뱅그르르 돌아가는 느낌을 받으면서 고개를 떨어뜨려야만 했다.
그나마 당하지 않은 자들은 뒤늦게야 깨닫고 말았다.
이곳이 함정이라는 것을.
“사, 살려줘!”
“비켜…!”
우당탕탕. 두어 명이 의자를 뒤로 밀치면서 막사 밖으로 뛰어나가려 했다. 하지만 그들은 몇 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취기 때문에 다리에 힘이 풀린 것이다.
최측근인 수행원들이 재빨리 다가와 그들을 부축해줬지만, 곧 헛바람을 들이켜야만 했다. 퍽 하는 소리가 울렸다. 단검이 왼쪽 가슴에 틀어박혀 있었다.
“네, 네가 어째서…?”
“부족의 운명을 위해서 내린 결단입니다, 족장. 이만 모든 것을 바투 님께 넘기고 은퇴하시지요.”
“안 돼…!”
바투를 제외한 족장들은 모두 그렇게 죽었다.
수행원들도 곧 막사로 들이닥친 병사들이 휘두른 철퇴에 머리가 죄다 깨졌다. 비명과 절규가 막사를 뒤흔들고, 주변이 온통 으깨진 핏덩이와 살점으로 가득 찼다.
그때까지.
바투는 제자리에서 전혀 일어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자신의 앞에 놓인 스테이크를 손으로 뜯어먹고 있을 뿐이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