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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184화 (183/405)

184화

패전 혹은 승전

‘그러고 보니 요 며칠 동안 계속 말이 없으셨지.’

엘릭은 이전의 전투가 있고 난 뒤, 별말이 없던 세일러를 떠올렸다.

어쩌면 지금부터 그가 할 말이 그 이유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고견을 들려주십시오.”

“고견이라고 할 것까진 없네만… 혹 내가 얼마 전까지 대륙을 좁다 하며 주유하고 다녔다는 것, 알고 있나?”

“예. 그 때문에 대부라고도 불리신다 들었습니다.”

“대부라…. 그런 낯간지러운 말 좀 하지 말라고 누누이 말했는데. 흐.”

아무리 들어도 암흑가의 보스 같은 느낌이란 말이지. 세일러는 그런 말을 덧붙이면서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하여간 그럴 때 내가 인연을 맺은 이들이 있다네.”

엘릭은 눈을 반짝였다.

“보르푸르 족이십니까?”

“역시 눈치 하나는 빠르군그려. 맞네. 보르푸르 족뿐만 아니라, 동부 산악지대에 거의 5년을 넘게 살았었지.”

이곳에 억류되어 있던 인질들과 대화를 나누던 세일러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바로 이곳에서… 날 ‘아버지’라고 불렀던 아이를 만났다네.”

엘릭의 눈이 커졌다.

헤르만도 처음 들어본 말이었는지 적잖게 놀란 눈치였다.

“그것이 참말이오?”

“그렇다네.”

“하면 그런 걸 왜 여태 말해주지도 않고…!”

“어디 그동안 그런 말을 꺼낼 여유나 있었겠나?”

“….”

“그리고 사실 자네의 눈을 그렇게 만든 놈… 바투라는 놈도 사실 내가 알고 있는 놈이야.”

이번에는 헤르만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검을 가르쳤소?”

“그걸 내가 가르쳤다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군. 원체 재능이 뛰어났던 놈이라. 내가 손을 대지 않았어도 언젠가 대성했을 놈이야.”

“그래도 지름길을 알려줄 수는 있었겠지. 어쩐지. 검술이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더라니.”

헤르만은 손으로 다친 눈가를 매만졌다. 이사벨의 안타까운 시선이 아버지를 향했다.

하지만 차분하게 가라앉은 다른 눈에서는… 열의가 피어나고 있었다.

입마증이라는 시련을 극복하고 다시 일어섰던 그가 아닌가.

이번에도 헤르만은 자신이 넘어설 시련을 만났을 뿐이라고 여겼다.

애당초 황금사자라는 거대한 벽을 만났을 때부터, 줄곧 그의 시선은 항상 먼 곳에 닿아있었다.

차라리 바투를 만난 게 다행일지도 몰랐다.

그를 꺾을 수 있다면, 그만큼 황금사자에 한 걸음 더 성큼 다가섰다는 뜻일 테니까.

“그놈은 미처 나를 보지 못했던 것 같네만. 하여간 그런 상황인데 이런 말을 꺼낼 수 있을 리가 만무하지.”

하지만 세일러로서는 그것이 못내 미안할 뿐이었다.

헤르만과 바투.

두 사람 모두 그가 자식처럼 아끼던 아이들이자 후배였으니까.

그러나 헤르만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눈치였다.

오히려 열의는 전의(戰意)로 변했다가, 다시 호승심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의 이름. 무엇이오?”

“바투라네.”

“그건 이미 알고 있소. 내가 묻는 건 그의 본명이오.”

야만족은 흔히 이름에 영혼이 담긴다고 믿는다. 헤르만은 그걸 알고 물은 것이다.

“바투 투르판. 황소처럼 강하고 질긴 사내란 뜻이지.”

“바투 투르판…. 좋소. 그 이름, 똑똑히 기억해두겠소.”

헤르만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맺혔다.

사자의 웃음이었다.

사자와 황소. 두 존재가 격돌하려는 것이다.

“어쩌면 다시 만날 수도 있겠군.”

“아니. 그건 당분간 힘들걸세.”

“음?”

그게 무슨 말이냐는 질문에 세일러의 시선은 다시 엘릭에게로 향했다.

“나를 알아보았던 아이가 말하더군. 바투는 보르푸르 족의 대족장이 되었고, 이쪽 일이 끝나면 즉시 제국으로 향할 예정이라고. 우리와의 싸움은 일종의 개전 의식 같은 거였다고 말이야.”

엘릭은 그제야 세일러의 말뜻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만한 거물이 빠졌으니, 완전히 투항하지 않고도 충분히 의탁할 수 있단 말씀이십니까?”

“옛 인연을 들먹인다면 손님으로 맞아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저희는 그들과 이미 한 차례 칼부림을 겪었던 사이입니다. 가능하겠습니까?”

“가능하게 만들어봐야지.”

“흠….”

“그리고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게 있다네. 흔히 야만족이라 불리는 산악 민족들의 인원 구성은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복잡해. 보르푸르 족이라고 해서 전부 다 같다는 동질감이나 소속감을 느끼는 건 아닌 셈이지.”

“그들 사이에서도 혈족 구성이 복잡하단 말씀이시군요.”

“바투가 걸린다면, 꼭 바투한테 의탁하지 않아도 된단 뜻일세. 보르푸르 족 내에서도 그들과 사이가 좋지 않은 이들도 있고, 싸움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다른 일족도 있으니까.”

이렇게까지 말이 나온 이상,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이미 결정이 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장 제국으로 돌아가지는 못한다. 모든 길목이 막혔고, 사방이 온통 적사자군과 야만족의 영역이었다. 자칫 적들의 시선을 사서 궤멸할 우려가 있었다.

그렇다면 오히려 적진의 내지로 더 깊숙하게 들어가서 몸을 숨기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등하불명(燈下不明). 원래 등잔 밑이 제일 어두운 법이니.

더군다나.

사실 그동안 엘릭은 일행들에게 말하지 않은 게 있었지만, 그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네레스타가 아직 있어.’

네레스타 가와 메르빙거 간에는 가문협약이 체결되어 있었다.

한쪽이 위기에 처한다면 자동으로 다른 가문이 그들을 도와주어야만 한다.

설사 그게 아니더라도, 션과 오거스틴이 있는 한 어떻게든 자신을 구하려 들 것이다.

그리고 네레스타 가의 전력이라면… 그들쯤은 충분히 구해주고도 남을 것이다.

그러니 엘릭이 해야 할 일은 우선 별의 종군의 안전을 확보하고, 그다음에는 네레스타 가와의 연락망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그럼 우선 저쪽으로 의사부터 타진해보도록 하죠.”

* * *

“우리를 아예 통째로 반란군에게 제물로 갖다 바치려 하는군.”

“계속 이렇게 보고 있을 수만은 없을 텐데?”

캘리거 백작과 쿠란시빌 자작은 회의장을 빠져나오는 내내 굳은 인상이 풀리지 않았다.

그만큼 그들이 나눈 대화는 하나 같이 충격적인 것들뿐이었다.

야만족에게 의탁한다?

제국의 자랑스러운 전통 귀족으로서 이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전장에서 죽었으면 죽었지, 문명의 혜택과는 한참 동떨어진 채로 짐승이나 다를 바가 없는 생활을 영위하는 저들에게 고개를 숙인다는 건 수치였다.

엘릭으로서는 자신에게 목숨을 건 병사들을 한 명이라도 살리기 위해 내린 결정이었지만.

애당초 평민들의 목숨 따윈 귀족의 품위와 체면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고를 지닌 두 사람에게는 절대 이해 못 할 결정이었다.

오히려 그들의 눈에 엘릭은 위기에 처한다 싶으니 냅다 반란군 쪽으로 전향하는 기회주의자로만 비칠 뿐이었으니.

현재 그들의 눈에 엘릭은 반란군, 그리고 자신들은 그런 반란군을 처단하려는 만고의 충신으로 비쳤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럴듯하게 둘러대기 위한 명분일 뿐.

사실 캘리거 백작과 쿠란시빌 자작, 두 사람 모두 이미 겉으로 말하지는 않고 있어도, 이번 회의를 통해 엘릭에 대한 위기감과 경계심을 극도로 키운 상태였다.

자신들의 의견 따윈 가볍게 묵살하며 좌중을 휘어잡던 능력.

우스던 메르빙거의 젊은 시절을 떠올리게 하던 호기(豪氣).

그 모든 것들이 마치 생선 가시를 삼킨 것처럼 목에 걸리기만 했다.

애당초 엘릭을 노릴 생각이긴 했지만, 그럴 시기를 좀 더 빨리 당겨야만 할 것 같았다.

캘리거 백작과 쿠란시빌 자작은 잠시간 서로의 시선을 마주쳤다.

“….”

“….”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않았지만, 의사 교환은 그걸로도 충분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원수지간으로 지내던 그들이건만.

설마 이렇게 깊게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는 깊은 침묵만이 흐르다 곧 흩어져 사라졌다.

* * *

야만족.

제국이 그리 부르는 동부 변경의 산악 민족은 사실 그 속을 들여다보면 수많은 혈족과 일족, 부족과 계파로 구성되어 있어 아주 복잡했다.

그네들 사이에서도 은원 관계가 워낙에 복잡하여 수천 년의 역사 동안 단 한 번도 정치적 통합이 이뤄지질 못했으니.

적사자군과 손을 잡아 제국 본토로 진격하는 현재도 ‘제국 타도’라는 공통된 기치 아래 뭉친 느슨한 정치적 연대에 불과할 뿐.

만약 이해관계가 틀어진다면 얼마든지 연합이 결렬될 위험이 내포되어 있었다.

하지만.

설사 그렇게 된다고 해도, 보르푸르 족은 절대 그런 걸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결렬? 그럼 뭐 어떠한가! 오히려 그게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가질 양식과 땅을 다른 부족에게 내어주지 않아도 될 테니까!”

“우리에게는 위대한 대족장이 계시지 않은가!”

“하늘이 내리신 대전사, 바투!”

“바투!”

“곧 왕이 되시고, 황제가 되실 바투 님만 있으시다면 우리는 무엇이든지 해낼 수 있다!”

“바투 님을 따르라!”

“따르라!”

야만족은 크게 12개의 부족으로 구분된다.

하지만 그런 ‘부족’이라는 개념도 편의를 위해 지은 것일 뿐. 혈족과 씨족이라는 개념보다 구성원들을 촘촘하게 엮지는 못했다.

그러나.

보르푸르 족은 달랐다.

바투라는 걸출한 영도자 아래 하나로 뭉쳤고, 혈족과 씨족의 구분을 없앴다.

출신과 신분을 따지지 않았다. 그저 ‘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능력만 보인다면 기회를 주어 바투의 옆에 설 영예를 얻었다.

그렇기에 보르푸르 족은 다른 부족들과는 달리, 뛰어난 단합력과 조직력을 바탕으로 세력을 빠르게 키워나갈 수 있었다.

이번 ‘연맹’ 내에서도 가장 큰 지분을 가진 이들은 보르푸르 족이었다.

군신(軍神).

현재 바투는 동족뿐만 아니라, 산악 민족들 사이에서 온통 그렇게 불리고 있었다.

“멍청한 놈들.”

바투는 향후 일정을 논의하자는 적사자군 측의 제안에 회동을 갖기 위해 이동하는 중이었다.

그가 멍청하다며 조롱을 던지는 대상은 적사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적사자를 아주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동족과 민족들에게 피눈물을 흘리게 만든 자. 넘을 수 없는 장벽이 되어 염원을 꺾게 만든 원수.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바투는 적사자와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높이 우뚝 서려는 자는 당연히 주변의 시샘과 질투를 받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바투가 경멸하는 대상은 바로 그런 시샘과 질투를 던지는 주변인들이었다.

12부족의 여러 족장들 말이다.

하나 같이 늙고 추악한 나머지 그저 어떻게든 자신들의 기득권만 지키려 아등바등하는 식충이들.

그러면서도 이번 전쟁을 통해 어떤 이득을 볼 수 있을까, 머릿속으로 수없이 계산기를 두들기기 바쁜 버러지들.

전사란 무엇이던가?

전쟁이 벌어졌을 때, 누구보다 앞서서 칼을 휘두를 줄 아는 이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족장이란, 그런 전사들을 이끄는 우두머리를 의미했다.

하지만 바투의 눈에 다른 족장들은 그런 전사로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자신들이 가진 것을 행여 바투에게 빼앗길까 봐 전전긍긍하고, 노골적으로 경계하기 바빴으니.

그 때문에 머리를 맞대서 향후 일정을 논의하기도 바쁜 마당에, 불신과 경계 때문에 아무 소득도 없이 삐거덕대기 바빴다.

‘이대로는 안 된다. 이래서는 얼마 못 가.’

당장은 제국군을 크게 격파하고 빠른 속도로 제국 본토로 진격하고 있다지만, 한 번 그 진격이 막혀버린다면 지리멸렬할 게 분명했다.

어린 시절, 세일러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던 바투였기에, 그는 제국이 얼마나 강한 잠재력을 품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얼마 가지 않아 자신들의 진격은 가로막히게 될 것이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수순이었다.

그렇다면 그때 지리멸렬하지 않고, 슬기롭게 위기를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뒤집어버려야지, 전부. 해충은 박멸하고, 기생충은 모조리 제거해야만 한다.’

이미 바투는 그걸 위한 준비 작업도 모두 마친 상태였다.

이번 회동도 마찬가지.

다른 부족장들은 그저 전후 협상을 위해 가지는 자리라고 생각하며 희희낙락하고 있지만.

실은 그보다 훨씬 더 큰 무언가가 숨겨져 있었다.

적사자와도 이미 모든 조율이 끝난 상태.

그렇기에 당장이라도 칼을 뽑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삭히면서 ‘때’만을 기다리던 중이었는데.

“뭐? 그 자리에 세일러 님이 계셨다고?”

바투는 부관이 올린 보고에 인상을 딱딱하게 굳히면서 고개를 그쪽으로 돌렸다.

“예. 사르나이 님이 세일러 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목격한 자가 있습니다.”

사르나이.

그녀는 바투의 단 하나뿐인 형제이자, 친구이며, 동료였고, 어머니이기도 했던, 그리고 지금은 반려자인 단짝이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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