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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183화 (182/405)

183화

패전 혹은 승전

“하늘이시여, 어찌 제게 이런 시련을…!”

제라이츠 황태자는 하늘을 보면서 길게 탄식을 내뱉었다.

반드시 승리할 줄로만 알았던 전투였건만.

아니, 실제로도 그들이 거의 승기를 거머쥐고 있었다.

하지만 전혀 생각지도 못한 적군 측 증원군의 등장은 모든 판세를 뒤집어버리고 말았으니….

그가 소집한 10만 명의 토벌군 중 현재 남은 인원은 대략 3만.

단 한 번의 전투로 7할이 날아가 버린 셈이었다.

대패(大敗)였다.

“전하, 갈 길이 멉니다. 어서 발걸음을 서두르시지요.”

제라이츠 황태자는 뒤에서 들리는 무미건조한 목소리에 고개를 그쪽으로 홱 돌렸다.

네레스타의 가주, 가이가 무심한 눈길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일말의 예의는 갖추고 있지만, 그것이 전부인 사내.

시선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황태자에 대한 존경심도, 그렇다고 대패를 겪은 패장에게 보일 법한 조소조차도 없었다.

그저 길가에 흔히 굴러다니는 돌멩이라도 보는 것 같았다.

울컥!

제라이츠 황태자는 순간 속에서 무언가가 치밀어오르는 게 있었다.

‘메르빙거와 관련된 작자들은 어찌 하나같이 이 모양이란 말인가…!’

토벌군이 싸운 건 적사자군만이 아니었다.

토벌군 따위는 ‘한 줌’으로 전락시킬 만큼 엄청난 머릿수를 자랑하던 야만족의 증원군에 있었다.

20만?

아니, 30만?

어쩌면 50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대체 그리 넓지도 않은 동부 변경 지대에 어떻게 그리 많은 병력이 출몰할 수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애초에 그동안 원수지간으로 알려졌던 야만족이 어째서 적사자군의 편을 들어줬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거나 적사자군과 손을 잡은 야만족의 병력은 압도적인 머릿수로 밀물처럼 단숨에 토벌군을 밀어버렸다.

어디 그뿐이랴?

야만족의 가장 무서운 점은 그 대군이 단순히 ‘머릿수’를 채운 정도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들 개개인이 한평생 험한 산자락을 누비고 다니면서 단련된 뛰어난 전사라는 점이었으니.

병사의 질적 측면에서도 한참이나 뒤떨어졌다.

거기다 전열 곳곳에서 마족들이 나타나 한껏 난리를 피우고, 혼란을 틈타 암살자들이 나타나면서 피해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버렸다.

특히 선봉에서 큰 활약을 벌이던 감사자의 머리가 갑자기 떨어졌을 때는 얼마나 기겁했던지!

그것이 북방에서 크롬헬 황자를 노리던 암살자라는 것을 알게 된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거기다 육망성 중 하나가 땅으로 떨어졌을 때는 그야말로 사기가 완전히 바닥에 곤두박질쳐 버리고 말았다.

더 이상 승산이 없다고 여긴 것이다.

달아나는 것도 그리 여의치 않았다.

사방이 온통 적군으로 에워싸여 있었으니.

바로 그런 절망의 순간에 나타난 것이 바로 네레스타 가문이었다.

다른 가문에 비해 황도에서 출발이 한참 늦었던 그들이 대본영에 합류하려, 때마침 근방을 지나고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제라이츠 황태자는 제 안전을 구할 수 있었으니.

이런 점들을 감안한다면, 가이는 황태자에게 있어 목숨의 은인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제라이츠 황태자는 알고 있었다.

만약 가이가 그때 마음만 먹었다면, 전황을 재역전시켰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거기서 제대로 참전하기만 했었어도…!’

가이가 데려온 네레스타 가의 전력에는 단순히 가병(家兵)만 있는 게 아니었다.

감찰국에서도 ‘예측불허’ 혹은 ‘복마전’이라고 평가한 원로원과 빈객청도 대거 이끌고 온 상태.

마탑의 웬만한 중진들 따윈 하수로 여긴다는 괴물들이 나섰더라면, 자신을 한껏 유린했던 적사자는 물론, 감사자들을 죽인 의문의 암살자며 야만족의 족장들까지 대거 쓸어버렸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가이는 절대 그러지 않았다.

제라이츠 황태자의 신병 확보만 신경 썼고, 목표를 완수하자 아무 미련 없이 후퇴해 버린 것이다.

철저하게 실리만 챙기겠다는 속셈.

이번 전쟁을 통해 어떻게든 정치적 입지를 높여보려던 제라이츠 황태자로서는 울분이 치솟을 수밖에 없는 결정이었다.

하지만.

제라이츠 황태자는 여기에 대해 절대 항의할 수가 없었다.

현재 병력의 지휘권은 모두 자신의 손을 떠나 가이가 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만약 여기서 가이가 참전을 거부하고 영지로 되돌아가겠다고 해버린다면 큰일이었다.

하물며 적사자군과 50만 대군에 이른 야만족들이 제국 영토로 곧 진격할 것을 감안한다면… 바짓가랑이를 붙잡아서라도 가이를 붙들어 둬야만 했다.

자칫했다가는 괜히 잘못 건드려서 제국에 재앙을 불러들였다며 그나마 있던 자신의 자리마저 날아갈 우려도 있었으니.

어떻게든 적의 진격을 막아야 했다.

‘제기랄, 제기랄…!’

제라이츠 황태자는 주먹을 꽉 쥐면서 부르르 떨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적의 진영 한가운데에다 내팽개치고 온 별의 종군 따윈 전혀 남아있지도 않았다.

* * *

-즉각 귀환하라.

무책임하기만 한 대본영의 명령서가 하달된 뒤.

엘릭은 즉각 주변으로 척후와 정찰을 보내 정확한 상황을 판단하고자 했다.

“차나이푸 족 서진(西進) 확인! 병력수는… 도저히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샨샨 족 남하 확인! 목적지는 제국 영토!”

“적막의 성이 비어있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납치한 포로의 증언에 따르면, 적사자군이 야만족 12명의 족장들과 회동을 가졌다 합니다.”

“현재 적사자군이 제국령을 통과하였습니다.”

“적의 규모는 최소 50만 명 이상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본군의 패퇴가… 맞는 것 같습니다.”

보고 하나하나가 전부 절망적인 것들 투성이었다.

적의 규모는 최소 50만에 다다르며, 후퇴하는 본군을 쫓아 제국 경내로 들어서고 있다는 내용.

특히 제국 본토라고 할 수 있는 동쪽 대장벽의 문이 열렸다는 말이 들렸을 때는… 정말이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저들의 진격 속도가 빨라도 너무 빨랐으니까.

그 때문에 별의 종군은 본군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적의 진영 한가운데에 외딴 섬처럼 표류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으니.

고립무원.

그 단어만큼 어울리는 것도 없었다.

다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적이 이쪽을 공격할 것 같다는 동향은 보고되지 않았다.

아마 진군에 여념이 없는 나머지 이쪽은 전혀 신경 쓰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리라.

클레이모어 사그나드를 죽인 만큼 원한은 클 테지만, 고작 그런 것으로 승세를 거둘 수는 없을 테니.

“….”

“….”

“….”

하지만 어쨌거나 별의 종군이 위험한 상태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적사자군에 있어서 본류에서 떨어져 나간 별의 종군 따윈 손가락만 튕겨도 언제든 치워버릴 수 있는 먼지에 불과할 테니.

저들이 제국에서 이쪽으로 시선을 돌리기 전에, 어떻게든 살길을 도모해야만 했다.

하지만 계획을 짜야만 하는 수뇌부 회의에서도 이렇다 할 계획은 전혀 나오지 않았다.

오로지 깊은 침묵만 흐를 뿐.

그만큼 지난 며칠 사이에 폭풍처럼 휘몰아친 여러 사태가 그들의 머리를 아프게 만들고 있었다.

“일단 명령서에 따르기엔 많이 늦어졌습니다.”

여기에 반박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사사건건 엘릭의 말에 토를 달던 캘리거 백작과 쿠란시빌 자작마저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함부로 움직이기에도 많이 위험합니다. 저들의 시선을 굳이 이쪽으로 돌릴 필요는 없으니까요.”

“좋은 생각이라도 있나?”

헤르만의 시선이 이쪽에 닿았다. 한쪽 눈을 붕대로 감고 있는 그의 모습은 엘릭의 마음을 아프게 했지만, 그의 눈빛은 여전히 강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여기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포지션은 두 개가 있습니다.”

“두 개나?”

“예. 하나는 케트라인 요새로 돌아가서 기회를 노리는 것이고.”

“거긴 위험할 텐데? 외려 적사자를 자극할 우려만 크지 않나.”

“하지만 윈즈 변경주가 자랑하던 최고 요새답게 방어에는 유리하니까요. 농성전을 벌일 거라면 그곳보다 좋은 곳은 없을 겁니다.”

“흠…. 장단점이 있다는 거군. 그럼 다른 하나는?”

헤르만은 턱을 짚으며 잠깐 침음성을 흘렸다.

사실 맞는 말이긴 했다.

당장 그보다 확실한 건 없을 테니.

문제는 농성전을 벌이더라도 얼마나 버틸 수 있냐는 것.

그리고 제국군이 언제 역전을 꾀해서 이쪽을 구해줄 수 있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제라이츠 황태자가 우리에게 가진 악감정을 생각해본다면… 힘들지도 모르지.’

헤르만은 이 가능성을 크게 보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포지션에 기대를 건 것인데.

엘릭이 던진 대답이 너무 충격적이었다.

“적사자에게 투항하는 겁니다.”

“…!”

“…!”

“그게 무슨 소리요!”

“반란군에게 고개를 조아리자니! 야만족에게 무릎을 꿇자니! 그게 제국과 황실에 충성을 바쳐야 하는 귀족으로서 할 수 있는 소리란 말인가!”

가장 먼저 반발한 건, 캘리거 백작과 쿠란시빌 자작이었다.

그들로서는 가뜩이나 상황이 조급해진 마당에 반란군이 되게 생겼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두 사람은 여차하면 엘릭을 제압하고 지휘권까지 가져갈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앉아.”

엘릭은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그들을 응시했다.

이에 뭐라고 재차 반발하려던 캘리거 백작과 쿠란시빌 자작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무슨 눈이…!’

‘그새 더 강해졌다!’

에메랄드처럼 요요히 빛나는 엘릭의 보석안(寶石眼)을 본 순간, 두 사람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을 맛봐야만 했다.

분명히 엘릭은 아무런 마력도 내뿜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기도?

기품?

아니면 존재감?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했다.

지금 이 순간, 엘릭에게서는 함부로 접근할 수 없도록 만드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흘러 나오고 있다는 것.

그것은 문무백관과 대소신료가 모인 의회를 앞에 두고도, 오로지 존재감만으로 모든 것을 압도하던 황제의 모습과도 많이 닮아있었다.

그리고.

캘리거 백작과 쿠란시빌 자작은 아주 오래전에 메르빙거에서도 그와 비슷한 모습을 본 적이 있었으니.

우스던 메르빙거.

언제나 자신들을 자괴감과 열등감으로 몰아넣던 옛 가주의 모습이 엘릭과 겹쳐져 있었다!

“앉으라는 말, 안 들리나? 캘리거, 쿠란시빌. 두 번씩 경고하고 싶지는 않은데.”

깨끗한 녹안 위로 잔뜩 표정이 굳어진 캘리거 백작과 쿠란시빌 자작의 모습이 거울처럼 비쳤다.

결국.

털썩!

두 사람은 이를 악물면서 제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엘릭의 카리스마도 카리스마였지만, 군 내 최고수라 할 수 있는 헤르만과 세일러도 그들의 편을 들어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오히려 싸늘하기만 했다.

“전장에서 항명은 곧 즉결 처분이다. 이번은 그냥 넘어가지만, 더 이상은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

엘릭의 싸늘한 경고.

캘리거 백작과 쿠란시빌 자작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기만 할 뿐, 아무런 항변도 하지 못했다.

그저 속으로 메르빙거에 대한 분노만 더욱 활활 불태울 뿐.

그러거나 말거나.

엘릭은 그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주변을 쓱 훑어보면서 말했다.

“저는 괜한 욕심 때문에 병사들을 위험으로 내몰고 싶지 않습니다. 한 명이라도 더 살릴 방법이 있다면 그걸 택할 겁니다.”

헤르만이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엘릭의 그런 태도가 마음에 든 듯,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러니 여러분들의 생각도 듣고 싶습니다. 혹시 다른 의견, 없으십니까?”

다시 적막이 흐르던 바로 그때.

“내게 생각이 하나 있긴 하네만.”

회사자 세일러가 주름진 얼굴로 엘릭을 바라봤다.

그의 상징이나 진배없던 장난기 따윈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진지한 눈빛이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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