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패전 혹은 승전
찰칵.
찰칵.
그림자가 회수될수록.
마력회로 속에서도 더 많은 조각들이 맞춰지는 소리가 들렸다.
더불어 엘릭은 점차 피로해졌던 몸에 서서히 힘이 되돌아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흉살의 인장이 빛나고 있었다. 꽤 많은 양의 마기를 빨아들였기 때문인지 빠른 속도로 성취도가 올라가는 게 보였다.
소화. 유다가 자랑하던 고유 인장을 흡수하게 됨으로써, 이전보다 훨씬 기능이 강화된 것이다.
흡수가 좀 더 빨라졌고 소화력도 강해져 효율이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엘릭이 빠른 속도로 힘을 회복하고, 남은 마족들을 몽땅 쓸어버릴 수 있었던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동계의 인장도 화려하게 빛났고, 원죄의 인장도 간만에 시커먼 빛을 음산하게 뿌려댔다.
『이건 좀… 좋군.』
메피스토는 크게 기뻐했다.
엘릭이 약속대로 광기의 인장을 자신에게 넘겨주었으니까.
언제나 바람 빠진 풍선 같던 사념체에… 힘이 차오르고 있었다.
이전에 그리고리의 마족들을 처치하고서 얻었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또렷하고 강렬한 힘.
아자젤의 열화판일 뿐이라고는 해도, 아자젤의 힘을 직접 보유해서 그런지 꽤 맛났다.
언제까지고 계속 이 느낌을 만끽하고 싶을 정도였다.
『이런 반편이 하나만 해도 이 정도일진대. 다른 제대로 된 그릇을 삼키고 나면 어떻게 될는지. 후후.』
역시 그리고리는 박살을 내는 게 가장 좋을 것 같다. 메피스토는 그런 결론을 내렸다.
그러다 영원히 이어질 것 같던 인장 흡수가 끝난 뒤.
“하아…!”
엘릭은 그림자 흡수를 끝내면서 천천히 눈을 떴다. 길게 내뱉는 숨소리에는 지난날에 다 내뱉지 못했던 탁기 중 일부가 섞여 있었다.
그의 두 녹안이 형형하게 빛났다.
광기와 소화, 유다의 인장은 모두 약속대로 메피스토와 휼에게 넘겼어도, 나머지 인장과 마기들은 그가 정제하여 마력회로 속에 담아둔 상태.
덕분에 마정석도 더 많은 마력을 풀어내어 몸에 다시 힘이 실렸다.
『흡족한 눈치로군.』
“그만큼 성취가 있었으니까요. 메피는요? 몸은 좀 어때요?”
『본 왕 역시 흡족하니라.』
엘릭은 메피스토를 위아래로 살짝 훑어보았다.
“별로 달라진 건 없어 보이는데? 이거 괜히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아닙니까?”
『흥. 메마른 대양 한가운데에다 강물을 조금 뿌려본다 한들, 그게 어디 티나 나겠느냐?』
당연히 이걸로는 부족해도 한참 부족하지. 메피스토는 그런 뒷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메피스토의 한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꽤 많이 달라졌느니라.』
메피스토는 허공에다 손을 뻗었다.
그러자 때마침 불어오던 바람이 그의 손끝에 걸렸다.
휘휘휘!
바람이 방향을 꺾으면서 한데 뭉쳐지고, 이내 자그마한 소용돌이를 그렸다.
바람에 실린 나뭇잎 하나가 큰 원을 그리면서 마구 춤을 추다가 곧 허공으로 치솟아 사라졌다.
엘릭의 눈이 살짝 커졌다.
흑마술(黑魔術).
메피스토가 직접 마법을 부리고 있었다.
『일개 초급 수련생들이 마력을 처음 다룰 때나 하는 미숙한 짓에 불과하지만, 이것만 해도 지금의 본 왕에게는 아주 큰 것이니라.』
엘릭은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메피스토는 여태 어떤 물리적인 간섭도 할 수 없던 상태.
그런데 이제 조금씩 마력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그건 지난 제약이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물꼬를 한 번 트기가 어려울 뿐이지, 일단 한번 트는 데 성공하고 나면 그때부터는 물길을 만들기가 아주 쉬운 법이니까.
메피스토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마력에 손댈 수 있게 되었으니 어떻게든 회복을 위한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대마왕에게는 그만한 힘이 있었다.
『물론, 이런다고 해서 직접적인 위해를 끼치거나 하는 것은 여전히 불가능하다만. 그렇다고 해도 이 역시 얼마 남지 않았을 테지.』
앞으로 그리고리와의 충돌이 계속 벌어질 것을 감안한다면, 메피스토의 회복 속도도 그만큼 빨라질 것이다.
“이제야 겨우 식충이 생활을 끝낼 수 있겠네요?”
한껏 놀리는 말투.
예전 같았으면 여기에 노발대발했을 메피스토였지만, 지금은 한결 여유로워서 그런지 쉽게 맞받아쳤다.
『흥. 고작 그 정도로만 끝날까?』
메피스토의 비웃음이 한층 더 또렷해졌다.
『그동안 네놈이 깔보기만 하던 본 왕이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를 절실히 깨닫게 해줄 테니 각오하도록 해라.』
파하하핫! 메피스토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 * *
엘릭은 뒷정리가 끝나자마자 곧장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한창 전투가 벌어지는 별의 종군 쪽이 아니었다.
그보다 떨어진 기습대의 후방, 야만족의 본진이었다.
일찍 끝날 줄 알았던 전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길어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그렇다면 피해가 더 커지기 전에 끊어놓을 생각이었다.
다행히 녀석들의 첫 번째 목표는 어디까지나 인질 구출에 있었으니.
만약 자신들이 상정했던 것보다 피해가 훨씬 크다면 물러날 수밖에 없을 거라고 예상했다.
“【휘몰아쳐라】.”
콰콰쾅!
쿠르르-
엘릭은 이전보다 한껏 예민해진 아귀감을 바탕으로, 야만족들의 부대가 있는 곳을 일일이 들쑤시면서 눈보라를 연거푸 뿌려댔다.
각개격파를 시도하는 만큼, 저들의 피해도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밖에 없을 터.
결국 산자락이 새하얀 설원으로 뒤덮이는 가운데.
피해 소식은 시시각각 기습대에게도 들렸다.
“뭐? 후방에서 다른 제국군이 나타나?”
한창 헤르만과 충돌하던 보르푸르의 족장, 바투는 부관이 다급하게 달려와서 올린 보고에 인상을 팍 찡그려야만 했다.
“그, 그렇습니다! 본진이 털린 것은 물론, 작전을 위해 우회를 시도하던 카나카 부대도 당한 채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비열한 제국 놈들! 그새 다시 함정을 파고 있었구나!”
“어떻게든 결정을 내리셔야 합니다!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보르푸르 족으로서는 설마 한 사람이 그들의 부대를 일일이 격파하고 있단 생각은 추호도 못 하고 있었다.
마법과 거리가 먼 그들의 상식에서 개인이 발휘할 수 있는 기량에는 한계가 있었으니까.
제아무리 뛰어난 전사라고 하더라도, 산자락에 넓게 퍼진 부대를 전부 일일이 잡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자신들이 미처 파악하지 못한 다른 제국군이 나타난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보르푸르 족으로서는 자신들이 거의 다 잡은 승기를 놓쳤다고 생각하니 열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엘릭이 또 무슨 일을 친 모양이로군.’
바투와 부관의 대화를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헤르만은 눈치껏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눈치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여기서도 똑같이 받아쳐야겠지. 여전히 왼쪽 눈에서 통증이 올라왔지만,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소리쳤다.
“너희들도 이제 똑같이 이 반란군과 같은 곳에 묻히게 되겠군. 뭐 하는 거냐? 아직 싸움이 덜 끝났을 텐데. 혹시 두렵기라도 하나?”
헤르만의 목소리에는 호기가 가득했다.
마치 피 끓는 젊은 시절로 되돌아간 듯, 혈기마저 느껴졌다.
바투는 전사로서 자긍심을 건드리는 말에 인상을 무참하게 구겼지만.
“족장님!”
부관의 애절한 간청에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그는 최상급 전사이기 이전에 일족의 안전과 번영을 책임지는 족장.
위험하다고 판단된다면 물러나는 용기도 가져야만 했다.
“…퇴각한다.”
“알겠습니다!”
부관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면서 목에 걸려 있던 뿔피리를 입에 가져다 댔다.
뿌우우-
고동소리가 넓게 퍼졌다.
한창 전투에 집중하고 있던 야만족 전사들의 시선이 똑같이 한쪽으로 돌아갔다.
곧 잇달아 퇴각을 알리는 뿔피리 소리가 들리자, 보르푸르 족은 나타났을 때처럼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놈들을 쫓지 마라! 경계하는 데만 그쳐라!”
별의 종군은 자칫 분위기에 휩쓸려 병사들이 야만족의 뒤를 쫓을까 봐 전열을 단단히 제어했다.
저것이 또 저들이 역으로 파둔 함정일 수도 있었으니.
하아…!
하아…!
곳곳에서 전투로 지친 병사들의 거친 숨소리만이 울리는 가운데.
“에, 엘릭 님이 돌아오셨다!”
누군가가 외친 목소리에 시선이 전부 허공으로 향했다.
엘릭이 상당히 지친 기색으로 이쪽으로 날아오는 게 보였다. 적군이 갑자기 퇴각한 것이 엘릭의 솜씨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왔나?”
헤르만은 이쪽으로 다가오는 엘릭을 보면서 지친 기색으로 손을 흔들었다.
“후, 후작님. 얼굴이…?”
엘릭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헤르만의 얼굴에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 보이지 않았으니까.
“음? 아, 이거 말인가?”
헤르만은 별 것 아니라는 투로 손사래를 쳤다.
“생각했던 것보다 상대가 꽤 강하더군. 그래서 내주게 되었다네. 그동안 야만족이라고 내심 우습게 봤던 것이 잘못되었지 뭐야?”
“…!”
“그래도 나 역시 녀석의 왼팔 아래를 말끔하게 잘라주었으니, 서로 하나씩 주고받은 셈이지.”
헤르만의 왼쪽 눈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그 위를 가로지르는 짙은 검상(劍傷)이, 그에게 무슨 일이 닥쳤는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제게 보여주십시오.”
“난 괜찮…!”
“제가 괜찮지 않습니다. 어서요!”
엘릭이 이렇게 화를 낸 것을 거의 본 적이 없었건만.
헤르만은 조금 놀란 얼굴이 되었지만, 곧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면서 상처를 엘릭에게 보여주었다.
“지금 웃음이 나오십니까?”
“후후.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는데 나더러 어쩌나?”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엘릭 역시 최근에 무도에 한껏 빠졌기 때문에 검사에게 있어 시야 확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모를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제국 내에서도 황금사자 다음으로 뛰어난 검술 실력을 지녔다는 청사자를 이렇게 만든 작자가 야만족 진영에 있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북방지대에서 암습을 시도했던 나무탈의 사내도 떠올랐기에… 엘릭은 세상이 넓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더 깨달아야만 했다.
* * *
“그, 그 말이 참말인가?”
“뭘?”
“그… 청사자께서 눈을 잃으셨다는…!”
“예끼, 이 사람아! 말조심해! 청사자께서는 다치신 게 아니라, 잠시 피곤하신 것일 뿐이라고!”
청사자 헤르만이 다쳤다는 사실이 군영 내 퍼지자, 적잖은 소란이 있었다.
그만큼 청사자를 몰아붙일 수 있는 초고수가 야만족에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저들이 또 언제 기습을 시도해올지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버지는 건재하시니 다들 신경 쓰지 마세요. 그보다 다음 지역으로 이동해야 하는데, 다들 괜찮으시겠어요?”
정작 이사벨이 나서서 아무렇지 않게 병사들을 독려하기 시작하니, 동요도 금세 가라앉았다.
청사자의 혈육도 저렇게 마음을 다잡는데, 자신들이 흔들릴 수는 없다는 여론이 군중에 퍼진 것이다.
“군사께서도 저리 나서시는데 우리가 우왕좌왕할 수는 없지.”
“암, 그렇고말고! 청사자께서 우리를 그동안 많이 구해주셨으니, 이제는 우리가 청사자 님의 눈이 되어드리자고!”
그렇게 별의 종군은 전열을 재정비하면서 다시 행군을 시도했다.
원래대로라면 헤르만의 부상이 다 나을 때까지 대기하면서, 또 있을지 모를 야만족의 기습에 대비해야 했지만.
곧 전면전이 발생하게 될 거라던 대전략의 기한을 맞추기 위해서는 시간이 많이 빠듯했다. 강행군을 해야만 하는 실정이었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진군은 중단되고 말았다.
대본영에서 급파된 전령이 실어온 명령서 때문이었다.
<대본영 패퇴(敗退).>
<감사자 암살, 파펜 가문의 가주 전사(戰死).>
<현재 대본영은 후퇴 중.>
<적사자군, 제국 본토로 진군 중.>
<적사자군과 12 야만족의 연합을 확인. 수십만의 야만족이 남하를 시도 중.>
……
<현 시각 부로, 외부 작전 중인 각 부대는 각자도생을 목표로 각 임지에서 철수할 것.>
<철수를 위한 지원은 불가.>
갑작스러운 패배 소식이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