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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180화 (179/405)

180화

금빛 혜성(彗星)

헤르만과 세일러는 엘릭이 자리를 비웠다는 사실을 알고 적잖게 당혹했다.

그의 성격으로 봐서는 도주를 했다기보단, 적진 한가운데에 혼자 돌진했다는 가설이 더 일리가 있었지만.

그래도 갑자기 이렇게 말도 없이 훌쩍 가버리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다 지휘 체계에 혼란이라도 생기면 어쩌려는 것인지.

자고로 아무리 기강과 군율이 바로 잡혀있다 해도, 단 한 가지 돌발 변수에 의해서도 자칫 크게 확 뒤집힐 수도 있는 게 바로 군대였다.

그만큼 별의 종군을 믿고, 헤르만과 세일러를 믿는다는 뜻일 테지만.

‘그래도 이번에 돌아오면 한 번 혼내긴 해야겠군.’

헤르만은 그동안 엘릭의 응석을 너무 많이 받아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후계자로 점찍었다면, 때로 다그칠 때는 다그칠 필요도 있는 법.

물론, 그런 건 어디까지나 이번 위기를 모두 물리치고 난 뒤에나 생각할 일이었다.

‘일단 저 자부터 잡아야겠군.’

헤르만은 검을 잡으면서 조금 전에 파악해뒀던 상급 전사를 주시했다.

그는 여전히 선봉에 서서 아군의 군열을 마구 헤집고 다니면서도, 계속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면서 수하들의 전투 의지를 계속 고양시키고 있었다.

“자네, 몸이 다 나았다지?”

그런 헤르만의 생각을 읽었는지, 세일러가 불쑥 말을 걸어왔다.

그도 천천히 검을 뽑고 있었다.

분명히 일흔 살도 훌쩍 넘은 나이이건만.

어쩐지 그에게서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쇠약하기보다는 탄탄하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런데.

“잘못 알고 계시구려.”

헤르만이 부정적인 대답을 던지자, 세일러의 얼굴에 의문이 어렸다.

힘을 되찾은 게 아니다?

당장 겉보기에는 불편해 보이는 구석이 없건만.

혹시 남들이 알지 못하는 후유증이라도 앓고 있는 걸까.

“음?”

“다 나은 정도가 아니라오.”

헤르만이 한쪽 입꼬리를 씩 말아 올렸다.

“더 죽여주게 강해졌지.”

파앗-

헤르만은 그 대답을 끝으로 적진 한가운데로 몸을 날렸다.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호기로운 대답.

세일러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잠시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그런 헤르만의 뒷모습을 보다가, 뒤늦게 혀를 차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말았다.

“에잉. 하여간 요즘 젊은 것들은 겸손이란 게 너무 없단 말이지.”

콰콰콰콰!

세일러도 헤르만처럼 몸을 날렸다.

자신의 아이들이 여기저기서 한창 싸우는 중이다.

자신이 거기서 빠져서야 아버지로서의 체면이 살지 않았다.

나이를 먹고도 이렇게 직접 뛰어다녀야 한다는 현실이 개탄스러울 뿐이었다.

* * *

‘시건방진 제국인들… 모두 쓸어버리고 싶군. 이딴 곳에 우리를 이용해먹다니.’

보르푸르 족의 최상급 전사, 바투는 별의 종군을 휘몰아치면서 이를 바득 갈았다.

그라고 해서 이번 기습 작전이 철저하게 자신의 부족을 이용해먹은 것이라는 걸 모르는 건 전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전쟁을 겪는 별의 종군보다 그가 더 많이 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제국 내에서 벌어지는 세력 다툼은 그들에게도 아주 지대한 관심사였으니까.

협곡을 주 터전으로 살아가는 모든 부족이 그러하듯, 보르푸르 족도 언젠가 이 지긋지긋한 산림 속 수렵 생활을 벗어나 토양이 비옥하고 물자가 넘쳐나는 제국으로 넘어가고픈 욕망이 강했다.

그렇기 때문에 동쪽 방벽을 자처하던 윈즈 변경주와는 자주 부딪칠 수밖에 없었고, 지금은 원수지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적잖게 원한 관계가 쌓인 상태였다.

그동안 이쪽이 입은 피해가 너무 크기 때문에 휴전 협정을 맺자는 윈즈 변경주의 제안을 받아들였던 것인데….

그런 협정에 넘어간 그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며칠 전에 부족의 몇 개 마을이 약탈당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몇몇은 포로로 끌려가기마저 했으니.

개중에는 시집간 바투의 누이도 섞여 있었다.

문제는 약탈자들이 너무 노골적으로 자신들의 행적을 여기저기에 남겨놨다는 점이었다.

마치 이곳으로 오라고 손짓이라도 하듯이.

그것이 함정이란 사실을 전혀 모를 수가 없었다.

아마도 포로들을 미끼로 삼아 자신들을 끌어들여, 현재 윈즈 변경주가 한창 싸우고 있는 제국군과 부딪치게 할 속셈일 테지.

문제는 그런 의도를 뻔히 알면서도 따를 수밖에 없다는 점이었다.

보르푸르 족에게 있어 가족이란 분신과도 같은 것.

가족과 혈족을 지키기 위해 싸우다 죽는 것은 위대한 조상들의 곁으로 가는 명예로운 일이나, 저렇게 끌려간 혈족들을 내버려 두는 건 저주를 받아 죽어서 나중에 구천지옥으로 떨어질 만한 큰 중죄였다.

바투가 직접 휘하의 전사들을 이끌고 이곳으로 온 것도 전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누이와 혈족들을 어떻게든 구하기 위해서.

그리고.

‘적사자! 제국! 무슨 일이 있어도 너희들은 내가 다 죽여버릴 것이다!’

이번 일과 연관된 자들을 모두 제 손으로 찢어 죽이기 위해서였다.

한낱 도구로 희롱당한 부족의 운명을 바꿔놓기 위해서.

이번 일을 계기로 제대로 일어서겠다는 마음을 지우지 않고 있었다.

차아앙!

하지만 지금 자신의 목젖으로 기습적으로 날아든 검을 겨우 막아낸 뒤부터는 생각을 달리 고쳐먹어야만 했다.

강했다.

손목이 이대로 떨쳐 나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이걸 막아? 제법이군. 엘릭도 이렇게 할 수 있을지 없을지 의문인데.”

바투는 상대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전장 한가운데에서도 흥미진진하다는 눈빛과 여유로운 태도는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

강자(强者).

그리고 투사(鬪士).

바투는 헤르만을 보자마자 가장 먼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보르푸르 족에게서도 강자와 투사는 존경받는 위치.

바투 역시 그만한 입지를 다진 존재이기 때문에 절대 상대를 소홀히 할 수가 없었다.

‘이 자가 여기서 제일 강한 것 같군. 그렇다면 이놈을 꺾으면 전투의 승리도 우리의 것이렷다.’

바투는 직감적으로 자세를 바로잡으면서 검을 고쳐 쥐었다.

“보르푸르 족의 족장, 바투. 넌?”

어설픈 제국어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순간, 헤르만의 두 눈에 이채가 어렸다. 이것이 일기토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었으니까.

그 역시 기사의 서품을 받은 몸이니, 자세를 경건히 갖출 수밖에 없었다.

“바일 가문의 가주, 청사자 헤르만 바일이다.”

“사자. 강하다 들었다.”

그 말이면 충분했다.

파아앗-

두 존재가 서로 격돌하기 시작했다.

* * *

“아저… 씨?”

세일러는 아군을 들이치는 검을 밀어내다 말고, 갑자기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가볍게 혀를 차야만 했다.

늘 유유자적하던 그였지만, 지금은 달랐다.

낭패감이 어렸다.

“이런.”

“아저씨가 왜 여기 있어요?”

익숙한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오래전 그와 보르푸르 족 간에 인연을 맺게 해주었던 존재의 얼굴.

아무리 세상이 좁다지만, 하필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건 또 무슨 장난이란 말이냐.

세일러는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 * *

쾅!

유다와 첫 충돌을 벌이자마자 엘릭의 머리에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아주 간단했다.

‘해볼 만한데?’

이전에 흑의 설원에서 기운을 감지했을 때는 분명 마왕 휼의 본체에 버금가는 것 같았건만.

막상 직접 부딪혀보니 실상은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마치 허울만 좋은 멀대라고 해야 할까?

바짝 긴장했던 것이 오히려 부끄러워질 정도였다.

『제힘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군.』

메피스토도 그걸 보더니 헛웃음을 터뜨렸다.

[제대로 쓰지 못한다면…?]

『열화판이 가진 한계라는 것이겠지. 이놈, 애당초 타고난 그릇이 아자젤의 인장을 감당할 정도가 못 돼.』

엘릭은 메피스토가 했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복제품이니 열화판이니 하는 의미를 명확하게 알 수 없다. 그저 유다가 아자젤이 남긴 인장의 조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 정도만 짐작하고 있을 뿐.

하지만 유다가 가진 한계를 이해할 수는 있었다.

‘제 스승과 가문의 가르침을 따라가지 못하던 낙제생들.’

그런 사람들이 있다.

흔히 명가나 명문이라 통하는 집단에 속해 있으면서도, 거기서 주는 깊이를 따라가지 못해 한참 뒤에 떨어진 존재들이.

엘릭도 한때 그들과 같은 무리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가진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은 하나 같이 마음 한편에 열등감을 품고 있기 마련.

‘한 번 해볼까?’

밑져야 본전이라.

어디 해보자는 생각에 엘릭은 유다를 보면 얄궂은 미소를 지었다.

“너.”

얼음 창과 녀석의 손톱이 팽팽한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반편이구나?”

“이놈!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콰아앙!

유다의 손톱에 힘이 바짝 실렸다. 엘릭은 재빨리 뒤로 몸을 내뺐다. 녀석의 검은 손톱이 애꿎은 지면을 후려치면서 돌조각이 위로 튀어 올랐다.

‘생각보다 반응이 너무 격한데?’

엘릭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그냥 코웃음을 치면서 넘어갈 수 있는 일일 텐데, 그걸 참지 못하고 있었으니.

『호오! 아무래도 자신의 한계를 스스로도 잘 알고 있는 눈치로군. 그리고리 내에서 그걸로 놀림을 많이 받았나? 아예 차별 대우를 받았던 모양이로군.』

메피스토는 손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차차차창!

“죽여주마!”

그사이, 유다는 맹목적으로 돌진을 시도했다.

엘릭은 빙의된 망령이 그려주는 결을 따라 발을 밟아나가면서 천천히 <다섯 개의 회오리>를 그려나갔다.

원주인인 하만이 보았다면 기겁했으리라.

자신이 가르쳐주지도 않은 비기도 능숙하게 펼치고 있었으니까.

쾅!

쾅!

휘휘휘휘!

엘릭의 움직임은 아주 빠르고 호쾌했다. 창끝은 소용돌이를 그리면서 연거푸 유다의 공격을 막고, 흩뜨리며, 빈 곳을 찌르고 있었다.

물론, 유다도 절대 만만치는 않아서 반격을 옆으로 쳐내면서 바짝 간격을 좁혀왔다.

<다섯 개의 회오리>는 상대와 간극을 최대한 벌리면서 창끝으로 회오리바람을 일으켜 적을 몰아붙이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 기술이었다.

인장이 가진 특성 때문에 어떻게든 근접전을 벌이려 하는 유다를 상대하기에는 이보다 알맞을 수가 없는 것이다.

거기다.

“【묶어라】.”

“【떨어져라】.”

엘릭이 시의적절하게 마법까지 발동하고 있으니, 유다는 좀처럼 간격을 좁힐 수가 없었다.

툭 하면 살얼음에서 냉혹의 사슬이 튀어나와 손발을 묶으려 드는가 하면.

때로는 사각지대를 교묘하게 노리고 얼음 화살이 쉴 새 없이 날아들었으니까.

유다는 당장 상대하고 있는 적이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인 것 같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아야만 했다.

“카아아! 놈! 가만히 있지 못하겠느냐!”

“싫은데?”

팽팽한 대치.

혹은 접전이었다.

『이대로는 끝이 없겠군.』

동감이었다.

『차라리 이렇게 해보는 건 어떠하냐?』

[어떻게요?]

『본디 아자젤의 인장은 본능의 영역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 광화(狂化)를 계속 유도해서 공격력을 수십 배로 폭발시키지. 그만큼 강한 공격력을 얻을 수 있지만.』

[마기 소모도 극심해진다?]

『그래.』

마법에 통달한 만큼 엘릭은 단박에 메피스토가 말하는 바의 의도를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당장 둘의 전투는 팽팽하게 보이더라도, 사실 따지고 보면 엘릭에게 불리한 면이 컸다.

가디언을 활용해 하위 마족들을 막고 있다지만, 어쨌거나 자신은 적진 한가운데에 고립된 처지.

거기다 권능을 발휘할 수 있는 시간도 한계가 있었다.

그러니 메피스토는 그 시간이 바닥나기 전에 유다의 마기를 전부 소모해버리자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 방법은.

[약 올리기?]

메피스토는 아무 말도 없이 웃어 보이기만 했다.

하지만 그 미소가 무척이나 사악해 보였다.

엘릭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여간 인성하고는.]

『네놈의 장기를 살려보라는 건데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

틀린 말도 아니었기에 엘릭은 피식 실웃음을 흘렸다.

콰아앙!

때마침 흘린 공격이 허공을 때렸다. 마기가 퍼지는 가운데, 엘릭은 최대한 비웃음을 잔뜩 유다에게 던졌다.

“25점. 좀 더 분발해봐.”

유다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감히! 인간 따위가 내게 점수를 매겨? 죽여주마!”

콰콰콰콰!

유다는 어느새 3미터도 넘는 거구를 훤히 드러내면서 엘릭에게 돌진을 시도했다. 그를 둘러싼 마기의 양도 이전보다 훨씬 많이 늘어나 있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엘릭을 맞출 수는 없는 노릇.

파앗!

엘릭은 블링크를 시도해 모습을 감추고, 단박에 유다의 뒤편으로 나타났다.

“10점.”

“이놈!”

유다의 꼬리가 채찍처럼 날아들었다.

콰앙!

엘릭은 그것을 옆으로 흘리면서 히죽 웃었다.

“21점.”

“으아아아!”

“야, 그래 가지고 어느 세월에 나 잡으려고 그러냐. 잘 좀 해봐. 명색이 아자젤의 권속이라면서 어째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어?”

“닥쳐라!”

“아니. 나도 닥치고 싶지. 그런데 좀 닥치게 해보라니까? 나를 한 대도 못 맞추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게 떠드는 것밖에 없어요.”

“카아아아!”

그 뒤로도 엘릭의 지적질은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그럴수록. 유다의 마기 소모도 극심해졌다.

그러다.

‘빙열(氷裂)!’

엘릭은 허점을 발견하고 그곳으로 얼음 창을 깊숙하게 찔러 넣었다.

콰콰콰콰!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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