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금빛 혜성(彗星)
『노다지가 따로 없군?』
메피스토는 엘릭의 발아래 넓게 퍼져 있는 마족들을 보면서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대마왕이었던 그는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과거, 자신과는 앙숙이나 다름없던 아자젤의 권속들이 이곳에 가득하다는 것을!
저것들이 가진 인장을 전부 거둬들이게 되면 어떻게 될까?
다시 얼마나 힘을 되찾을 수 있을까?
메피스토는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저절로 두근거렸다.
그리고.
기습을 노리던 저들을 오히려 역으로 기습하는 데에 성공한 엘릭은 혀를 차고 있었다.
‘어쩐지. 뭔가 더 있을 것 같더라니.’
야만족들이 대거 병영기지로 몰려들었을 때. 엘릭은 적사자군의 반격이 겨우 이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들에게는 호기나 다름없을 테니까.
그래서 다른 매복이 있나 망령을 풀어 비밀리에 주변을 멀리까지 수색해본 끝에, 이들을 곧장 발견할 수 있었으니.
‘마족과 손을 잡았다더니. 단순히 누명만은 아니었나?’
엘릭은 비단 메피스토의 반응이 아니더라도 이들이 전부 ‘그리고리’의 소속이라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흑의 설원에서부터 줄곧 자주 충돌해왔으니까. 이들이 품은 독특한 광기 어린 마기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게 더 이상했다.
그래서 이들과 손을 잡은 적사자군에 전혀 호감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래도 클레이모어 사그나드가 끝까지 충성을 바치려 했던 것을 감안한다면 괜찮은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었고.
제라이츠 황태자로 인해서 억울하게 누명을 뒤집어썼을지도 모르겠단 생각까지도 했었는데, 아무래도 아닌 모양이었다.
실상은 역적으로 선포되고 난 뒤에 어쩔 수 없이 그리고리와 손을 잡은 것이었지만.
마족을 박멸해야 한다는 사명을 띤 메르빙거의 가주로서는 이러나저러나 결국 부딪칠 수밖에 없는 적인 건 똑같았다.
그리고 지금.
엘릭은 그 사명에 따라 그리고리를 박멸하려 하고 있었다!
콰콰콰콰!
겨울 폭풍이 매섭게 휘몰아쳤다.
마치 흑의 설원에 있던 동장군을 옮겨 놓은 듯, 단박에 마족들이 있는 장소를 휩쓸었으니.
그 때문에 마족들의 상당수가 어떻게 손을 써보지도 못하고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대기를 싸늘하게 만드는 절대영도의 냉풍이 가진 위력은 그만큼 대단했다.
맛있는 게 넘쳐나는군…!
캬캬캬캬!
덕분에 신이 난 건 휼의 사념이었다.
츠츠츠-
언덕을 따라 그림자가 넓게 뻗쳐 나가고.
곳곳에서 톱니 이빨이 불쑥 튀어나오면서 죽은 마족들을 한입에 대거 집어삼켰다.
마치 그 모습이 바다 위를 헤엄쳐 다니던 물개를 단박에 낚아채서 턱의 힘만으로 동강을 내는 백상아리 같았다.
와그작!
와그작!
마기가 빠른 속도로 엘릭에게 흡수되었다.
겨울 폭풍을 어떻게든 견뎌낸 마족들도 끈질기게 따라붙는 휼 사념체의 집착에 지쳐갈 때쯤.
화아아악!
별안간 겨울 폭풍 사이로 막강한 기파가 퍼져나갔다.
마치 커다란 칼로 케이크의 정중앙을 가르는 것처럼, 날카롭게 번뜩이는 검은 빛무리가 겨울 폭풍의 정중앙을 가르고 지나갔다.
파파파파!
촤촤촤촤-
결국 구심점을 잃은 겨울 폭풍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강풍에 의해 어느새 빙판이 깔린 대지가 찢기고, 눈꽃이 폈던 수풀이 와르르 무너졌다.
그 중심에서.
유다가 안광을 차갑게 번뜩이면서 고함을 내질렀다.
“메- 르- 빙- 거-!”
쿠쿠쿠!
고함은 그 소리가 매우 컸다. 메아리도 곳곳으로 울려 퍼졌다. 이대로 산자락이 무너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크게 들썩이기까지 했다.
유다는 잔뜩 분노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여태 엘릭과 부딪치는 내내 그가 우위를 선점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고생해서 판을 깔아 놓을성싶으면, 그때마다 매번 엘릭이 찾아와서 뒤엎는 판국이니.
이번에도 마찬가지.
이제 확실하게 엘릭을 함정에 가둬놨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역으로 기습을 허용하고 말았다.
덕분에 데려온 병력 중에서 절반 가까이를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날려버려야만 했다.
하지만.
그를 가장 미치게 하는 건 따로 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네가- ‘한설’을 부리고 있는 거지?”
북풍과 한설.
본인이 흑의 설원에서 동장군을 잡아서 얻어내려 했던 권능을, 어떻게 이만큼이나 숙련도 있게 사용하고 있냔 말이다!
지금 자신의 발목을 잡는 이 겨울 폭풍이 두 권능 중 하나라는 건 그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우리의 힘이다-!”
“아니. 틀렸어.”
엘릭은 저만치 아래에서 어린아이처럼 바락바락 악을 쓰는 유다를 보면서 차갑게 웃었다.
“본 가의 힘이지.”
엘릭은 유다가 있는 곳으로 급전직하했다.
“죽- 여- 주– 마-!”
유다가 광란의 인장을 더 크게 빛내는 순간, 등가죽이 갈라지면서 갈까마귀의 날개가 치솟았다.
그러면서 그의 머리 위로는 산양의 뿔이 돋아났으니.
언젠가 엘릭이 가문에서 읽었던 책자 속 아자젤의 외양과 사뭇 흡사했다.
쾅!
쐐애액-
유다는 지면을 으스러져라 밟으면서 탄환처럼 단번에 엘릭에게로 쇄도했다.
두 존재가 허공에서 서로 격돌했다.
콰아아앙!
쿠르르-
새하얀 보석처럼 빛나는 마력과 칠흑처럼 어두운 마기가 충돌하면서 엄청난 굉음이 울려 퍼지고, 부서진 기파가 곳곳으로 흩어졌다.
‘역시 쉽지 않은데.’
엘릭은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찌르르하게 울리는 오른팔을 보면서 인상을 찡그려야만 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마기 중 일부가 마력회로 속으로 침투를 시도하려 하기도 했다. 마력을 돌려서 단박에 찢어놓긴 했지만, 까닥했다간 내상을 크게 입을 뻔했다.
딱 한 번 부딪친 것인데도, 이 정도라니.
흑의 설원에서 수하에게 빙의를 시도해서 싸웠을 때도 만만치 않은 상대라고 생각하긴 했다지만, 실제로 보니 정말 강하긴 더럽게 강했다.
한설의 힘을 빌리고 있는데도 이 정도였으니까.
『처음부터 전력을 다하는 게 좋을 거다. 짝퉁이라고 해도 일부나마 아자젤의 힘을 지닌 건 사실이니까.』
메피스토는 간만에 송곳니가 훤히 드러나라 웃고 있었다.
여태 엘릭에게 당하기만 하던 만만한 아저씨가 아니었다. 간만에 대마왕으로서의 잔혹한 모습이 드러나고 있었다.
그건 아마도 오랜 숙적의 그림자를 만났기 때문이리라.
『필요하다면 저놈의 약점을 읊어줄 수도 있는데.』
[아뇨. 됐습니다.]
엘릭은 메피스토의 은근한 제안을 거절했다.
[일단 오롯이 제 힘만으로 싸워보고 싶어서요.]
『그래?』
[지금까지 권능의 힘을 끝까지 쥐어짜 볼 기회가 없기도 했고.]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정말 힘들다 싶으면 SOS 칠 게요.]
메피스토가 마음대로 하라는 듯 뒤로 빠질 무렵, 엘릭도 대지에 착지했다.
쾅!
그리고 다시 마력을 끌어올리면서 유다가 있는 쪽으로 몸을 돌리려는데.
“그리고리의 마족들은- 전원- 메르빙거를 죽여라-!”
파앗-
파밧!
마족들은 겨울 폭풍의 영향에서 벗어나자마자 일제히 엘릭에게 달려들었다.
이렇다 할 망설임 따윈 추호도 찾아볼 수 없었다.
두 눈에는 오로지 엘릭에 대한 적의뿐.
아니, 정확하게는 무언가에 의해 강제로 심지가 조정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엘릭은 어쩐지 거기서 강한 데자뷔를 느껴야만 했다.
‘언령?’
아무래도 유다가 내뱉은 명령에 이들을 강제로 제어하는 힘이 담겨 있었던 것 같았다.
‘마족들도 그런 걸 사용할 줄 알았나?’
처음 접해보는 사실이라 놀랍기는 했지만, 어쩌면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메피스토의 말에 따르면, 마족의 인장이란 계급도에 따라 상위 계급에 하위 계급이 철저하게 종속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물며 그리고리가 아자젤을 신봉하는 종교 집단인 이상, 위계질서 역시 더욱더 확실하게 잡혀있을 수밖에 없을 테니. 지휘권자의 명령에 목숨을 갖다 바치는 것도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흑의 설원에서도 비슷한 광경이 있었고.’
다만, 문제가 있다면.
‘한꺼번에 상대하기 좀 많은데.’
유다와 일대일로 부딪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적진에 스스로 난입한 이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엘릭에게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이미 한설을 사용하면서 상당한 양의 마력을 소모하고 말았기에 최대한 발동을 늦출 생각이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일어나라】.”
그래서 엘릭은 두 번째 권능, 북풍을 즉각 발동했다.
그러자 이미 대지를 따라 퍼져나가 있던 그림자에서부터 유령기사들이 일제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한때. 겨울 현자인 오토 한을 따라 메르빙거의 위상을 전 세계에 떨쳐 울렸던 영웅들의 잔재가… 처음으로 바깥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엘릭이 굳이 본진에서 홀로 뚝 떨어져 직접 이곳에 온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아무래도 보는 눈들이 많은 곳에서 자신이 가진 비장의 패를 보여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캬아아아!
쿠오오오-
가디언들이 일제히 울음소리를 길게 내뱉었다.
“부, 북풍…?”
한설에 이어 북풍까지. 유다는 송두리째 빼앗긴 권능들을 보면서 까무러칠 정도였다.
하지만 놀라움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츠츠츠-
그림자가 갑자기 가디언들의 다리를 타고 올라와 저마다 들고 있던 무기에 깃들었다.
흉성의 인장. 마왕 휼이 가지고 있던 잔혹성과 공격성을 가디언들에게도 똑같이 심어준 것이다.
덕분에.
유령기사들이 저마다 쓰고 있던 투구 아래에서 빛나는 망자의 안광이 더욱더 매섭게 빛났으니…!
“모두 죽여.”
그 한 마디면 충분했다.
가디언들은 주인을 지키겠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이쪽으로 달려들던 마족들을 향해 병장기를 겨누었다.
촤촤촤-
냉혹한 칼바람이 불어닥쳤다. 마기와 마력의 잔향이 퍼져나갔다.
잠시나마 그리고리 쪽에 유리하게 돌아가는 듯했던 전세는 이로써 다시 엘릭 쪽으로 단박에 뒤집히고 말았다.
“【깃들어라】.”
여기다 엘릭은 밖으로 나가지 않고 마력회로 속에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망령을 끄집어올렸다.
유다와 다시 충돌하기 전에 전력을 최대로 끌어올리기 위해 빙의를 시도하려는 것이다.
그것도 그냥 빙의가 아니었다.
오토 한이 남긴 망령은 아주 많았고, 저마다 가진 장기도 각자 다 달랐으니. 개중에는 상대에 있어 천적(天敵)이라 할 만한 상극의 장기를 지닌 망령도 하나쯤 있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엘릭은 유다의 천적이라 할 만한 망령을 조금 전에 점쳐둔 상태였다.
‘저놈은, 아니, 저놈뿐만 아니라 아자젤까지, 그리고리의 마족들은 포악하고 급격한 성격을 지니고 있어. 그와는 반대로 진중하고 차분한 성질을 지닌 힘이라면… 보다 수월하게 상대할 수 있다.’
때마침 엘릭은 푸른 매로부터 딱 알맞은 성질의 무술을 배우기도 했다.
<다섯 개의 회오리>.
셋째 하만이 가르쳐줬던 무술이 여기에 딱 알맞았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엘릭이 불러들인 망령이 바로 당대에 뛰어난 창술의 고수였으니.
화아악!
빙의가 완료된 순간.
엘릭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온통 창술의 묘리로 가득 차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귀감도, 심안이 그려내는 결도, 전부 훨씬 더 생생해졌다.
손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쩌저저적!
공기 중에 있던 수분이 얼어붙으면서 길쭉한 얼음 창이 생겨났다.
엘릭은 그것을 잡으면서 대지를 거세게 박찼다.
파아앗-
빙의와 권능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단 4분.
그 안에 유다를 해치울 생각이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