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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178화 (177/405)

178화

금빛 혜성(彗星)

“시작되었군.”

유다는 병영기지가 있던 산자락을 어느새 둘러싼 횃불을 보면서 차갑게 웃었다.

아마 저곳에 있는 놈들도 깨나 많이 놀랐을 것이다.

설마 이렇게 깊숙한 곳까지 야만족이 나타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을 테니까.

이곳이 ‘북부 전선’이라고 불린다지만, 실상 윈즈 변경주에서도 깊숙한 내지에 해당하는바.

당연히 그들의 상식으로 야만족이 나타난다는 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역적으로 낙인이 찍힌 이후, 적사자군은 이미 ‘상식’에서 많이 벗어나고 있었다.

진짜 마족과 손을 잡은 것이 그러하며.

제국의 동쪽 방패를 자처했던 의무까지 내버렸다.

당연히 아주 오랫동안 제국의 기름진 토양을 호시탐탐 기다려왔던 야만족들이 이런 기회를 놓칠 리 만무한 일.

유다가 노린 게 바로 이런 거였다.

별의 종군이 기습할 것 같은 병영기지에다 미리 야만족의 인질들을 가둬 놓는 것.

야만족은 가족과 혈족에 대한 집착이 아주 크다. 개인주의 성향이 점차 강해지는 제국과 달리, 공동체 정신이 문화 곳곳에 배어있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어떻게든 인질이 잡혀 있다면 분개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대상이 가뜩이나 내란 때문에 혼란스러운 제국이라면? 더더욱 자극될 수밖에 없는바.

야만족들의 분노를 자극하는 것.

그리고.

그들의 야욕에다 불씨를 잡아당기는 것.

그것이 그리고리가 적사자군에게 내어준 방책이었고.

적사자군이 결국 취하기로 한 대전략(大戰略)이었다.

현재 산자락을 둘러친 야만족의 수는 대략 이천 남짓.

지형이 야만족들에게 있어서는 제 터전이나 다름없는 가파른 산자락이고, 그들 개개인이 뛰어난 전사인 것을 감안한다면 별의 종군도 대응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난전(亂戰)이 벌어진다면.

유다는 바로 그때 뛰어들 생각이었다.

그리고 흑의 설원에서 자신에게 치욕을 안겨주었던 엘릭의 머리를 이 손으로 직접 꺾어주리라.

‘그리고 나만이 그분이 내려앉을 진짜 그릇이라는 것을 보여 주리라.’

“전원, 대기한다.”

유다가 내린 명령에 따라, 마족들의 눈이 강렬하게 일렁였다.

* * *

“저건 뭐야?”

“야만족?”

“이 새끼들 대체 어디서 나타난 거야…!”

“적사자! 결국 야만족들에게 장벽까지 열어 준 건가!”

별의 종군은 순식간에 혼란스러워졌다.

동부 변경 지대에 살고 있다는 야만족들의 등장. 항상 제국에서만 살아왔던 그들로서는 여태 말로만 들었지, 난생처음 보는 적이었으니까.

거기다 이 근방에 다른 병력이 있다는 조사는 받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분위기 한 번 살벌한데? 어떻게 할 생각이더냐?』

메피스토는 어느새 산자락을 둘러친 수십 수백 개의 횃불을 보면서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엘릭의 인상이 살짝 일그러졌다.

[이상하네요.]

『뭐가?』

[분명히 아무것도 없었는데?]

엘릭은 분명히 적의 병영기지를 급습하기 전에 주변 일대를 심안으로 꼼꼼하게 살폈다.

혹시 자신이 미처 파악하지 못한 적들이 매복하고 있을까 싶어서.

살의를 띈 순간, 자연스레 결이 발생하기 때문에 심안이 이를 놓칠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아귀감까지 크게 키워놓고 있었으니 더더욱 걱정이 없었다.

실제로 이런 식으로 적들의 매복이나 반격을 막은 전적이 있었건만.

이번에는 미처 읽어내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메피스토는 오히려 그런 게 당연하다는 투였다.

『뭔가 착각하고 있나보구나, 애송이.』

애송이.

엘릭은 어쩐지 그 단어가 귓가에 확 꽂히는 기분이 들었다.

『네가 그토록 신봉하는 마법은 완벽하지 않다. 마법이란 미지를 파헤쳐가는 과정에서 생긴 부산물일 뿐이지, 그 결과는 아니잖느냐?』

“…!”

『속이려면 얼마든지 속일 수 있다. 같은 마법도 있을 것이고, 우리네가 사용하는 인장도 있겠지. 아니면 저들의 신체적 능력이 그러하거나.』

엘릭은 둔탁한 무언가로 뒤통수를 세게 후려 맞은 느낌이었다.

마법은 완벽하지 않다.

진리를 추구하면서 생긴 ‘과정’일 뿐이지, ‘결과’는 아니다….

마법에 절대적으로 의지했던 자신의 태도를 꼬집는 말인 것이다.

애송이라던 메피스토의 말이 맞았다.

그 단어에 어른스러운 척하면서도 아직 여러 면에서 미숙한 자신을 잘 투영해주고 있었으니까.

[그래. 마법은 완벽하지 않아. 아마 저들도… 심안이 닿지 않는 영역 밖에 있다가 갑자기 빠른 속도로 들이닥친 거겠지.]

협곡을 터전으로 삼고, 고원을 앞마당처럼 누비고 다니는 야만족의 신체적 능력은 이미 널리 알려진 바가 아니던가.

그렇다면 심안과 아귀감을 감쪽같이 속이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엘릭은 다시 한번 더 자신의 한계와 마주했다는 사실에 쾌재를 외쳤다.

어느 부분을 보완해야 하는지 알 수 있게 된 셈이니까.

그렇기에.

“전원 전투 준비!”

엘릭은 목소리에다 마력을 잔뜩 실어 크게 소리쳤다.

야만족들의 등장에 적잖게 당혹해하던 병사들이 일제히 눈을 크게 떴다.

어쩐지.

엘릭의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혼란은 물로 씻은 듯이 사라지고, 차분한 이성과 사고가 다시 머리를 치켜드는 느낌이었다.

“오와 열을 맞추고, 기습에 대비한다!”

병사들은 재빨리 군열을 맞추기 시작했다.

여태껏 운이 좋았을 뿐. 어차피 그들도 한 번쯤 이런 일을 겪으리란 생각은 했었다.

적사자군도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계속 당하고만 있지 않을 테니까.

“청양, 청마! 선두에 서세요! 밀집대형!”

이사벨의 명령에 바일 가의 기사단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처처처척!

청양과 청마가 일제히 타워 실드를 꺼내 전면에 앞세우면서 팔랑크스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들이 흐트러지지 않게 다른 기사단이 단단히 뒤를 받쳤다.

바일 가문이 오랫동안 강조해왔던 기강과 군율이 가지는 힘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 뒤를 백작군과 자작군이 받치세요!”

순간, 캘리거 백작과 쿠란시빌 자작의 가병들이 어떻게 해야 하나 눈치를 살폈지만.

“뭐해요! 다들 여기서 죽고 싶어요? 서둘러요!”

이사벨의 채근이 떨어지고, 캘리거 백작도 우선 따르라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들도 뒤따라 움직였다.

바일 가의 기사단이 갖춘 팔랑크스 뒤에 각각 캘리거 백작과 쿠란시빌 자작의 병사들이 좌우를 받쳤다.

“별의 종군은 군열의 후방을 담당하세요!”

“포메이션 C를 갖춘다!”

브라이언의 명령에 따라, 별의 종군은 일제히 일(一)자 형태로 퍼지면서 후방을 받쳤다. 그리고 몸의 방향을 반대로 돌렸다. 후방에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자리를 잡는데 일말의 망설임이 없었다. 그동안 여러 번의 전투를 같이 헤쳐나오면서 합이 너무 잘 맞았던 것이다.

“블랙 스컬은 집단전보다 혼전에 익숙하니 별개로 빠져서 적을 한곳으로 몰아넣는 데에 집중해 주세요!”

헤이즈를 비롯한 블랙 스컬의 눈이 반짝였다.

이사벨의 노림수가 무엇인지 알아챈 것이다.

앞으로 벌어진 전면전에 직접 끼어들되, 적들을 한 방향으로 몰아달라는 말이 아닌가.

그건 아마도 단단하게 세워진 본군 대형을 말하는 것일 테니.

망치와 모루 작전이었다.

블랙 스컬이 망치. 본군 대형이 모루.

블랙 스컬이 적들을 단단한 본군 대형으로 몰아내면, 저들은 퇴로가 가로막히게 된다. 그럼 블랙 스컬이 망치가 되어 저들을 각개격파하는 식이었다.

“빌어먹을 새끼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와?”

“식인종 놈들, 사지를 찢어 죽여주지.”

아군의 눈빛이 흉흉하게 빛나던 그때.

“온다.”

엘릭의 한 마디가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파아앗!

병영기지를 둘러싼 숲 자락이 흔들리면서 야만족 전사들이 일제히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갑주나 의복 대신, ‘입은’ 것이 아니라 몸에 걸치다시피 한 동물 가죽. 단단한 구릿빛 피부. 얼굴에다 복잡하게 칠한 붉은 화장이며 몸에 찍은 문신들. 저마다 한 손에 든 엄청난 굵기의 만도(灣刀, 시미터). 그러면서도 왼쪽 어깨에 걸린 작은 크기의 각궁과 화살통.

그리고 살벌하게 빛나는 안광(眼光)까지.

정말이지 같은 사람이라기보다는 짐승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는데.

아바바바!

이효효효!

기괴한 소리까지 내니 도무지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저건 맹수였다.

떼로 움직이는 맹수!

“【타오르는 불길】!”

“【흐르는 불바다】….”

“【창궐하는 폭풍】…!”

콰콰쾅!

화르르르-

캘리거 백작과 쿠란시빌 자작의 가병들이 비교적 안전한 대형의 중심부에 자리를 잡은 이유는 간단했다.

그들에게 마법사가 많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야만족과 직접 충돌하기 직전에 공격 마법이 그들 한가운데에 내리 찍혔다.

강풍이 휘몰아치고, 불길이 땅거죽을 뚫고 치솟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위압적인 광경이었지만.

야만족들은 그것을 두려워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더 전의를 불태우는 느낌이었다.

“쿠화! 마타타! 샤바라! 하!”

수장으로 보이는 이가 내치는 알 수 없는 소리에 야만족 전사들이 일제히 우렁찬 고함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

아!

소리를 한 번씩 내뱉을 때마다 저들의 사기가 두 배씩 커지는 느낌이었다.

“뭐라는 거요?”

헤르만이 던진 질문에 세일러가 엷은 미소를 지으면서 칼을 뽑았다.

“불길한 마법을 쓰는 것을 보니, 우리가 악신이 가호하는 악마의 군대가 확실하다는군. 그러니 반드시 찢어 죽이라나?”

“뭐요? 허!”

헤르만은 어이가 없다는 투로 헛웃음을 흘렸다.

악마라면 마족을 의미할 텐데, 과거 대마전쟁에서 최선봉에 서서 마족을 무찔렀던 그로서는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헤르만은 차라리 세일러에게 뜻을 묻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저들의 사기를 고양시킬 수 있는 작자라면, 야만족 중에서도 상당한 직급을 가진 전사일 테니.

이들에게 제대로 된 지휘 체계라는 게 있을 턱이 없으니, 저자부터 먼저 해치우면 그만이었다.

그래서 앞으로 튀어 나가려 하는데.

“한데, 찬성공작은 어디로 갔나?”

갑자기 세일러가 던진 질문에 헤르만의 걸음이 뚝 멈췄다.

“그게 무슨 소리요?”

“메르빙거 가주가 보이질 않아. 어디로 갔나? 그치가 도망칠 리는 없고, 대체…?”

세일러도 처음으로 적잖게 당혹해하는 눈치였다.

헤르만이 황급히 주변을 살폈다.

정말이었다.

엘릭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한 가지 생각이 미쳤다.

‘설마?’

세일러도 헤르만과 똑같은 생각이었던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복잡한 이곳은 우리에게 맡기고, 혼자 재미를 보러 간 게로군.”

* * *

콰콰쾅!

전투가 본격적으로 발발하는 소리가 들렸다.

거기서 풍기는 피 냄새와 탄내를 봤을 때… 절대 작은 규모는 아니었다.

생각보다 접전이 벌어지나보군.

유다의 입꼬리에 미소가 살짝 걸렸다.

“괜찮군.”

츠츠츠!

유다의 등에 박힌 인장이 불길하게 빛을 내기 시작했다.

원래 그가 갖고 있던 소화의 인장 옆에 다른 인장이 있었다.

두 발 달린 갈까마귀가 날아오르는 듯한 형태.

광란(狂亂).

아자젤을 상징하는 광기의 인장보다 하위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것을 간직한 자는 그리고리 내에서도 특별한 신분을 지니고 있었다.

주교(Bishop).

혹은 ‘그릇’.

아자젤이 내려앉을 수 있는 존재라고!

유다는 이전처럼 설렁설렁 대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야 능구렁이 같은 메르빙거에게 빈틈만 내어주는 꼴이 될 테니까. 처음부터 전력을 다해 적진으로 뛰어들어 엘릭의 머리부터 박살 낼 참이었다.

“그럼 슬슬 움직일 준비를 하…!”

유다가 자신만만하게 진격을 명령하려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보다 먼저.

하늘에서부터 기습 공격이 벌어지고 있었으니.

콰콰콰쾅!

우르르르-

겨울 폭풍이 그들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누구 맘대로.”

엘릭이 그 위에 있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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