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금빛 혜성(彗星)
[…이에 따라 상기된 기일과 시각에 맞춰서 해당 지점으로 이동할 것. 최대한 적들의 이목을 분산시켜 전력을 양분할 필요가 있음….]
[…이번 전면전의 승패 향방은 북부 전선의 승과에 달려있으므로….]
제라이츠 황태자가 응원군과 함께 보낸 명령서의 내용을 축약하자면 아주 간단했다.
북부 전선을 최대한 혼란으로 몰아넣어라.
그리고 작전 기일까지 해당 지점을 점령하라.
당연한 말이지만, 그리 쉬운 내용의 작전은 절대 아니었다.
대본영에서 한참 떨어진 북부 전선에서 유군 활동을 하는 것만 해도 상당히 지치는 짓이건만.
더더군다나 그들이 지목한 지점이 윈즈 변경주의 본성인 적막의 성에서도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라,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진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엘릭은 전진을 개시했다.
별의 종군도 굳이 여기에 대해서 따로 항의하지 않았다.
이미 엘릭을 향한 그들의 신뢰는 하늘을 찌를 정도였으니까.
그렇게.
다음 공격이 진행되었다.
19번 병영기지였다.
* * *
“확실히 싸우긴 잘 싸운단 말이지.”
엘릭은 불에 타는 적의 병영기지를 보면서 헛웃음을 흘렸다.
응원군으로 참여한 이들의 전력이 예상보다 훨씬 강했기 때문이었다.
헤르만이 데려온 바일 가문의 기사단이야 원래 어느 수준인지 잘 알고 있었지만.
세일러가 데려온 블랙 스컬도 독보적인 활약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최대한 깊이 들어가서 지휘소를 털고 나온다, 알겠나?”
“도망치는 적들은 잡지 마!”
“거기! 그놈 잡아!”
블랙 스컬은 태생이 용병 집단이다 보니 집단전보다 혼전(混戰)에 특화되어 있었다.
그렇다 보니 전투 방식도 다른 부대와는 전혀 달랐다.
별의 종군과 헤르만의 기사단이 이사벨의 진두지휘 아래 전열을 맞춰서 적들을 잘게 쪼개어 각개격파 전술을 구사한다면.
블랙 스컬은 별다른 명령 체계 없이 전투가 시작하자마자 적진에 다짜고짜 끼어들어 칼을 휘둘러댔다.
어중간한 소대였다면 저런 마구잡이식 전투 방식으로는 분명 큰 피해를 면치 못했겠지만.
저들의 개개인이 가진 기량이 대단해서 그런지 이렇다 할 피해는 입지 않고 있었다.
마치 양 떼 사이를 누비고 다니는 늑대 같다고 해야 할까?
웃긴 점은 그러면서도 그들끼리는 의사소통이 수시로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수신호를 주고받으면서 지휘관은 누구인지, 그에게 어떻게 접근해서 암살할 건지, 어떤 방식으로 퇴로를 확보할 건지에 대해서 정보 교환을 나누는 것이다.
그러고 난 뒤에는.
퍼억!
여지없이 지휘관의 머리가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다른 멤버들이 의도적으로 지휘부의 이목을 잡아끄는 사이, 암살자가 지휘관을 암살하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푸우우우!
피 분수가 쏟아지는 아래.
헤이즈가 흉흉한 슬렛지 해머를 든 상태로 서 있었다.
‘우리 누이… 여전히 무섭단 말이지.’
엘릭은 쓴웃음을 지었다. 헤이즈가 용병 업계로 흘러 들어간 데에는 자신의 책임이 가장 컸으니까.
“저것들…!”
“너무 맘에 드는데.”
“나중에 따로 한 판 붙어보자고 해볼까?”
한편, 푸른 매는 블랙 스컬의 활약에 가볍게 탄식을 터뜨리면서 호승심을 가지는 눈치였다.
그들도 나름대로 뛰어다닌답시고 뛰어다니지만, 기사단을 이끌고 있다 보니 저렇게 함부로 날뛸 수는 없는 입장이었으니까.
그러던 그때.
블랙 스컬의 단장이 푸른 매 쪽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훗.”
가볍게 웃음을 던지고 다시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명백한 비웃음.
한순간, 푸른 매 사이로 정적이 흘렀다.
“….”
“….”
“…뭐야, 방금 저거?”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응. 아냐. 우리 비웃은 거 맞아.”
“이런 어디서 굴러먹다가 들어온 지도 모르는 것들이! 뒈졌어!”
당연한 말이지만, 푸른 매는 절대 걸어오는 싸움을 마다할 인사들이 아니었다.
결국 기사단장들에게 뒷일을 부탁하고는, 푸른 매들 역시 적진으로 깊숙하게 파고들면서 마구잡이로 창칼을 휘둘러대기 시작했다.
덕분에 블랙 스컬도 이에 뒤질세라 더 열을 내기 시작했으니.
“다들 뭣하나! 청사자 놈들이 꼬리에 불붙은 망아지처럼 날뛰잖냐! 너희들도 서둘러! 진짜 사자가 누구인지 똑똑히 보여주자!”
우오오!
마치 누가 더 대단한지를 내기라도 하려는 모양새라, 전투는 단박에 별의 종군 쪽으로 기울어지게 되었다.
엘릭은 빠르게 돌아가는 전황을 전부 한눈에 담았다.
심안이 활짝 열려 있었다.
‘회사자의 검술은 난잡함인가.’
<보라매의 기상>을 하나둘씩 습득하면서 강체술이나 마투술과 엮을 방안도 모색하고 있는 이때.
엘릭은 데이터가 될 만한 더 많은 상승 무술을 견식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리고 이런 전장은 데이터를 수집하기에 딱 알맞았다.
회사자 역시 황금사자가 봉신으로 두었을 만큼 뛰어난 검술을 가진 초고수.
그가 세상을 떠돌아다니면서 거두었다던 ‘자식들’의 무술 곳곳에는 일정한 패턴이 숨어있었다.
아마도 저것이 회사자의 검술, <잿빛 하늘의 햇살>일 테지.
엘릭이 난잡하다고 표현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잿빛 하늘의 햇살>이 중구난방이란 뜻은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도저히 예측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변수를 담고 있는 패턴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시기적절한 대응책을 내놓을 수 있을 만큼 깊은 묘리를 품고 있었다.
덕분에.
엘릭은 강체술의 비기에 해당하는 ‘난(亂)’이나 ‘기(奇)’자 결에 대한 이해도가 한층 깊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씩!
엘릭은 뒤늦게 저만치 먼 곳에서 자신을 보는 시선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회사자 세일러 홈즈가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재미난 아이를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엘릭은 아주 잠깐 움찔거렸다.
사실 따지고 보면 세일러의 검술을 훔친 셈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래도 증거는 없으니 뻔뻔하게 나서야겠다고 생각하는데.
갑자기 세일러가 뭐라고 입술을 벙긋거렸다.
거리가 너무 멀고, 주변이 온통 시끄러워서 뭐라고 말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내용이 뭔지는 금방 알 것 같았다.
너무 많이 베껴 가지는 or 뺏어가지는 말게. 그러다 이 늙은이의 밑천이 바닥나면 어떡하나?
『저 늙은이, 아무래도 늙은 여우가 분명하다. 네 스승은 그래도 단순한 면이라도 있었지, 저 늙은이는 아무래도 검술보다 능글맞기로 사자의 칭호를 얻은 것 같은데?』
메피스토의 말에 엘릭은 쓴웃음을 지었다.
* * *
모든 전투가 끝난 뒤.
포로들을 포박하고, 전리품을 수거하는 등 전장의 뒷정리를 하다가 엘릭은 미간을 찌푸려야만 했다.
“…너무 순조로운데.”
엘릭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게요.”
이사벨도 마찬가지.
무언가 찜찜한 표정이었다.
헤르만은 그런 두 사람의 대화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그러나? 이기고 있는데 그만큼 좋은 게 아닌가?”
응원군이 합세한 이후, 별의 종군의 진격은 그야말로 파죽지세였다.
더 이상 지난번처럼 승전하고 나서도 퇴각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정도로 상당한 전력을 보유하게 되었으니.
덕분에 윈즈 변경주의 북방 지역도 거의 6할가량 점령이 끝나가고 있었다.
헤르만의 눈에는 모든 게 순조롭기만 했다.
그저 하루라도 빨리 전면전이 벌어져 이번 전쟁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밖엔 없었다.
황실과 귀족들의 수많은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이번 전쟁은 그로서도 상당히 피로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문제인 겁니다.”
“음?”
“재미난 이야기를 하는가 보군. 이 늙은이도 끼워줄 테지?”
헤르만이 여전히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세일러가 도중에 끼어들었다.
엘릭은 자신이 잘못한 게 있어 잠깐 움찔거렸지만, 이왕 이렇게 된 것 뻔뻔하게 나가기로 마음먹었기에 크게 내색하는 티를 내지 않았다.
세일러는 그런 엘릭의 생각을 알고 있다는 듯 슬쩍 미소를 지었다가, 질문을 던졌다.
“그보다 조금 전에 하던 말 계속해 보게. 뭔가 찝찝한 게 있는 모양인 것 같은데.”
엘릭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최근 전투 모두에서 저들의 저항이 너무 약했습니다. 애초에 의지가 없는 것 같았달까요.”
순간, 헤르만과 세일러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그 말은?”
“위장이란 거군.”
세일러가 짧게 말을 끊고는 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면서 말을 이었다.
“이런 경우에는 보통 둘 중 하나지. 우리를 방심케 해서 함정으로 끌어들이려는 것이거나, 아니면 최대한 발목을 붙잡아 주 병력을 다른 곳으로 빼돌리려는 것이거나.”
전자라면 대비를, 후자라면 속도를 끌어올릴 필요가 있었다.
세일러는 그중 후자 쪽으로 가닥을 잡는 눈치였다.
적사자군이 토벌군을 막기 위해서는 당장 한 손이라도 급한 상황이었다. 그러니 어지러운 북부 전선은 일단 내버려 두고 주요 병력을 중앙으로 끌어들이는 것도 절대 이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엘릭은 담담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가능성은 하나가 더 있습니다.”
“음?”
“둘 다일 경우입니다.”
“뭐?”
세일러가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는 그때.
“주군!”
브라이언이 다급하게 말을 몰아 이쪽으로 달려왔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잠시 이쪽으로 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목소리가 너무 엄숙했다.
엘릭은 직감적으로 뭔가 일이 터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브라이언을 따라 병영의 후방에 위치한 창고 지대 쪽으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헐벗은 사람들이 꽤 많이 보였다.
끼니를 제대로 때우지 못했는지 하나 같이 앙상한 체구를 가진 이들. 몸에 땟국물도 가득했다.
하지만 특이한 점은 그들의 복색이 일반 제국민들과는 현저히 달랐다는 점이었다.
머리에 두른 테에는 새의 깃털로 보이는 것이 꽂혀 있었고, 옷은 마(麻)를 짠 것으로 보여 팔다리가 훤히 드러났다. 피부색도 전체적으로 짙은 편이었다.
“이들은?”
헤르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브라이언이 뭐라고 대답하려는데, 세일러가 대신 가로챘다.
“보르푸르 족이로군.”
“보르… 뭐요?”
“보르푸르. 이들의 언어로는 ‘활달한’이란 뜻이다. 동부 변방에서 수림 지대에서 수렵으로 생활을 영위하는 이들이지.”
“야만족이란 말이오?”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말게. 이들도 그 정도 말쯤은 알아들으니까. 제국의 그늘에 들어오지 못했다는 것 말고는 우리와는 다를 바가 없는 평범한 사람들일세.”
세일러는 여태 장난기 가득했던 모습을 지우고, 조심스레 그들에게 다가갔다.
헤르만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제국 사람들이 가진 야만인의 이미지는 가히 최악이라 할 수 있었다. 대륙의 남쪽 지대에서 제국에 대항하는 연합 왕국 세력이나, 매일 같이 공화주의니 자유주의니를 외치면서 반란을 꿈꾼다는 자유혁명군 보다도 더 좋지 않았다.
앞선 두 곳은 문명의 혜택이라도 받았지, 야만인들은 그런 것도 없이 오로지 싸움에 미치고 미신과 본능만 추구한다고 알려져 있으니까.
특히 그들 중 일부가 벌인다는 식인 문화는 끔찍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으니.
헤르만이 정의와 협의를 외치며 다녔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제국민에 한정된 것일 뿐. 일반인들의 시야를 벗어나지 못한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문명을 거부하고, 오로지 싸움과 피에 미친 광인(狂人)들.
제국의 존립을 위협하고, 동부 변경을 어지럽히는 마족과 같은 작자들.
그것이 바로 야만족에 대한 세간의 인식이었다.
하지만.
세일러에게는 그런 차별적인 시선이 전혀 보이질 않았다.
“둠캇.”
오히려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으며 그들에게 다가가기까지 했으니.
순간, 야만인들은 세일러를 경계 가득한 눈길로 노려보다 말고, 자신들의 언어가 들리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아시마라품. 둠차이?”
문법도 발음도 어설픈 구석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보르푸르 족 사람들과 몇 년간은 같이 생활을 해본 이들만이 보일 수 있는 언어였다.
둠캇은 안녕, 인사말이었다. 뒷말은 ‘너희들이 어째서 여기 있는 것이냐?’는 의미였다.
그래도 야만인들은 잠시 대답하기를 머뭇거렸지만, 세일러가 끈질기게 말을 걸어오자 조금씩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화가 길게 이어질수록.
세일러의 안색도 딱딱하게 굳었다.
“하페.”
“하페.”
세일러는 마지막 인사까지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나 엘릭 쪽을 돌아봤다.
헤르만이 진중한 어투로 물었다.
“야만… 아니, 보르푸르 족인지 하는 이들이 왜 여기 있는 거요? 설마 적사자가 저들과 손을 잡기라도 한 거요?”
“비슷하네.”
“비슷… 하다니?”
“이들, 인질일세.”
세일러의 눈가에 미간이 팼다.
“메르빙거 가주의 말마따나 함정에 빠졌단 뜻이지.”
바로 그 순간.
와아아아!
별의 종군이 있는 산자락 주변으로 횃불이 여기저기서 퍼지더니 엄청난 크기의 메아리가 울려 퍼졌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