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금빛 혜성(彗星)
쿠란시빌 자작이 재빨리 뒷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생각하시는 것과 달리 전하를 우롱할 생각 따윈 절대 없었습니다. 제가 여기서 서열이 가장 낮으니 말미에 인사를 드리려 했을 뿐이었습니다.”
정제되어 고저조차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
누가 본다면 감정 기복이 잘 없는 사람이라고 느낄 법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엘릭은 잘 알고 있었다.
캘리거 백작이 위압감 넘치는 모습 아래에 음험한 면모를 품고 있는 것처럼, 쿠란시빌 자작도 마찬가지로 정제된 모습 아래에 포악한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한때 메르빙거의 방벽이자 창칼로 불렸던 양팔은 여태껏 전혀 다른 가면을 쓰고 있었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아마 지금도 쿠란시빌 자작은 겉보기엔 머리를 숙인 것으로 보일지 몰라도, 속으로는 어떻게든 이 굴욕을 되돌려줄 방법을 찾고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의 기세를 꺾는 게 가장 중요한 바.
주도권을 한 번 놓치고 나면 그가 메르빙거의 이름을 앞세워 세운 공적을 모두 이들에게 뺏길 게 분명했으니, 절대 경계를 늦추지 않을 작정이었다.
“캘리거 백작. 달리 할 말이 없나?”
엘릭은 쿠란시빌 자작에게는 아무 답변도 주지 않고 시선을 캘리거 백작에게로 쏘아붙였다.
쿠란시빌 자작으로서는 용서를 받기는커녕 무시만 당한 셈이니 표정이 저절로 무너졌지만, 엘릭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캘리거 백작은 한순간 생각이 많은 얼굴이었지만.
‘…어쩔 수 없군.’
곧 한 발을 뒤로 빼야겠다고 판단했다.
당장 그에게는 명분이 없는 데다가, 여기서 발언권이 가장 강한 헤르만과 세일러가 엘릭의 편을 들 게 분명한 이상 더 쭈뼛대서는 좋을 게 없었다.
“제가 결례를 범하였습니다, 찬성공작. 용서해주십시오.”
엘릭은 더 이상 대화를 섞기 싫다는 투로 가볍게 손사래를 쳤다.
마치 아랫사람을 대하는 투.
캘리거 백작의 얼굴도 쿠란시빌 자작과 마찬가지로 확 구겨졌지만, 엘릭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오만하게 아래턱을 들어 보이며 냉소 섞인 시선으로 보기까지 했으니.
덤벼들 테면 덤벼보라는 식이었다.
그게 마치 엘릭을 도발하기 위해 악수를 청하던 캘리거 백작의 꼼수를 고스란히 되돌려주는 것 같아서… 속에서 더 크게 열불이 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살벌하기 짝이 없는 인사가 모두 끝나려나 싶었던 바로 그때.
번쩍!
별안간 엘릭의 목에 걸려있던 마도경식이 빛났다.
동시에 캘리거 백작의 오른손 약지에 걸려있던 반지도 똑같이 빛났으니.
“…!”
“…!”
엘릭과 캘리거 백작의 시선이 도중에 허공에서 부딪쳤다.
* * *
“…엘릭 메르빙거. 어렸을 때와는 많이 달라졌군.”
쿠란시빌 자작은 지휘소를 나오면서 이를 세게 갈았다. 저대로 내버려 뒀다간 이가 깨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만큼 엘릭 메르빙거에게서 받은 충격이 컸단 뜻이리라.
메르빙거의 우산을 떠난 지 어언 20여 년째.
세월이 흐른 만큼 자신이 알던 엘릭도 그만큼 달라졌을 거란 생각을 하긴 했다지만.
그래도 유약하기 짝이 없던 엘릭이 저렇게 달라졌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충격적이기만 했다.
“메르빙거… 그 자체였어.”
오늘 엘릭의 모습은 절로 젊은 시절에 보았던 누군가를 떠오르게 했다.
항상 마음 속 깊이 존경했던 존재.
주종 관계를 떠나 항상 옆에 있고 싶었고, 뒤를 지켜주고 싶었던 존재.
따라잡기 위해 그토록 발버둥 쳤지만, 그때마다 저만치 앞서 달려가던 존재.
그랬기에… 멀어지는 것을 두고 볼 수밖에 없어서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으로 그쳤던 존재.
인간이 가진 그릇의 한계를 절실히 체감하게 만들어주었던 장벽과도 같은 존재.
우스던 메르빙거.
그의 모습이 엘릭에게 한순간 겹쳐졌을 때, 쿠란시빌 자작은 저절로 등골을 따라 소름이 돋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좋은 추억과 나쁜 기억이 모두 그곳에 있었으니까. 어떻게든 떨쳐버리고자 애썼던 과거의 망령이 다시 그의 발목을 붙잡는 기분이었다.
‘어떻게든.’
그렇기에 쿠란시빌 자작은 빠르게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어떻게든 이번 전쟁을 기회로 엘릭 메르빙거를… 아니, 메르빙거의 싹, 그 자체를 없애야만 한다.’
그건 조급증이나 다름없었다.
이번 기회를 놓치고 나면 두 번 다시 메르빙거의 그늘을 완전히 벗어날 방법이 없으리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처음에는 그저 ‘인터레시아’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합류한 것인데… 아무래도 당장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닌 것 같았다.
빠득.
빠드득.
쿠란시빌 자작의 생각이 깊어질수록 이를 가는 소리도 자꾸만 커졌다.
하지만 그를 뒤따라 나온 캘리거 백작은 그걸 들을 겨를이 없었다. 아니, 들었다고 해도 쿠란시빌 자작을 이해했을 것이다.
자신도 그와 똑같이 굴욕을 겪은 만큼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으니까.
더군다나 쿠란시빌 자작과 그는 메르빙거라는 공통된 적 때문에 잠시 손을 잡고 있을 뿐.
애당초 두 사람의 사이는 그리 좋은 게 아니었다.
아니, 사실 최악, 혹은 원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프란츠 가문과 트워크 가문의 대립은 아주 오래전부터 수백 년 동안 이어지던 것.
처음에는 메르빙거의 ‘첫 번째’ 가신이 누구냐는 것으로 대립을 해왔다.
메르빙거의 방벽과 창칼. ‘이 둘 중 누가 우위냐?’는 문제는 항상 두 가문의 자존심을 건드릴 수밖에 없는바.
시대마다 좀 더 세력이 강했던 곳이 ‘첫 번째’ 혹은 ‘오른팔’이 되곤 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왼팔’이 되었던 가문은 항상 그 자리를 되찾기 위해 절치부심으로 노력하여 더 크게 성세를 일구었다.
메르빙거는 그러한 두 봉신가의 대립에 절대 개입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부추기는 면도 적잖게 있었다.
내분이라도 벌어지는 게 아닌 이상, 두 가문의 경쟁은 지속적인 성장을 부를 수밖에 없음이니.
이는 메르빙거로서도 좋으면 좋았지, 절대 나쁜 게 아니었으니까. 거기다 두 곳을 통제하기도 훨씬 수월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메르빙거가 그만큼 강했을 때나 해당하는 일이었다.
대마전쟁을 거치면서 메르빙거의 세가 대폭 약해지자마자, 당대 ‘왼팔’이었던 트워크 가문이 즉각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트워크 가문은 자신들이 프란츠 가문에 밀려야 하는 기준을 모르겠다면서 메르빙거의 우산을 직접 걷어차고 나왔다.
그리고 독립을 천명하면서 빠른 속도로 강해졌으니.
비록 작위는 아직 자작가에 지나지 않을지는 몰라도, 그들이 가진 전력만큼은 웬만한 변경백에 준할 만한 수준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창칼’이라는 칭호만큼, 그들은 오랫동안 마법뿐만 아니라 무도에서 있어서도 꾸준히 실력을 쌓아왔기 때문이었다.
여하튼.
이러한 프란츠 가문과 트워크 가문이 오랫동안 벌인 대립의 역사는 오늘날까지 이어져 두 가주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으니.
서로를 달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도,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오월동주(吳越同舟).
그런 표현이 옳으리라.
아니.
굳이 그런 게 아니더라도, 사실 캘리거 백작은 현재 다른 걸 신경 쓸 겨를이 전혀 없었다.
‘하필 이럴 때 인터레시아의 열쇠가… 울리다니.’
인터레시아.
달리 ‘메르빙거의 유산 창고’라고도 할 수 있을 장소.
그곳에 대한 정보는 현재 자신이 갖고 있었다.
같이 메르빙거를 견제하자며 쿠란시빌 자작을 끌어들였던 것도 전부 이것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인터레시아에 대한 정보를 아직 그에게 공유하지 않았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면서.
물론, 그는 앞으로도 인터레시아에 대한 정보를 공유할 생각 따윈 없었다.
인터레시아는 이제 프란츠 가문의 소유라는 생각이 강했으니까.
그동안 자신들이 대대로 메르빙거를 위해 봉양했던 대가를 청구하면서 챙긴 것이니, 트워크 가문이 주장할 수 있는 권한 따윈 없었다.
그런데.
하필 그런 곳에서 갑자기 반응을 보일 줄이야.
‘마도경식이 그렇게 달라졌을 거라고는 전혀 짐작도 못 했다. 제길! 이럴 줄 알았으면 그것도 진즉에 챙겨서 나올 것을.’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엘릭 메르빙거도 자신이 지금 끼고 있는 반지가 어떤 비밀을 품고 있을 거란 걸 짐작했을 것이다.
앞으로 이것을 빼앗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릴 게 분명했다.
쿠란시빌 자작도 여기에 대해 따져 물을 게 분명하고.
이럴 줄 알았다면 가문에서 가지고 나오지 않을 것을.
가솔들은 물론, 혈육인 자식들도 믿지 못하는 성격 때문에 직접 챙겨왔던 것이 이런 불상사를 만들어낸 셈이었다.
앞으로 상당히 귀찮아지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잠깐.’
그러다 캘리거 백작은 다른 방향으로 생각이 미쳤다.
‘마도경식을 챙기고 나와…? 그럼 이 열쇠의 마지막 비밀을 풀 수 있는 것도 거기에 있는 것 아닌가?’
캘리거 백작은 갑자기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째서 여태 이런 걸 생각지 못했던 걸까?
인터레시아에는 여태 그만이 알고 있는 아주 큰 비밀이 있었다.
메르빙거에서 빼돌린 유산 중 상당수가 그 안에 들었다지만, 정작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마지막 방’이 굳게 잠겨 열리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사실 그곳에 뭐가 들었는지는 캘리거 백작도 알지 못했다.
인터레시아의 금고지기였던 선대 백작도 마찬가지.
메르빙거의 당대 가주만이 통과할 수 있다고 알려진 마지막 방의 비밀은 여태껏 수수께끼로 남아있었다.
그동안 그 비밀을 풀고자 캘리거 백작이 했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어쩌면… 그 비밀이 쉽게 풀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마도경식.
메르빙거의 당대 가주에게만 전해진다는 가보가 그 방의 열쇠일지도 모르지 않은가!
‘설사 잘못 짚었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긍정적으로 검토해 볼 만한 사안이긴 하다.’
캘리거 백작은 엘릭의 목에 걸려있던 마도경식을 떠올렸다.
그동안 자신이 알고 있던 것과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 않던가.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엘릭이 그것을 해제했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수많은 비밀을 품고 있을 마도경식이 인터레시아와도 어떤 연관이 있다는 것쯤은 합리적인 추론이라 할만했다.
‘문제는 그걸 어떻게 뺏느냐는 건데.’
캘리거 백작의 두 눈이 음험하게 빛났다.
여태 그가 갖고 있던 생각은 아들에 대한 복수와 메르빙거를 짓밟아 가문의 명예를 다시 끄집어 올리겠다는 야욕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이제는 그런 것을 떠나 반드시 ‘마도명문’이 지닌 가치를 프란츠 가문으로 가져와야 한다는 목표가 생긴 것이다.
이는 아주 큰 차이를 의미했다.
전자는 엘릭 메르빙거의 목숨이 필요조건이 아니지만, 후자에서는 필요조건이니까.
아마 엘릭도 인터레시아의 열쇠를 가져가려고 자신의 뒤를 노릴 게 분명했다.
이렇게 된 이상, 서로 죽이려 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행히 캘리거 백작은 자신을 도와줄 만한 전력을 찾을 수 있었다.
이 잔혹하기 짝이 없는 짐승 같은 놈과 끝까지 같이 가야 한다는 사실이 짜증나긴 했지만.
그래도 지금은 손이 부족하니 그의 도움이라도 빌려서 다만 하나라도 손을 늘려야만 했다.
‘어쩌면 이놈도 같이 치워버릴 수 있을지도 모르고.’
나아가 엘릭이 만든 전공을 전부 가로채고, 메르빙거의 전통마저 이어 ‘찬성공작’의 자리를 자신이 거머쥘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봐, 쿠란시빌.”
캘리거 백작은 그런 속내를 숨기면서 쿠란시빌 자작을 불렀다.
쿠란시빌 자작의 날카로운 시선이 한순간 캘리거 백작의 오른손 검지에 닿았다가, 다시 눈으로 향했다.
‘역시.’
캘리거 백작은 이왕 이렇게 된 것, 비밀을 숨기지 않고 과감하게 털어놓으면서 일을 치르자고 생각했다.
“이 반지, 뭔지 아나?”
“그게 뭐지?”
“이건 인터레시아라네. 메르빙거의 역사, 그 자체인.”
“…!”
쿠란시빌 자작은 캘리거 백작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나올지 몰랐던지 눈을 살짝 크게 떴고.
“이것을 그대와 나눌까 하는데, 제안 한 번 들어보겠나?”
음모를 말하는 캘리거 백작의 두 눈은 흉흉하게 빛나고 있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