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금빛 혜성(彗星)
해보려면 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엘릭이 캘리거 백작의 손을 보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다.
분명히 캘리거 백작은 제국 내에서도 ‘고수’라고 할 만한 실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8써클에 해당하는 현자 급.
크롬헬 황자에게 꼭 필요한 충복이라고 알려진 만큼 뛰어난 실력자인 건 분명하지만.
‘원래 이렇게 손이 작았었나? 어깨도 좁아진 것 같고.’
문제는 그런 존재가 주는 압박감이 적어도 너무 적다는 점이었다.
어린 시절, 엘릭의 기억 속 캘리거 백작은 마치 전설에나 나올법한 아주 커다란 거인(巨人) 같았다.
가문을 이끌어야만 하는 아버지는 항상 병석에 누워 계셔야 했기에, 실질적으로 가문의 대소사를 담당했던 건 캘리거 백작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나 다른 가신이며 식솔들, 그중 누구도 캘리거 백작을 걱정하지 않았다.
그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만큼 그를 신뢰했으니까.
엄숙한 그의 표정을 보고 있노라면 비록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운 분위기가 느껴졌지만, 그래도 메르빙거가 재기한다면 그건 전부다 캘리거 백작 덕분이라고 모두 입을 모아 말할 정도였다.
그래서 엘릭과 헤이즈도 캘리거 백작을 그만큼 의지했었고.
믿음이 컸던 만큼 그가 등을 돌리고 저택을 나갔을 때 받았던 충격 역시 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른이 되고 난 후에도 캘리거 백작과 섣불리 충돌하려 하지 않았던 것은… 배신감과는 별개로 그가 그만큼 어린 시절에 주었던 존재감만은 분명 컸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아직은 캘리거 백작과 부딪쳐서는 위험하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이렇게 캘리거 백작과 마주친 이 순간.
엘릭은 막연하게나마 가지고 있던 그에 대한 이미지가 순식간에 전부 박살이 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작고, 왜소하다.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물론, 캘리거 백작이 그 나이대 귀족들에 비하면 다부진 체격을 가진 건 사실이었다.
메르빙거의 가르침은 ‘마법사도 실전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었고, 녀석은 꾸준히 그것을 실천한 것처럼 보였으니까.
하지만 어린 시절에 가졌던 거인의 이미지와 비교했을 때는 한참이나 떨어질 수밖에 없는바.
8써클?
현자? 대마도사?
분명히 대단한 건 사실이다.
엘릭이 그동안 육망성이나 오거스틴이니, 혹은 팔사자니 하는 존재들을 숱하게 겪었었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만한 실력자가 발에 챌 정도로 많은 건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잖아?’
문제는 대마도사와 줄곧 잘 비교되곤 하는 마스터 급의 인사를 엘릭이 처치한 적이 있다는 점이었다.
비록 권능을 일부 빌렸다고 해도, 직접 요새를 뚫고 사그나드를 처치한 것만큼은 사실이었으니까.
그러니 무서워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캘리거 백작도 어떻게든 상대할 수 있을 테니까.
물론, 아직 그와 정면에서 부딪쳐서는 승산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이런저런 무기가 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팔 하나쯤 앗아가는 것도 무리는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갈등하고 있다는 걸 이 아저씨도 알고 있겠지.’
아마도 굳이 악수를 청한다며 오른손을 내민 건 전부 ‘도발’이 아닐까.
직접 그의 멍청한 아들, 로데오 프란츠의 팔을 자른 건 크롬헬 황자라고 해도, 황자에게 직접 따질 수는 없는 노릇이니 사태의 원흉인 엘릭의 팔이라도 거둬가고 싶은 거겠지.
하지만 사람이 체면이 있지, ‘응원군’이라는 명목으로 합류한 작자가 그런 짓을 저지를 수는 없을 테니 이런 유치한 도발을 한 것 같은데.
자를 수 있으면 잘라봐라. 하지만 그때는 너의 팔도 조심해야 할 거다. 그때는 나도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그리 말하는 것일 테지.
도발에 걸려들면 아들의 복수를 할 수 있으니 좋고, 안 되어도 엘릭의 속을 뒤집을 수 있으니 좋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문제는.
‘그러니까 더더욱 잘라버리고 싶은데.’
엘릭이 그런 도발을 굳이 피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오히려 이럴수록 캘리거 백작의 낯이 구겨지는 것을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꽉!
엘릭은 그냥 캘리거 백작의 손을 맞잡았다.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다들 먼 길 오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캘리거 백작의 눈가에 이채가 어리는 것을, 엘릭은 놓치지 않았다.
『흐흐.』
엘릭은 그런 캘리거 백작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속이 언짢던 차에 갑자기 메피스토까지 웃어대자 배알이 꼴렸다.
[왜 웃어요?]
『어른이 다 되었구나.』
[뭔 뚱딴지같은 소립니까?]
『원래대로라면 이 팔을 어떻게든 잘라버렸을 것 아니냐? 그만큼 책임감이 생겼다는 뜻이겠지.』
또 속 들여다보네, 이 아저씨.
엘릭은 작게 투덜거렸다.
메피스토는 오만하고 냉소적이어서 평상시 단순한 면이 강하지만, 그래도 이따금 툭 내뱉는 말에는 뭔가를 관통하는 것들이 많았다.
지금도 마찬가지.
엘릭의 속을 너무 훤하게 읽고 있었다.
그의 말마따나, 엘릭이 만약 그냥 홀몸이었다면 다짜고짜 캘리거 백작의 팔을 잘라버리려 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가문을 상징하는 깃발을 내세우면서 메르빙거의 이름을 널리 알리고 있는 상황.
최근에 케트라인 요새를 점거하고 북부 전선을 한껏 유린하는 등, 상당한 전공을 세웠다고 해도, 당장 전력 면에서 열세인 것만큼은 분명했다.
당장 적막의 성에 있는 적사자군의 본군 중 일부만 이쪽으로 들이쳐도 위협해질 정도.
그런 상황에서 찾아온 응원군을 함부로 대했다간 장기적으로 위험해질 수밖에 없을 테니.
많은 사람을 책임지는 이 자리에 있는 한, 엘릭은 절대 경거망동할 생각이 없었다.
‘황태자 새끼의 노림수에 놀아나고 싶은 마음도 없고.’
응원군에 굳이 캘리거 백작을 포함시킨 게 누구의 계략인지는 불에 보듯 뻔한 일.
일부러 내부 충돌을 유도해 엘릭과 크롬헬 황자 사이를 이간질하고 싶은 것이겠지.
[이 아저씨, 아직 날 잘 모르시네.]
『음?』
[도발에 능한 게 저 사람이겠어요, 아님 저겠어요?]
메피스토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고 보니 이런 일에 가만히 있을 엘릭이 아니지 않나?
엘릭은 여전히 캘리거 백작의 손을 잡은 상태로 한쪽 입술 끝을 비틀었다.
상대방의 속이 확 뒤집힐 만큼.
메르빙거 특유의 비웃음이었다.
그러고는 캘리거 백작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면서 말했다.
“시종도 고생했어.”
꿈틀!
한순간, 자신만만하던 캘리거 백작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시종.
그 단어가 그를 자극하고 만 것이다.
프란츠 가문이 원래 메르빙거를 구성하던 한 축이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말이었으니까.
“…불쾌하군.”
캘리거 백작의 눈가에 맺힌 주름이 한층 깊어졌다.
살의마저 품은 모습.
헤르만과 세일러의 시선이 저절로 두 사람에게 향했다. 긴장된 공기를 읽은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 중 아무도 그들 사이에 끼어들지 않았다.
신경전은 엘릭과 캘리거 백작, 두 사람이 해결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뭐가?”
엘릭은 태연자약했다.
“본 가가 메르빙거의 가신이었던 건 사실이나, 독립한 지 10년이 넘었다. 그렇다면 여기에 대해 겉으로나마 존중을 표해주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옛 영광에 취해 누르려 하기까지 하다니. 그래도 나는 우의(友誼)로 메르빙거를 돕고자 이렇게 직접 왔던 것인데… 실망이로군.”
짐짓 어른이 아이를 나무라는 듯한 태도.
자존심도 챙기고, 엘릭을 은혜도 모르는 놈팡이로 몰려는 속셈인 것이다.
그리고 그만큼 엘릭을 짓누르는 압박감도 더욱 커졌다.
쩌걱!
엘릭과 캘리거 백작이 딛고 있던 대지가 강하게 짓눌리면서 지표면의 일부가 갈라질 정도였다.
“뭔가 착각했나 본데, 백작.”
엘릭의 비웃음은 도무지 그치질 않았다.
“메르빙거는 여태 프란츠 가문에게 독립을 허락한 적이 없어. 그저 프란츠 가문이 제멋대로 걸어 나간 것뿐이지.”
“…!”
“그리고 당신 아들한테도 분명히 경고했을 텐데. 아무 작위도 받지 못한 백작가의 영식 따위가 함부로 하대하지 말라고. 나는 엄연히 제국을 떠받치는 4대 공작 중 하나. 그만큼 예를 갖추라고. 그런데.”
엘릭은 캘리거 백작을 품평하듯이 위아래로 훑더니 더 크게 웃었다. 그 모습이 캘리거 백작에게는 더욱더 굴욕적으로 다가왔다.
“그대는 어떻게 했더라?”
“….”
순간, 엘릭의 표정이 짐짓 굳어졌다.
“예를 갖추라 할 거면 그대부터 갖춰라, 캘리거 프란츠 백작.”
화아악!
엘릭이 기세를 개방했다.
그러자 확 하고 일어난 마력장이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가 캘리거 백작의 압박감을 모두 지워버렸다.
* * *
아주 짧은 순간 동안.
캘리거 백작의 동공이 크게 요동쳤다.
‘어떻게 이런 힘이!’
엘릭의 기세는 애당초 그가 예상했던 것을 훨씬 상회하고 있었다.
클레이모어 사그나드를 처치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절대 약하지는 않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암살이니만큼 다른 수작을 부렸을 거라는 게 그의 판단이었건만.
아무래도 그의 판단은 전부 틀렸던 모양이었다.
‘최소로 잡아도 나와 비슷한 수준, 아니, 어쩌면…!’
캘리거 백작은 끝까지 엘릭의 실력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자신의 기세를 씻어내고 역으로 압박하는 순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자신의 다른 ‘동료 아닌 동료’가 합세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당장 엘릭을 확실하게 처치할 만한 전력을 갖추려면 말이다.
그리고.
이만한 성장 속도라면 머지않아 그것이 불가능할지도…!
캘리거 백작의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어느새 엘릭의 고요한 시선이 다른 곳으로도 향했으니까.
“그쪽은 어떻게 생각하지, 쿠란시빌 트워크 자작?”
그의 시선이 닿은 곳.
응원군이 집결해 있는 곳으로 부관과 같은 복장을 하고 있던 중년인이 있었다.
그때와 다름없는 예리한 눈길을 간직한 자였다.
한때, 메르빙거의 ‘방벽’을 자처하던 프란츠 가문과 함께, 메르빙거의 ‘창칼’을 상징하던 봉신가가 있었으니.
트워크 가문이라 불리던 그곳은 메르빙거의 왼팔이라고도 불릴 정도로 대단한 성세를 자랑했으니.
하지만 대마전쟁이 끝난 직후, 그래도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프란츠 가문과 다르게, 그들은 가장 먼저 메르빙거의 우산을 벗어났던 존재들이었다.
응원군 속에 숨어 엘릭이 수뇌부와 인사를 나누는 동안, 별의 종군이 가진 허허실실을 파악하려던 그는 갑자기 엘릭이 자신을 지목하자 놀란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엘릭의 눈빛은 여전히 싸늘했다.
“요즘 귀족 예법은 공작이 바로 앞에 있는데도 뻣뻣하게 서 있는 게 정석인가 보지?”
한순간, 쿠란시빌 자작과 캘리거 백작 사이에 시선이 오고 갔다.
낭패다.
그런 생각이 동시에 들었던 것이다.
여기서 이대로 엘릭에게 휘둘려서야 북부 전선이 유지되는 내내 엘릭에게 끌려다닐 것 같다는 불안감이 들었지만.
“내 말 안 들리나, 자작?”
여기서 엘릭의 말을 거부할 만한 명분 따윈 어디에도 없었기에 그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그들은 응원군의 자격으로 참가한 것이었고, 총지휘관은 엘릭이었으니까.
반발한다면?
글쎄. 엘릭이 자신들을 그냥 대본영으로 되돌려보내려 하지 않을까. 그래서야 돌아오는 건 중앙 귀족들의 비웃음밖에 없을 것이다. 기 싸움에 눌려서 버려졌다고.
결국.
쿠란시빌은 앞으로 나서면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공작… 전하를 뵙습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