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능 삼킨 마법사-174화 (173/405)

174화

금빛 혜성(彗星)

예부터 아무 징조도 없이 갑자기 밤하늘에 나타나 은하수를 가르고 사라지는 혜성(彗星)은 많은 이들에게 여러 영감을 가져다주었다.

혹자는 하늘이란 세계의 미래를 암시하는 화판이니, 그곳에다 상처를 내는 혜성이 불길함의 상징이라 하였고.

또 누군가는 죽음을 암시하는 유성과 달리, 강렬하게 빛나며 큰 궤적을 그리는 혜성은 새로운 풍운의 전조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확한 의미가 무엇이 되었든 간에, 혜성이란 갑자기 나타나 많은 것들을 크게 휘젓고 다니는 것을 의미했으니.

금빛 혜성.

찰랑이는 금발을 아름답게 날리며 북방 전선을 크게 휘젓고 다니는 엘릭 메르빙거에게 붙은 별칭은, 그렇게 급속도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그가 단순히 케트라인 요새를 점령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다시 밖으로 나서면서 전황을 크게 뒤집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 * *

적막의 성(城).

주인인 윈즈 변경백, 적사자 안드레 윈즈가 워낙에 조용한 성품을 지닌 탓에 들리는 것이라고는 기사들의 훈련 소리밖에 없다 하여 붙여진 ‘적막’이라는 별칭은 어느새 이 성을 대표하는 이름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적막의 성은 절대 그렇질 못하고 있었으니.

“…16번 병영까지 털렸다고?”

“그… 렇습니다.”

“골치 아픈 일이로군. 이걸 어떡한다?”

안드레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수록 보고를 올린 부관은 자신이 잘못한 게 아닌데도 불구하고 자라목이 되어야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 들어 케트라인 요새에 틀어박힌 엘릭 메르빙거의 움직임이 영 심상치 않기 때문이었다.

클레이모어 사그나드가 죽고, 케트라인 요새가 함락되었을 때. 다들 얼마나 소스라치게 놀랐던가.

특히 안드레는 진짜 자신의 팔이 잘린 것처럼 너무 고통스러워했다. 자신의 만용이 소중한 수하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면서.

그래서 지휘부는 어떻게든 케트라인 요새를 탈환하고자 노력했다.

그들의 주군을 위해서도.

또한, 군의 사기 보호를 위해서라도.

몇 번이나 병력을 보내고, 심지어 다른 발톱들이 나서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패퇴를 겪어야만 했으니.

엘릭 메르빙거가 워낙에 요새의 이점을 잘 활용했기 때문이었다.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결계를 강화한 뒤 마법 폭격만 연거푸 갈기고 있으니 도저히 달려들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사실 그게 지극히 당연한 거였다.

단박에 요새를 함락시킨 엘릭 메르빙거가 오히려 이상한 거였다.

그렇다고 해서 토벌군을 지척에 둔 상황에서 대군을 몰아 케트라인 요새를 직접 칠 수도 없는 노릇.

결국.

지휘부는 이를 갈면서 병력을 뒤로 빼야만 했다.

북방 전선을 저대로 놔두는 것이 찝찝하긴 하지만, 우선 토벌군과의 전면전을 끝낸 뒤에 다시 손을 쓸 참이었다.

당시엔 파악된 별의 종군이 그 수도 턱없이 적으니 별다른 활동을 하지도 못할 거란 판단도 있었다.

하지만… 엘릭 메르빙거는 여기서 다시 그들의 예측을 뒤집고 말았다.

적사자군(赤獅子軍)이 빠진다 싶자, 과감히 케트라인 요새의 문을 열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북방 전선을 제멋대로 휩쓸고 다니기 시작했으니.

유군(遊軍, Guerilla)이 된 그들은 적사자군의 후방만을 집요하게 노렸다.

북방에 포진한 여러 성채를 비롯해 군영지 및 보급 기지들을 탈탈 털어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막으러 갈 때면 감쪽같이 사라졌으니.

그러다 다시 감시가 느슨해진다 싶으면 다른 곳에서 나타나 이전처럼 똑같이 폭풍처럼 휩쓸고 사라졌다.

적사자군으로서는 정말이지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들 내에서도 1, 2급 기밀인 보급소 등의 위치를 어떻게 그리 정확하게 집어내는 건지.

혹시 적사자군 내에 세작이 있나 싶어 한바탕 청소를 하고 난 뒤에도 유군 활동은 멈추질 않았다.

잡으려 들면 사라지고, 그렇지 않으면 나타나고….

그 때문에 나날이 피해가 계속 쌓이고 있었으니.

누군가가 힘없이 던졌던 신출귀몰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어울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또 피해가 발생했다고 한다.

안드레의 시름이 깊어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절 보내주십시오.”

“아닙니다. 절 보내주십시오. 이 녀석들은 현재 자리를 비워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상대적으로 빠진다고 해도 얼마든지 보충할 수 있는 저는 보내셔도 무방할 것입니다.”

발톱들이 너도나도 분기를 터뜨리며 보내 달라고 간청하는 모습에 안드레는 다시 쓴웃음을 지었다.

마음 같아서는 자신이 직접 나서고 싶은 상황.

그러지 못하는 게 천추의 한일 뿐이었다.

‘사그나드… 멍청한 놈. 위험하다 싶으면 달려들지 말고 바로 도망치라고 몇 번이나 말했었건만. 어째서 죽어서까지 나를 이렇게도 괴롭히는 거냐?’

안드레가 사그나드와 발톱을 비롯해 수하들에게 누누이 말하던 게 있었다.

목숨을 걸지 마라.

위험할 것 같으면 주저치 말고 도망치고, 그것도 안 될 것 같으면 투항하라고.

세상에 목숨보다 중요한 것은 없노라고.

하지만 사그나드는 자신의 그런 엄명에 불복한 모양이었다.

못난 놈. 불충도 이런 불충이 없어. 안드레는 그렇게 슬픔을 삼켜야만 했다.

“적어도 사자나 육망성 같은 큰 머리 두 개쯤은 가져와야 계산이 맞겠어.”

그가 알 수 없는 말을 작게 중얼거릴 무렵.

바로 그때, 여태껏 맞은편에서 말없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평범한 얼굴의 사내가 작게 중얼거렸다.

누가 보더라도 아무런 기세도 느낄 수 없어 평범하게만 보이는 그가 말하는 것은 만용으로 여길 테지만.

여기 있는 이들 중 아무도 그것을 허투루 여기지 않았다.

레드 팬텀의 수장이 바로 그였으니까.

스스로 이름도 없다 하여 사람들이 ‘네임리스(Nameless)’라고 부르는 그는 손에 들린 나무탈을 가만히 매만지고 있었다.

그러던 그때.

쾅!

갑자기 지휘부의 문이 활짝 열렸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유독 안색이 창백해 보이는 존재가 거기 서 있었다.

툭 치면 쓰러질 것처럼 병약해 보이건만, 어쩐지 불길한 낌새가 느껴지는 존재.

마족 집단 ‘그리고리’의 유다였다.

“저희가 나서도록 하죠.”

안드레의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너희들은 최대한 늦게 나서겠다고 하지 않았었나? 뒤통수를 때리겠다고.”

“그건 여전히 유효합니다. 다만, 이번 일은 제 사적인 원한이 있는 것이라서 말입니다.”

“사적인 원한?”

유다는 말없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더 말해줄 수 없다는 뜻.

안드레는 아주 잠깐 고민했다.

아무리 그리고리와 손을 잡기는 했다지만, 그는 여전히 그들을 믿지 못했다.

아니, 믿을 수가 없었다.

애당초 마족이란 그런 족속들이니까.

그래서 아군으로 받아들일 때도 최대한 자신의 감시하에 두려 했던 것이다.

“어차피 그렇다고 저들을 내버려 둘 수도 없지 않나요? 지금처럼 대규모 회전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 저런 놈들은 아군의 사기나 뭐, 여러모로 전세에 악영향을 끼칠 테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적사자군의 일부를 뺄 수도 없는 노릇이실 테니.”

일리 있는 말이긴 했다.

어떻게든 손을 쓰긴 해야 했다.

결국 잠깐의 고민 끝에.

“좋아.”

안드레는 결국 그들을 기용할 수밖에 없었다.

“단, 조건이 있다.”

“얼마든지.”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측 백성들의 생명을 담보로 하지 마라.”

유다는 송곳니가 훤히 드러나라 웃었다. 그러고는 우아한 동작으로 예를 갖추며 고개를 숙였다.

“당연한 말씀을. 후후!”

역시나 불길하고 섬뜩하게만 보이는 웃음소리였다.

* * *

만성 병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던 케트라인 요새에 상당한 숫자의 응원군이 도착했다.

“오셨습니까?”

엘릭의 인사에 헤르만이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전공이 아주 화려하더구만?”

“그냥 하던 걸 했을 뿐입니다.”

“음? 정말 제대로 했으면 더 크게 사고를 쳤을 거라고 말하는 것 같은데?”

엘릭은 말없이 미소를 지었고.

헤르만은 ‘허!’ 헛웃음을 터뜨리면서 옆에 있던 노인, 회사자 세일러 홈즈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이 정도면 대답이 되셨을 것 같소만.”

세일러는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하면 충분하다는 뜻.

세일러는 케트라인 요새에 도착하기 전에 헤르만에게 물었다.

엘릭 메르빙거가 어떤 사람이냐고.

헤이즈의 부탁이니 그를 도와주러 가긴 하지만, 일면식도 없는 아이이니 그에 대한 평가를 들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여기에 헤르만은 아주 짤막하게 대답했다.

-직접 보시면 압니다.

그때는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대답인가 했더니.

이제야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사람이란 단 한 마디의 대화로도 그 성품이나 인격이 드러나는 법이니까.

엘릭에 대한 세일러의 감평은 아주 간단했다.

“메르빙거, 그 자체로군.”

백성들이 가진 마도명문의 이미지는 항상 올바름 그 자체였다. 그렇기에 그들은 신화화되어 영웅으로 불려왔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겉보기용일 뿐.

실상이 어떤지 귀족들은 아주 잘 안다.

자만의 화신.

자애(自愛)의 끝.

스스로가 축복받은 존재들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그만큼 오만하기 짝이 없는 일족들이라는 것을.

그런데 엘릭이 딱 그랬다.

자부심이 넘치고, 자신에 대한 확신이 강했다.

보통 이런 존재들을 대할 때,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뉜다.

부담스러워서 피하거나.

아니면.

‘흥미진진하다고 옆에 딱 붙거나.’

세일러는 자신이 현재 후자에 섰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여태껏 엘릭이 해낸 전공만 해도 하나같이 대단한 것들인 데다가, 이곳으로 오는 와중에도 유군 활동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 접할 수 있었으니까.

‘가병들도 하나 같이 눈빛이 단단하고…. 처음에는 그냥 추종자들을 모아두기만 한 오합지졸이었다고 들었는데. 그새 저렇게 되었나?’

지난 며칠 동안 계속 있었던 여러 번의 전투 동안. 별의 종군은 매번 사선을 넘나들면서 승리를 거두고 또 거두면서 빠르게 군대로서의 면모를 갖춰 나갔으니.

이제는 여러모로 정병(精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단단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물론, 여전히 제국 내 여러 유수의 기사단들과 비교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많았지만.

그래도 그 짧은 시간 동안 이만한 수준으로 실력과 기량을 끌어올린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들이 전부 메르빙거의 새로운 기반이 되겠군. 흠!’

세일러는 손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메르빙거.

그들 일족은 이래서 참 신기했다.

그래서 ‘그’도 그만큼 높은 성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일지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작 당대 메르빙거의 가주인 엘릭에게는 절대 말 못 할 내용이지만.

“오만하다고 말씀하시고 싶은 것 같소만. 틀렸소.”

그때, 헤르만이 불쑥 세일러의 상념에 끼어들었다.

“그럼?”

“그저 자신감이 넘치는 것이지요.”

피식.

세일러는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후계자라고 감싸나?”

“허언은 아니지 않소? 그만큼 실력도 좋고.”

헤르만은 엘릭이 귀여워 죽겠다는 투였다.

이놈이 나이를 먹더니 이런 면도 생겼나. 아니면 그만큼 후계자가 마음에 드는 걸까. 세일러는 처음 보는 헤르만의 태도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야만 했다.

그러던 그때. 엘릭이 세일러를 향해서 예의를 갖췄다.

“후배가 홈즈 후작님을 뵙습니다.”

세일러의 눈가에 맺힌 주름이 한층 더 깊어졌다.

“날 아나? 우리는 초면일 텐데.”

“뵌 적은 없습니다만, 누이에게서 풍기던 향이 느껴졌습니다.”

“누이의 향이라.”

세일러는 그 말 한마디로 엘릭이 재밌는 녀석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나름 갈무리한다고 해뒀던 자신의 기질을 제대로 읽었다는 뜻이 아닌가.

아무래도 클레이모어 사그나드의 머리를 쳤다던 실력이 확실하긴 한 모양이었다.

‘한 판 겨뤄보고 싶은데.’

세일러는 가볍게 입맛을 다셨다. 간만에 젊은 아이에게 호승심을 느끼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으니까.

하지만.

“아니 되오.”

헤르만이 칼 같이 자르고 나섰다.

세일러가 인상을 팍 찡그렸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네만?”

“엘릭더러 대련 한 판 하자고 하실 게 아니오?”

“그렇긴 하지만…!”

“후작의 검은 사납소. 언제 어떤 일이 터질지 모르는 판국에 위험한 일을 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지.”

“거, 쩨쩨하긴. 상가의 자식이라며! 통 크게 놀아보게!”

“늙었으면 늙은이답게 옹고집 그만 피우고 그만한 배포를 보이시오.”

엘릭은 투덕거리기 바쁜 헤르만과 세일러를 보면서 묘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친동생이 반란을 일으켜도 크게 분개하기보다는 침착한 모습을 보일 정도로, 여태 감정 기복이 거의 없던 헤르만이 아니었나. 그런데 저런 태도를 보이니 신기했던 것이다. 이사벨도 같은 생각이었던지 조금 놀란 투였다.

마찬가지로 세간에 ‘대부’로 널리 알려져 점잖을 것 같다던 세일러에 대한 이미지도 조금 수정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그 나이대의 여느 노인들처럼 꼬장꼬장하면서도, 나이 어린 이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릴 줄 아는 해학이 있었다.

그러다 엘릭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서 다른 쪽으로 돌아갔다.

이제는 익숙한 청사자가의 기사들뿐만 아니라, 블랙 스컬로 짐작되는 용병 집단이 보였다.

그들 사이에 있던 헤이즈와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더 옆으로 시선이 돌아간 곳에는 여태껏 대화에 끼지 못하고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묵묵히 서 있기만 한 무리가 있었다.

그들을 본 순간.

아주 잠깐이지만 엘릭은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익숙한 면면들이 섞여 있었으니까.

‘제라이츠… 결국 끝까지 내 발을 계속 잡겠다는 거군.’

엘릭의 시선이 닿은 곳.

프란츠 가문을 상징하는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오랜만이구나, 엘릭.”

캘리거 프란츠 백작이 엷은 미소를 띠며 엘릭에게 반갑다고 손길을 내밀었다.

이걸 분질러 버려, 아님 말아?

엘릭은 배신한 옛 봉신의 손을 보면서 아주 잠깐 그런 고민에 잠겨야만 했다.

재능 삼킨 마법사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