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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173화 (172/405)

173화

금빛 혜성(彗星)

‘왜 저런 것이…!’

제라이츠 황태자는 자신의 눈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클레이모어 사그나드의 목이라니.

정말 뛰어난 전략을 사용해 어찌어찌 케트라인 요새를 점거했다고 해도, 사그나드의 목을 들고 온 건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전과였다.

그런데.

“사그나드가… 맞는 것 같습니다.”

한참 동안 사그나드의 머리를 관찰하던 감찰국 요원의 보고에 제라이츠 황태자는 다시 한번 더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허…!”

“거짓이 아니었다고?”

“소문이 진실이라니.”

“단 며칠 만에 케트라인 요새를…? 대체 무슨 마술을 부린 거지?”

“게다가 사그나드라면… 4체인의 마스터가 될 텐데. 메르빙거 가주가 벌써 7써클을 넘어섰던가? 마도사가 아니었나?”

“초신성 급이라더니. 정말이었어.”

하지만 제라이츠 황태자에게 있어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왜 하필 이럴 때 와서!’

지금이 한창 귀족과 장교들, 그리고 참모진이 모여 대전략 회의를 하던 중이었단 점이었다.

현재 그들은 ‘진짜’ 서전(緖戰)으로 계획했던 서부 전선의 전투를 어떻게 승리로 이끌지에 대해서 세부 계획을 논하고 있던 상태.

당연한 말이지만, 제라이츠 황태자는 이번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둘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분명 윈즈 변경백은 무시할만한 자는 절대 아니었다.

거기다 동부 변경의 병사들은 전통적으로 산악 지대의 야만인들로부터 제국을 보호하는 방패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강병(强兵)들이라 할 수 있는바.

하지만 현재 황태자의 명에 따르고 있는 토벌군은 그보다 훨씬 숫자가 많았다.

병사들은 하나같이 오랫동안 단련된 정예병들이며.

그에게 적극적으로 힘을 실어주기로 합의된 인사들도 실로 대단했으니까.

두 명의 육망성과 한 명의 사자.

죽음의 파펜.

중농(重農)과 중상(重商)의 아데나워.

그리고 감사자(紺獅子).

이들만 데리고 전쟁을 치른다고 하더라도 절대 질 수가 없는 싸움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엘릭 메르빙거가 북부에서 한창 어려움을 겪는 동안, 자신이 상대적으로 화려하게 승전을 거둔다면 모든 화제를 자신이 독점할 수 있을 거라고 여겼건만.

설마 패배하라고 보낸 자리를 승리로 이끌어버릴 줄이야…!

실제로 제라이츠 황태자는 수뇌부를 둘러싼 공기가 확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여태껏 엘릭 메르빙거에 대해서 ‘건방진 후배’ 혹은 ‘반짝하는 명성에 들뜬 멍청이’라는 평가가 주를 이뤘다면.

지금은 ‘생각보다 제법인데?’라는 분위기가 대부분이었다.

이로써 첫 서전의 승리로 가져갈 정치적 위광은… 엘릭 메르빙거가 전부 가로챈 셈이 되었다.

여기다 자신의 이름을 브라이언이라 밝힌 전령은 불을 지르기까지 했다.

“그리고 여기… 케트라인 요새의 호부(戶簿)입니다.”

브라이언이 시종에게 두터운 서류 뭉치를 건네자, 수뇌부의 분위기는 다시 한번 뜨겁게 달아올랐다.

“호부라… 저것이면 확실하지.”

“이거이거, 메르빙거 가주께서 우리가 활약할 기회조차 주지 않으시려는 건지도 모르겠소.”

“뒤처지지 않으려면 더 열심히 뛰어다녀야겠군.”

“그러게 말이오. 흐흐.”

호부는 한 지역에 거주하는 백성들의 신분과 가호를 정리하고, 토지 대장을 기록한 것. 달리 말하면, 그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물건이라 할 수 있었다.

이것을 습득해서 제라이츠 황태자에게 바쳤다는 것은 케트라인 요새를 점거하는 수준에서 끝난 게 아니라 확실하게 장악했다는 뜻.

제라이츠 황태자는 저절로 인상이 굳어지려는 것을 어떻게든 참아야 했다.

지금은 어디까지나 수하의 뛰어난 전공을 치하하는 마음 넓은 총사령관의 면모를 보여주어야만 했다.

“메르빙거 가주께서 많이 고생하시었군.”

“찬성공작께서는 오로지 황실에 대한 충의와 제국을 향한 의무를 다했을 뿐이라고 누누이 말씀하셨습니다.”

브라이언은 별 것 아니라는 투로 대답하면서도 제라이츠 황태자의 목소리에 담긴 분기를 놓치지 않았다.

‘이사벨 님의 의견을 따르길 잘했군. 최대한 많은 사람이 모일 회의 때쯤에 기습적으로 대본영을 찾아가야 한다더니.’

브라이언이 전령을 자처할 때쯤, 이사벨이 따로 그를 불러 신신당부했었다.

최대한 천천히 대본영으로 가도 좋다고.

소문이 확실하게 퍼진 뒤에야 찾아가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 거라고 말이다.

그렇지 않는다면 제라이츠 황태자가 분명히 전공을 묻어두려 하거나, 별 것 아닌 것처럼 덮을 가능성이 높다나?

그러니 소문이 퍼져서 귀족이며 병사들까지, 대본영의 모든 사람이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찾아가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 거라고 했었는데.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 지금은 조금 납득이 갔다.

단순히 행정관으로 지내던 시절에는 잘 보이지 않던 더러운 정치적 술수가, 여기서는 아주 무섭게 횡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헛소문이라고 치부하는 이들이 대부분일 테니… 그것을 단박에 뒤집는다면 그만큼 전시성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도 하셨지. 엘릭 님은 이런 곳에서도 전쟁을 겪고 계셨던가?’

정말이지 기가 찰 일이었다.

당장 전폭적인 지원을 해줘도 모자랄 판국에 자신들의 잇속이나 챙기려 드는 꼴이라니.

그동안 막연하게나마 갖고 있던 황실에 가졌던 동경이며 충심에 대해 환멸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어쩌면 적사자가 반란을 일으킨 이유가 이것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흠흠! 그럼 메르빙거 가주께서는 혹시 필요한 게 있으신가?”

브라이언은 제라이츠 황태자가 엘릭을 가리켜 꿋꿋이 ‘찬성공작’이 아닌 ‘메르빙거 가주’라고 지칭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제국에서 내린 권위 높은 작위보다 일개 가주로만 치부하겠다는 뜻일 텐데….

과연 앞으로도 계속 그럴 수 있을지 지켜 보고 싶었다.

“필요하다면 대신 점거에 필요한 인력을 보낼…!”

“찬성공작께서는 케트라인 요새를 중심으로 윈즈 변경주의 북방을 계속 휘저으며 황태자 전하께서 전쟁을 주도하는데 집중하실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는 의지를 밝히시면서, 혹 추가 지원이 가능한지 조심스레 여쭈셨습니다.”

제라이츠 황태자는 이맛살을 살짝 좁혔다. 자신을 돕겠다는 명분을 두는데 방해를 할 수도 없는 노릇.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엘릭 메르빙거를 계속 케트라인 요새에 붙들어 놓는다면, 세간의 이목이 계속 그쪽으로 쏠릴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앞으로도 계속 그가 승승장구한다면 정말 큰일이기 때문이었다.

쓸데없이 자신이 엘릭 메르빙거의 정치적 입지만 키워주는 셈이었다.

그래서 적당한 명분을 둘러 그저 그런 부대를 붙여주려 했지만.

“제가 찬성공작을 돕고 싶습니다.”

“나도 지원하겠소.”

그때, 여태껏 회의 내내 아무 말도 없이 상황을 지켜보기만 하던 두 사람이 나섰다.

순간, 제라이츠 황태자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한 명은 그럴 수 있다 쳐도, 다른 한 명은 전혀 뜻밖이었기 때문이었다.

청사자 헤르만 바일과 함께 회사자(灰獅子)도 같이 자원하고 있었다.

“홈즈 경께서는 어째서?”

세일러 홈즈.

팔사자 중에서 가장 ‘노회한 정치가’라 평가받는 존재.

벌써 여든에 달하는 나이를 자랑하는 그는 평상시 외부에는 일절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은거기인의 행세를 하곤 했다.

겉보기에도 그저 산골 마을에서 지내는 평범한 촌로로만 보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간에서 그의 존재감은 항상 강한 편이었다.

그에게서 사사했다거나, 은혜를 입었다고 알려진 존재들이 제국 각지에서 큰 명성을 떨치고 있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무도 쪽뿐만 아니라, 학계, 정치계, 상계, 언론계 등등, 곳곳에 그를 ‘아버지’라 부르는 존재들이 많았으니.

그렇기에 몇몇 사람들은 회사자에게 다른 별칭을 붙여주기도 했다.

대부(大父).

큰 아버지라고.

언론을 주도할 만큼 보이지 않는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황실과 감찰국에서도 늘 그의 동향을 면밀하게 살피곤 했다.

그리고 현재.

그는 황실의 소집령에 응해 토벌군에 합류한 상태였다.

한데, 그러면서 데려온 전력이 실로 만만치 않았다.

블랙 스컬.

최근 들어 용병 업계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용병단이 그의 수족을 자처하고 나섰던 것이다.

제라이츠 황태자도 블랙 스컬과 회사자의 관계를 이미 파악해뒀기에 그를 부른 것이긴 했지만.

회사자는 자신과 블랙 스컬 간의 관계를 굳이 숨기지 않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다만, 외부에 말하고 다닐 때는 ‘아끼는 아이들’이라고만 할 뿐이었지만.

그런데 토벌군에 합류한 지 사흘도 되지 않은 지금, 그가 갑자기 나선다고 한 것이다.

메르빙거 가주와 무슨 관계지? 제라이츠 황태자의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하는데, 세일러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아, 말씀드리지 않았던가요?”

세일러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 이었다.

“실은 이 늙은이가 말년에 거둔 제자가 바로 메르빙거 가의 여식입니다.”

“…!”

“…!”

“…!”

“본인은 마도명문이라 불리는 가문에서 사자의 제자가 나온다는 사실이 알려져서는 누만 될 뿐이라며 극구 알리려 하지 않으려는 것 같았습니다만.”

세일러의 입가에 훈훈한 미소가 걸렸다.

“굳이 이 늙은이까지 그런 사실을 숨길 필요는 없겠지요.”

좌중에 깊은 침묵이 흘렀다.

수뇌부는 일제히 머릿속으로 주판을 두들기기에 바빴다.

청사자에 이어 회사자까지 메르빙거와 친분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이상, 정치적 구도가 크게 뒤바뀔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제라이츠 황태자도 눈썹이 꿈틀거렸다. 재빨리 옆에 있던 파트란을 홱 하고 노려보자, 그는 다급하게 수하들에게 뭔가를 지시하기 시작했다. 감찰국에서도 놓치고 있었던 사안이란 뜻이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세일러는 푸근한 어조로 말을 이을 뿐이었다.

“그런 메르빙거니 이 늙은이에게도 절대 남은 아닐진대, 가만히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이 늙은이의 걸음이 느려 여태 도와주지 못했으니, 지금이라도 도와야지요. 허허허!”

* * *

대전략 회의가 전부 끝난 뒤.

귀족들이 저마다 어지러운 머리를 쥐어 싸매며 바쁘게 걸음을 옮기는 동안, 헤르만과 세일러는 동시에 대본영을 나왔다.

“정말이지… 갈수록 여우가 되어가시는 것 같습니다.”

“말씀이 너무 심하시군. 아무리 늙었다고 해도 사자더러 여우라니. 그거 명백한 모욕일세.”

세일러가 짐짓 노한 듯한 얼굴로 헤르만을 나무랐지만, 헤르만은 가당치도 않다는 표정으로 콧방귀를 낄 뿐이었다.

“그렇게 들린다면 그렇게 들으십시오.”

순간, 세일러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입술 끝이 살짝 말려 올라갔다. 아주 흥미진진해졌다는 듯이.

“자네, 조금 독해졌군?”

“너무 부드럽게 살다 보니 여기저기서 물어뜯으려 하더이다. 그래서 지금 가진 것이라도 지키려면 어쩔 수 없었소.”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들었네만, 정말이었나 보군. 그러게 말하지 않았나. 가문 일구는 그런 거, 자네의 성향과는 전혀 맞지 않으니 골치 아픈 짓 그만하고 나와 같이 세상 유랑이나 하자고 말일세.”

세일러가 소싯적에 많은 사람을 도와주고 다니며 한창 ‘대부’ 소리를 들을 무렵에 도와준 사람 중에는 청사자도 있었다.

그러니 사실상 두 사람은 팔사자 중에서도 가장 오래되고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셈이었다.

“이제야 와서 그리 말하면 뭣하오? 그리고 이미 나는 현재가 좋소. 딸도 있고. 후계자도 생겼고.”

“하긴. 자네는 예전부터 스스로를 가두는 것을 좋아했지. 어쩌면 그것이 맞는지도 모르겠어.”

세일러의 입가에 맺힌 주름이 한층 더 깊어졌다.

“여하튼 이렇게 된 것, 간만에 같이 신명나게 놀아보세나. 재미도 있을 것 같고.”

“그럴듯한 명분을 대시는구려. 순전히 레드 팬텀 때문에 이러는 거 모를 줄 아시오?”

세일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웃기만 할 뿐.

그러던 그때.

“다들 이런 곳에 계셨군.”

뒤에서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헤르만과 세일러의 표정이 순식간에 살짝 굳어졌다. 그들은 마치 이 현실을 믿고 싶지 않은 듯했지만 끝내 뒤를 돌아보았다.

비열한 웃음소리를 내면서 다가오는 자.

감사자 반트 훅이었다.

“허어. 다들 그렇게 대놓고 상대하기 싫다는 표정을 지으면 아무리 나라고 해도 상처를 받는데 말이야.”

헤르만의 미간에 더 깊은 골이 팼다.

다 같은 ‘사자’라고 해서 모두가 친분이 있는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대부분 사이가 좋지 않은 편에 가까웠다.

황금사자가 팔사자의 연대를 별반 달가워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저마다 특출 난 개성을 자랑한 나머지 합이 잘 맞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이었다.

특히 청사자 헤르만과 감사자 반트의 사이가 가장 그러했다.

젊은 시절부터 정의와 협의로 유명했던 헤르만과 다르게, 반트는 말단 병사에서부터 시작해 지금의 위치까지 오른 자수성가형 인물.

당연한 말이지만, 그 과정이 결코 아름답기만 하지는 않았던바.

오늘날 반트에 대해서는 기회주의적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인 이유였다. 더 이상 크게 오를 곳이 없는 지금도 황태자의 옆에 서서 충견 노릇을 하는 게 그 증거였다.

그래서 헤르만은 반트를 야비하다고 손가락질했고, 반트는 그런 헤르만을 꼴사납다고 빈정거렸다.

지금도 그러려는 태도가 보였다.

헤르만이 그를 별반 달가워하지 않는 이유였다.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나?”

“아니, 그냥. 옛 인연도 있고 하니 충고라도 하나 해주고 싶어서.”

헤르만은 이 녀석이 또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려고 하나 싶은 얼굴로 바라봤지만.

반트는 여전히 비웃음 가득한 모습을 한 그대로였다.

“엘릭 메르빙거. 가까이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을 좀 해보는 게 좋을 거야. 황태자 전하의 다음 타깃이 바로 그거든.”

헤르만의 얼굴이 단숨에 붉게 달아올랐다.

현재 적사자 안드레가 제라이츠 황태자에게 찍혀 반란 분자로 내몰렸다는 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 타자가 엘릭 메르빙거가 될 것이라고 말하는 건, 협박이나 다름없는 소리였으니.

당연히 엘릭을 후계자로 점찍은 헤르만으로서는 화를 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무슨 말 하고 싶은지 알아. 헛소리 말라고 말하고 싶겠지. 하지만 농담 아냐. 잘 고민해서 줄 서라고.”

반트는 유들유들하게 웃으면서 그의 어깨를 탁 짚고 옆을 훌쩍 지날 뿐이었다.

그것이 너무 찜찜한 나머지 헤르만은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뭔가가.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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